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는 최소 두 배 이상 받아야 한다(?)
담임목사는 최소 두 배 이상 받아야 한다(?)
  • 최태선
  • 승인 2019.05.10 05: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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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사 시절 나는 교회에서 삼십만 원을 받았다. 이십여 년 전이지만 그것은 결코 많은 돈이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적은 돈을 받은 이유는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적은 보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담임목사님이 팔십만 원을 받았는데 그 금액에 맞춘 보수였다. 그러니까 담임목사는 최소한 다른 교역자의 두 배 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었다. 삼십만 원은 최저생계비의 반의반도 안 되는 돈이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목사님은 신대원의 교수였다. 그러니까 그분은 교회의 수입 외에 신학교에서 매달 정기적으로 받는 급여가 있었다. 사모님도 강의를 나가셔서 받는 돈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삼십만 원을 받았다. 나는 신학교를 늦게 갔기 때문에 내 집도 있었고 아내가 돈도 벌고 있어서 그 돈을 받아도 생계에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담임목사는 부교역자들보다 더 많은, 최소한 두 배 이상 받아야 한다는 그런 사고는 도대체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신대원을 가기 전 나는 성가대 지휘자였다. 그때도 나는 비슷한 경험을 했다. 지휘자인 나는 30만 원을 활동비로 받았다. 반주자는 그 절반인 십오만 원을 받았다. 어느 해 연말에 나는 목사님께 내 활동비는 안 올려도 좋으니 반주자의 활동비는 좀 올려주시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목사님은 정색을 하고 지휘자의 활동비는 최소한 반주자의 두 이상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내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결국 반주자의 활동비를 올려주시라는 내 말은 내 활동비를 올려달라는 말이 되어서 더 이상 거론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분위기가 교계에 정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최초로 담임목사와 부목사들 간의 이러한 차이를 없애려던 남서울 교회 홍정길 목사님은 재정 장로님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었다. 모두가 똑같은 봉급을 받게 하자는 홍정길 목사님의 제안에 재정 장로님은 난색을 표하며 목사님은 칭송을 받으실지 몰라도 재정을 맡은 우리는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 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 재정 장로님을 다독여 일 년만 그렇게 한 후에 재정 장로님이 욕을 먹으면 그 의견을 철회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모두가 똑같은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생각을 해보라. 지도자는 배봉培俸을 받아야 한다는 교계의 지론과 홍 목사님의 제안 가운데 어떤 것이 성서적인가.

 

그 대답은 예수님의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 너무도 명확히 드러나 있다. 포도원 품꾼들은 모두가 똑같은 품삯을 받았다. 심지어 한 시간 일한 사람과 열두 시간 일한 사람의 품삯이 같았다. 오늘날의 사고로는 불의한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이 포도원에서 일어난 이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새겨야 할 하나님 나라의 원칙을 제시한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나라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급진적인 하나님 나라는 영원히 요원하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모두가 똑같은 것을 먹고 마신다. 이스라엘이 열흘이면 지날 수 있는 광야 길을 40년이나 걸어야 했던 것은 바로 이것을 배우고 훈련하기 위함이었다. 모두가 똑같은 만나를 하루에 한 오멜씩 먹을 수 있었다.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의 가치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모든 일들은 사랑에 의해 이루어진다. 사람의 가치 역시 사랑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들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의 가치는 동일하다.

사람들의 가치가 동일하다는 이 하나님 나라의 원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수의 제자가 아니고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평등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어야 한다. 우리의 생명이 존재하는 한 끝없이 불평등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 백성은 끊임없이 평등을 이루어나가야 한다. 어떤 사람이 아프면 아프지 않은 사람이 아픈 사람을 돌보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많은 돈을 벌면 벌지 못하는 사람과 그것을 나누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높아지면 그 권력으로 낮은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과 그것을 공유해야 한다. 교회는 바로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는 곳이 되어야 한다.

불가능해 보일 것이다. 맞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불가능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최선을 다해 그 불가능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취될 수 없지만 불가능을 향한 그 최선이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만들고 거기에 하나님의 손길이 더해질 때 불가능해 보이던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 백성들 가운데 열리고 임한다.

그것은 일종의 낮아지기 경쟁과 같다

그렇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높아지기가 아니라 낮아지기 운동이다. 끊임없이 낮아지려는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 나라의 평등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단순한 평등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열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공급하심을 경험하는 길이며,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샬롬은 이처럼 세상과 정 반대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큰 불행이며 모든 교회 문제의 출발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 나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 불가능을 향해 도전할 때 주님은 그런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가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하는 절망의 순간 그 바다가 갈라져 벽처럼 설 것이고, 목이 말라 죽을 것 같다고 느끼는 그 순간 반석에서 강물이 흐르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샬롬은 멀리 있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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