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낙태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 권영석
  • 승인 2019.06.03 0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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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주에 이어 알라바마 주에서 거의 절대적인 금지로 보이는 반낙태(anti-abortion) 법안이 통과되자, 전국의 여성들이 술렁이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공화당은 여성 유권자들에게 역풍을 맞을까 우려한 나머지 낙태를 찬성하는 민주당을 향해 '생명 경시당'이니 '영아 살해당'이니 하는 극단적인 언어까지 구사해 가며 맞불을 놓고 있습니다. 강간, 근친 상간에 의한 임신이나, 산모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에는 예외를 둘 수 있다고 보고 임신 6개월 이전에는 산모에게 선택권을 허용하는 것으로 판단했던 1973년 연방 대법원의 판례(Roe v. Wade)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사안이긴 하지만 캐버노 임명으로 인해 보수적인 공화당의 입장을 지지하는 대법관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지라 귀추가 주목된다 하겠습니다.

사생활을 보호 받을 권리를 규정하고 있는 헌법 제 14조와 낙태 금지법이 상충된다는 근거 하에서 내려진 대법원의 판례는 그 후로 마치 일종의 불문율처럼 아무도 크게 문제 삼지 못해 왔던 터라, 새삼스럽게 정치쟁점화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의심할 여지는 다분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종족 번식) 작업이, 기본적으로는 섹스를 통한 정자와 난자의 결합(수정)과 여성의 자궁벽에 붙어서(착상) 배양되는 과정을 거쳐서 새로운 개체가 만들어지고(분만), 또 장기간의 양육 기간 동안 [주로는] 여성의 헌신적인 돌봄을 통하지 않고서는 정상적인 성장(육아)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음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는 애초부터 법으로 모든 것을 다 규정할 수 없었던 사안인 만큼 이러나 저러나 논쟁의 여지는 잠재되어 있었다 하겠습니다. [물론 섹스의 역할과 기능의 관점에서 볼 때 임신과 출산이 섹스의 본질적인 기능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며 또 섹스 당사자들이 임신과 출산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겠으나 항상 의도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이 피조물인 인간의 손에 있지 않음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생명의 창조가 피조물인 인간과의 협업을 통해서야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하는 양가적이고 역설적인 진리가 한편으론 신비를 더하지만, 다른 한편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경우 그 해결책을 찾기가 더욱 복잡하게 되는 이유라 하겠습니다. 예컨대, 강간이나 근친상간으로 인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의학적인 소견상 태아가 정상이 아니거나 산모의 건강에 치명적인 손상이 예상되는 경우 과연 수태된 생명에 대한 권리를 어느 정도로 존중해야 하는 것인지, 또 어느 시점부터 인격적인 존재로 인정해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출산/낙태 여부의 결정권은 누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인지 명쾌한 대답을 찾는 일이 거의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복잡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태아의 생명권(pro-life)을 내세워서 모든 문제를 재단할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반대로 산모의 주도적인 결정권(pro-choice)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재단할 수도 없다 하겠습니다. 어쩌면 이 둘은 서로 배치되는 가치라기보다는 마치 신-인 사이의 협업처럼 둘 다 존중되어야 하고, 해서 둘 다 매한가지로 고려되어야 할 명분이라 하겠습니다. 문제는 이런 절대절명의 순간에서도 결국 최종 결정은,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고 당신의 결정을 알려주시지 않는 이상, 결국 사람(산모 혼자 또는 부부가 함께)이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의사결정의 주체가 누구[로 하]여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어쩌면 더 용이한 문제라 하겠습니다. 그야말로 관계자가 하면 되고 또 관계자가 스스로 직접 하여야 합니다. 대개의 경우 관계자가 곧 마지막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당사자이기에 관계자가 스스로 각오하고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피임법이 개발되기 이전 시대에는 수정의 책임이 정자를 생산하는 남자 측에도 없다 할 수 없었지만, 오늘처럼 사후 피임약까지도 개발되어 있는 시대에는 자궁을 "제공하는" 여자 측이 거의 전적인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는 점에서 [불가불] 여성이 더 많은 결정권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런 현실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결정의 내용이 아무리 합리적인 준거에 따른 최선의 결정이라 해도 출산과 육아의 주체인 산모의 의지에 반한 것이라면 이는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며 도리어 산모의 주체성을 침해하는 우(愚)를 범하게 된다는 점에서 관계자의 주체적/의지적인 결정권을 존중하는 것은 결정의 내용과는 별도로 전제적 선결요건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누가 결정하느냐 하는 문제보다 더 힘든 문제는 결국 결정의 내용과 그 근거라 하겠습니다. 누가 결정을 하든 과연 무슨 기준에 따라, 그리고 어떤 가치를 우선으로 하여 판단을 내릴 것인가에 따라 결정의 내용은 때로 천양지차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생명의 궁극적 주체인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수태된 생명 자체의 주권, 또한 자궁의 소유주인 여성의 주권, 또한 수정 과정에 결정적으로 참여한(시험관 아기처럼 단지 냉동 정자의 기부자로 참여한 경우가 아닌 이상) 남성의 주권을 다 같이 존중할 수 있는 합의점 내지 타협점을 찾을 수 있다면 아마도 그것이 곧 기준이자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 타협의 과정에서 누군가의 권리가 제한되거나 희생되는 일이 불가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어쩌면 우리가 처한 곤경이라 하겠습니다. 신의 의지에 반하거나, 태아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산모인 여성의 신체적 심리적 희생이 강요되거나, 관계한 남성의 의견이 배제되거나 간에 모든 관계를 항상 다 만족시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의 소중함과 나아가서

