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왜 물건을 훔쳤을까?
그는 왜 물건을 훔쳤을까?
  • 김기대
  • 승인 2019.05.08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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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아들의 심리학

어머니(어버이)날에 읽는 책-프로이트에서 라캉까지 아버지는 문제적 존재였다. 권의의 상징으로서의 아버지는 오이디프스 콤플렉스처럼 살부의 욕망을 자극하고(프로이트), 우리를 규정하는 타자인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려 할수록 우리안으로 침범하는 상징이 곧 아버지다(라캉). 종국에는 아버지가 대타자로서 두려운 신 또는 법이 되어서 세상의 모든 아들(딸)들을 위협한다.

아버지의 권위적이고 상징적인 속성을 파악한 현대인들은 아버지로부터 끊임없는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면 아버지가 떠난 빈 자리에는 무엇이 남을까?

마시모 레칼카티의 ‘버려진 아들의 심리학’에는 폭식증에 걸린 한 여성의 이야기가 나온다.

폭식증에 시달리는 한 젊은 여성이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훔치고 싶은 유혹을 견딜 수 없다고 나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 절제가 불가능한 심각한 도벽을 앓고 있는 여성이었다(가끔씩 기억상실증이 동반되면서 언제 무엇을 훔쳤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이 경우에도 훔친 물건은 중요하지 않다. 훔치는 행위가 일단 완결되고 나면 훔친 물건에 대한 흥미는 곧장 소멸되고 만다. 하지만 그 여인은 탈선이 선사하는 전율의 참을 수 없는 매력 때문에, 법에서 빠져나가거나 법에 도전한다는 매력 때문에 도둑질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도벽은 법과는 무관했다. 이 도벽의 불법성에 응답하는 논리는, 가장 중요한 욕망의 대상 자체가 파손되는 오이디프스적 탈선의 역동성을 뒤집어엎는 논리이다.

'버려진 아들의 심리학'(마시모 레칼카티 / 책세상)
'버려진 아들의 심리학'(마시모 레칼카티 / 책세상)

말하자면 여성은 일부러 들키기 위해, 도둑으로 인정받기 위해, 법이라는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도둑질을 했다. 권위가 사라진 시대에 그녀는 타자(법, 아버지, 신)가 그리워서 도둑질을 한 것이다. 이 젊은 여성은 자라면서 부모에게서 ‘안 돼!’ 라고 하는 금기의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기에 금기가 그리웠다. 권위를 그리워하던 여성의 왜곡된 단면이다.

아버지의 권위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고, 자식을 친구처럼 대한다는 부모들이 멋진 부모로 대접받는 ‘버림받은 아들’의 시대에 자녀들은 어디서 권위를 찾을 것인가? 가부장적 권위를 다시 소환할 수도 없고 자녀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관계도 저자는 높이 사지 않는다.

글을 쓰는 나도 자녀들과 친구처럼 지낸다는 주변의 자랑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성년기에 접어든 나의 두 아들과 나는 그들이 SNS를 시작한 10여년전부터 친구 관계가 아니다. 요즘 세대는 친구처럼 다가오는 부모를 진짜 친구로 여기기 보다는 오히려 젊은이의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부모 세대를 용납해주는 것 뿐이다. 부모가 그들을 친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부모를 친구로 여겨준다는 말이다. 게다가 나는 아버지로서의 권위도 없이 그들의 인생을 그들의 것으로 방치했으니 나의 두 아들은 버림받은 것이 틀림없다. 특히 나의 작은 아들은 자기 인생에서 아버지인 나의 영향력이 지대했다고 늘 이야기한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보여준게 없는 나로서는 의아했지만 그의 말이 진심인줄 알았다. 책을 읽고 난 후 아들의 언급은 권위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둑질로 나타나지 않은게 감사할 따름이다.  

상징계에서 실재계로 넘어가는 것은 라캉의 이론에서나 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우리는 여전히 타자가 규정한 상징계에 매여 산다. 라캉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오죽하면 죽음충동이라는 말을 사용했겠는가? 저자는 라캉의 이론을 동원해 오늘을 살아가는 부모 자식의 바람직한 관계를 다룬다.  

타자의 권위는 사라졌지만 권위의 귀환을 바라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저자는 네 종류의 아들 중 델레마코스 유형을 언급한다. 네 종류의 아들이란 오이디푸스와 안티오이디푸스, 나르키소스, 그리고 텔레마코스다. 오이디푸스는 왕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버려진 채 자라다가 아버지 라이오스왕을 죽이고 어머니인 왕비 이오카스테를 아내로 맞고 자식을 낳는다. 저자에 따르면 오이디푸스는 아들로서 존재할 줄 모르는 아들이다. 아버지를 갈등과 투쟁의 대상으로만 보는 프로이트형 인간이다.

