"내 아들보다 더 좋은 목사 있으면 말해보라"
"내 아들보다 더 좋은 목사 있으면 말해보라"
  • 최태선
  • 승인 2019.05.05 01: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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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사라져 묻혀버린 이야기입니다. 비교적 대형교회인 한 교회의 목사가 세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조금도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아들인 목사가 서울대를 나오고 프린스턴신학교에서 학위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좋은 목사가 있으면 말해보라고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의 말에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그런 목사들을 가장 훌륭한 목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교 교수들이 큰 교회의 목사로 청빙을 받는 것은 거의 공식처럼 굳어졌습니다. 저는 오늘날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의 부패와 타락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학교와 학위는 결코 좋은 목사를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스펙을 중요시하는 세상의 가치관이 교회를 지배한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 혹은 기독교 지도자에게서 우리가 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저는 그 대답을 사도 바울이 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그는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STIGMATA TOU JESOUS)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진정한 예수의 제자,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흔적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흔적(스티그마)은 우리말로 낙인입니다. 노예들이 도망가더라도 그 신분을 숨길 수 없도록 이마나 가슴 혹은 팔이나 어깨에 불에 달군 쇠로 노예표시를 찍은 상처자국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 상처자국을 본 사람은 그가 노예임을 알 수 있었고 그래서 도망을 치더라도 다시 붙잡혀 주인에게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말하는 예수의 흔적이라는 것은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지울 수 없는 흔적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질서를 뒤엎는 혁명이었습니다. 기득권자들은 그런 불온한 예수님을 그대로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붙잡아 십자가에 달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 예수님의 몸에 상처자국이 생겼습니다. 오상이라고 말하는 다섯 군데의 상처입니다. 예수님의 오상은 단순한 상처자국이 아니라 세상이 그분의 몸에 남긴 흔적입니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신 이유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 다시 말해 복음대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실천하는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당신이 받았던 그 상흔을 똑같이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배설물들을 신주단지 모시듯 신봉하는 오늘날의 교회들이

‘똥통’으로 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교회가 교회라면 교회의 목사 혹은 지도자에게서 바로 그 흔적,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 방식으로 살아 세상으로부터 받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낙인(스티그마)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는 것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스펙을 쌓아가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비우고 또 비워 마침내 작아지고 낮아져서 희생하는, 세상의 관점으로는 실패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 맞는다면 그런 사람들의 몸에 새겨진 예수의 흔적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예수의 흔적을 가지기 위해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혁명의 대열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은 그런 예수의 흔적을 실패자의 낙인으로밖에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화려한 건물과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긴 이력과 그가 이루어낸 가시적인 성취들이 훌륭한 목사의 자격요건이라 확신합니다. 그런 것들은 예수의 흔적이 아니라 세상의 흔적이며 바울의 표현을 따르면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런 배설물들을 신주단지 모시듯 신봉하는 오늘날의 교회들이 ‘똥통’으로 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똥통으로 변한 교회들을 그대로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똥통은 아무리 깨끗이 치워도 똥통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인 교회를 위해 새롭게 출발할 사람들을 찾는 저의 여정은 오늘도 여전히 표류중입니다. 똥통에서 똥냄새를 맡고 그곳이 똥통이라는 것을 알게 된 분들도 똥통에서 배운 지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렵지 않습니다. 세상의 방식과 반대를 생각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방식대로 살려는 사람은 세상의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저항은 곧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가장 잔인한 사형도구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아니 들어설 수조차 없습니다. 부활은 그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부활은 예수의 흔적을 가지게 된 사람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보증이며 영광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진정 사모한다면 목사는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이 예수의 흔적을 가져야 한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꼭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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