섹스의 의미를 새롭게 숙고해 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아마도 그동안 연방 대법원의 판례가 묵시적인 기준처럼 인식되어 왔다는 것은 이런 합의점/타협점을 찾는 원칙 내지 가이드 라인으로 손색이 없었다는 반증이라 하겠습니다. 태아의 권리와 산모의 권리를 다 같이 고려해서 낙태여부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경우, 결국 일단 수정 후 착상하여 수태된 태아의 생명이 지니는 지엄한 가치를 존숭해야 하지만, 동시에 강간이나 근친상간처럼 산모의 의지에 정면으로 반하는 임신이나 산모의 생명을 도리어 위협하는 위기상황에서는 예외를 인정할 수 있겠다(내지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고 하는 상식을 대개는 공감해 온 셈이겠지요. 즉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삶의 태도와 방식이 낙태 여부를 결정하는 데에도 적용된다면 기본적으로 이 정도 선에서 타협점을 찾는 것이 창조주와 협업을 해야 하는 인간이 택할 수 있는 차선책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어차피 관계자들의 권한이 상충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이런 합리적인 기준 외에/위에 한 가지 더 고려해야/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으니, 역시 결정의 주체인 관계자들에게 선한 의지가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권리와 의무 또는 권한과 책임 사이의 균형추가 언제나 50 대 50의 한 가운데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49:51의 2%는 양보하고 희생을 감수할 수 있을 때라야 경천(Love your God)도 가능하며 애인(Love your neighbor)도 가능한 법입니다.

그러나 선한 의지란 그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 보지 않는 이상 바깥에서 판단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며, 또 관계자가 아닌 제 3자가 이를 평가한다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하기도 합니다. 실존적으로는 다 자신의 삶은 스스로 결정하는 수밖에 없으며, 그에 따르는 책임 역시도 스스로 지는 수밖에 없다 하겠습니다. 다만, 오랜 역사를 지닌 인류 사회에서 우리가 다 공통된 시행착오를 거쳐 오면서 축적된 지혜를 지침으로 활용하는 것이 안전을 확보하는 지름길이오, 또 우리가 다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만큼 선한 의지를 계속해서 독려하고 모범으로 삼을 정도로 공동선의 정신을 기본선에서 유지하기 위한 테두리는 정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후자를 일컬어서 윤리 내지 도덕이라 하는 것이며 그 기본 마지노 선을 지키도록 강제/처벌 규정과 함께 성문화 해 놓은 것이 곧 법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임신과 출산의 맥락에서 아예 이런 위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즉 예외적인 경우가 돌발하지 않도록 예방하고 차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이상이자 목표가 되어야 함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건전한 가정이란 울타리 안에서 섹스를 향유하고, 또 출산과 육아를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하는 거룩한 소명으로 여겨서 태아를 배태한 여성 당사자만이 아니라 확대가족은 물론 주변 이웃과 공동체 전체에 경천애인의 의지가 스며져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낙태법과 낙태죄를 둘러싼 논쟁이 이런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서 우리 인간의 존재 이유와 삶의 의미에 비추어서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의 소중함과 나아가서 섹스의 의미를 새롭게 숙고해 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선거를 앞 둔 시점에서 이슈를 제기하고 쟁점화해 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다만 그저 표몰이를 위한 양당 대결 구도를 부추겨서 기회주의적인 당리만을 챙기려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태아의 생명을 담보로 득표 전략에 이용하려는 사악한 정치꾼의 구습에 쩔은 보도(寶刀)를 다시 꺼내 드는 것으로 국민 전체의 민도를 되레 떨어뜨리고 경천애인의 황금율을 폄훼하는 것이 될 것이며, 무엇보다 태아의 생명을 유린하는 것이며, 그 연장선에서 결국 이웃은 물론 자신의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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