타자의 개입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안티오이디푸스는 아버지 없는 고아로 남고 싶어 하는 아들의 모습으로 쾌락 지상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자유롭고 싶어하는 존재’의 허상이다.

나르키소스는 역할이 상실된 세대 간 혼동의 인물이다. 그는 세대 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세계에서 혼자 살아가는 인간이다. 부모와 아이들의 역할이 모호한 상황 속에 던져진 존재로 분쟁만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도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다. 자기 개발이라는 이름 하에 진행되는 자아의 무한한 발전에 목숨을 거는 이들이 나르키소스다. 그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부모들에 의해 그들의 교만은 점점 더 증폭된다.   

텔레마코스는 오디세우스의 아들이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전쟁에 참전하며 아들을 남겨두고 떠난뒤 이십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한다. 바다와 파도가 고향섬으로 돌아가려는 영웅 오디세우스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텔레마코스는 언제나 아버지의 귀환을 기다린다. 그가 아버지를 기다리는 이유는 왕국을 상속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버려졌지만 분노가 아니라 희망을 가지고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들이다.

텔레마코스는 바다를 바라본다. 수평선을 향해 열려 있는 그의 시선은 자신의 사악한 욕망과 죄의식에 눈먼 시선도, 욕망의 치명적 아름다움에 현혹된 시선도 아니다. 텔레마코스는 오이디푸스처럼 아버지의 존재를 하나의 장애물로 경험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방해하는 규율로 경험하지 않는다.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키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오이디푸스보다 텔레마코스를 훨씬 더 많이 닮았다. 젊은 세대는 아버지답게 행동하기를, 누군가가 바다로부터 돌아오기를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세계관을 가져다줄 새로운 계율이 도래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삶을 통해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말의 계율을 전해주는 아버지가 이 시대의 아버지고 그 아버지를 기다리는 텔레마코스는 정당한 상속자가 된다. 그는 상속자가 됨으로써 아버지로부터 전승된 말의 계율을 터득한다. 말의 계율은 즉각적인 쾌락과 그것의 자아충족적인 기능을 포기하라고, 삶의 인간화를 위해 본능의 완전한 충족을 단념하라고 가르친다.

일본이 극심한 경제위기를 겪을 때 지하철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벽에 거대한 거울을 설치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런 시도는 자살자 감소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은 어리석은 일이였다고 분석한다. 오히려 저자는 벽면에 어머니를 상징하는 그림을 걸어 놨어야 했다고 충고한다. 나를 비추어 볼 타자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도 모진 모욕 속에서도 아들 텔레마코스의 기다림을 묵묵히 지켜 봤다. 

아버지의 권위, 어머니의 신화화된 자애로움으로 새 세대를 견인할 수 없다. 부모의 선행적 앎은 더 이상 권력이 아니다. 자식에게 권위적 타자로 존재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시대를 살아낸 증언만 전승하면 된다. 자식은 그 증언을 토대로 자신들 앞에 놓인 모든 위기를 재정복한다. 정의롭게 살지는 못했어도 정의롭지 못함에 부끄러워했던 증언, 막다른 골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증언같은 것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리와 상속이라는 변증법적 과정이 필요하다. 자식과 분리되면서 약점까지도 상속하는 부모, 그리고 약점을 자기의 것으로 재정복하는 텔레마코스같은 자녀들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 부모가 새로운 세대의 부모상이다. 비전이 사라지고 진정한 욕망이 치명적 쾌락과 동의어가 된 이 시대에도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텔레마코스다.

자식이 부모로부터 분리불안을 겪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분리불안을 겪는 역전된 세상, 아직도 옛 권위를 그리워하는 어버이들은 주말이면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거리로 나간다. 그들은 어려운 시대를 거치면서 가족을 위한 증언자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지만 지금 분리불안을 겪으며, 자신들에게 아직 권위가 남아있다는 착각으로 증언자의 자격을 스스로 훼손해 나가고 있다.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라이오스 왕처럼 군림하려다가 버림받는 존재가 되어가는 서글픈 현실이다.

자식들이 델레마코스처럼 살아야 하는 것은 알겠는데 증언자가 사라진 시대에 우리에게 나약함까지도 포함한 말의 계율을 전승해 줄 아버지가 없다는게 비극이다.

미국의 어머니날, 한국의 어버이날이 있는 5월, 자식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어버이들을 위한 책으로 더 어울리는데 어버이들이 읽지 않을게 틀림없다는 사실에 서글픔은 가중된다.

마시모 레칼카티 지음 / 윤병언 옮김 / 책세상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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