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장군은 전봉준이 아니라 김개남이다?
녹두장군은 전봉준이 아니라 김개남이다?
  • 김기대
  • 승인 2019.06.05 01:4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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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남아 개남아 수천 군사 어디 두고

드라마 녹두꽃에 ‘개남이’가 안 보인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 가보리

동학농민군이 불렀던 혁명가다. 갑오년(1894) 단숨에 혁명을 완성시켜야 하는데 자꾸 미적대다가 을미년(1895)까지 넘어가면 금방 병신년(1896)이 되어서 실패하고 만다는 내용이다. 이 노래는 동학군의 장군 김개남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이름이 김기범이었는데 남조선을 연다는 뜻의 개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래서 농민군들은 그를 개남장이라고 불렀다.

SBS 드라마 ‘녹두꽃’이 7%대의 시청률로 방영중이다. 동학혁명이 주제지만 드라마를 끌고가는 밑 이야기(서브 플롯)는 적자와 서자 관계인 이복형제의 운명과 그들 각각의 러브 스토리다. 이복형제가 사랑하는 여인이 각각 다르다는 것은 다행이다. 한 여인을 사이에 둔 뻔한 삼각관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제목이 ‘녹두꽃’이니 동학혁명(갑오농민혁명)의 주축 녹두장군 전봉준이 부각되는건 어쩔 수 없더라도 전봉준과 김개남의 갈등이 형제의 이야기와 함께 전개되었으면 극이 더 긴장감이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반 정도 진행되었지만 무명에 가까운 배우가 역할을 맡은 김개남이 극의 중심으로 나올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사랑도 미적, 혁명도 미적거리는 드라마로 흐르고 있다. ‘대하드라마’에 비해 초라한 시청률도 이러한 전개때문일 것이다.

동학군의 장군 김개남(좌)와 드라마 '녹두꽃'의 김개남
동학군의 장군 김개남(좌)와 드라마 '녹두꽃'의 김개남

김개남이 누군가?

소설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의 역사 에세이 ‘염불처럼 서러워서’에 따르면 본래 녹두장군은 김개남이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전라도 동곡리에 녹두꽃이 많이 핀데서 연유한 이름이었지만 김개남이 전봉준에게 대장 자리를 양보하면서 이 명칭도 전봉준의 것이 되었다. 1차 봉기 후 동학 혁명을 수습하러 내려온 전라감사 김학진과 평화 조약을 맺는 과정에서 전봉준과 김개남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5월 9일 전봉준이 제시한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수용하는 조약을 맺고 전라도에 자치 기구인 집강소를 53군데 세웠지만 김개남은 1차 봉기에 나타난 민중의 열망이 가라앉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본래 김개남과 달리 왕실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던 전봉준은 왜군이 처들어 온다는 소식에 그해 10월 북진(2차 봉기)을 결심한다. 어찌보면 조약을 먼저 깬 셈이다. 하지만 이는 일본의 계략이었다. 집강소를 통한 자치가 자리를 잡아가자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일본이 거짓 서신을 보내 동학군을 유도해 내었다.

대원군의 밀서라고 꾸며 전봉준에게 보내진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왜놈들이 조선 내정까지 간섭하여 국정이 혼미하니 전봉준 장군은 최시형 동학 교주와 같이 동학군을 이끌고 북진하여 관군과 손잡고 왜군을 쳐내 달라. (‘염불처럼 서러워서’에서 인용)

이 편지에 속은 전봉준은 북진을 감행했고 승부의 분수령이 된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전봉준은 체포되고 만다. 전봉준의 북진에 회의적이었던 김개남은 전주에서 8000명 군사와 함께 다른 경로로 서울로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우금치 전투에 동학군 전투력이 집중되지 못했고 이것이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김개남은 전봉준에 비해 덜 알려져 있고 심지어는 분파주의자로 인식되어 왔다.

히지만 작가 김성동 뿐 아니라 신영복 선생도 묻혀 버린 김개남을 안타까워 한다.

전봉준과 김개남의 현실인식에 있어서의 차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봉준이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여 반봉건투쟁을 일단 유보하고 항일 반제투쟁에 주력하는 이를테면 주요모순 우선노선임에 비하여, 김개남은 어디까지나 계급모순을 중심에 두는 기본모순 우선노선이다. 그래서 이름도 개남(開南)으로 바꾸어 남쪽에 새로운 나라를 연다는 뜻을 담았다. 남원부사를 비롯하여 순천부사, 고부군수 등을 차례로 처단하는 등 그의 비타협적 의지는 전봉준의 근왕주의적(勤王主義的) 태도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그것 역시 부정적 평가의 근거가 되기도 할 것이다. (‘신영복의 변방을 찾아서’, 경향신문 2011년 11월 29일 인터넷판)

요즘 용어로 풀어쓰자면 전봉준은 NL(자주파)이었고 김개남은 PD(평등파)였다.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진퇴를 거듭하고 있을 때, 김개남의 동학농민군은 청주로 진격했지만 일본군에 패배하고 매부 집에 숨어 있던 그는 친구 임병찬의 고발로 체포되어 전주에서 효수되었다. 임병찬 역시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린 강직한 인물이었지만 전봉준과 마찬가지로 근왕주의자였기에 왕 자체를 부정하는 김개남을 밀고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자주파’와 ‘평등파’는 그때부터 함께 할 수 없는 관계였을까? 

왕을 중심으로 하는 ‘보국안민’을 주장하던 전봉준과 달리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남쪽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했던 김개남을 진정한 혁명가로 보는 시각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1864년 동학 교조 최제우가 혹세무민의 죄명으로 처형당한 뒤, 동학교도들이 그의 죄명을 벗기고 교조의 원한을 풀기 위해 펼친 교조 신원 운동에서 근왕주의적 태도는 나타났었다. 교조가 죄없음을 스스로 선포하지 않고 왕에게 탄원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은 동학 교도들이 봉건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다고 볼 수 없는 대목이다.

왕조 자체를 부정한 김개남은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왕실이 곧 국가이던 시절 당장 눈앞에 닥친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전봉준이 폄하되어야 할 까닭도 없다.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김개남을 작품 속 인물로 소환한다. ‘토지’의 김개주는 김개남을 모델로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박경리의 사위 김지하 시인과 향토사학자 신정일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통영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김개남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었고 그래서 ‘토지’에 그 양반을 썼다는 이야기, 김개남 장군은 세계적 혁명가”(신영복 위의 글에서 인용)라는 말을 박경리 선생으로부터 들었다는 것이다.

김개주는 동학 장군이 되기 전 절에 은거하던 중 남편을 잃고 청상 과부가 되어 절을 찾은 윤씨 부인을 겁탈한다. 윤씨 부인이 수치심에 자결하려 하자 김개주는 "청상이 되어도 평생 혼자 살도록 강요하는 조선의 제도가 잘못이지 당신 잘못이 아니"(이 부분은 2004년 방영된 SBS 드라마에만 나오는 대사다)라며 윤씨부인의 죽음을 막는다 윤씨 부인은 아들 김환을 비밀리에 출산한 후 절에 버려둔 채로 평사리로 돌아온다. 김개주는 훗날 동학혁명으로 전주(김개남이 실제로 전주에서 참수당했다)에서 참수당했지만 그의 아들 김환의 역할은 ‘토지’에서 오랫 동안 계속된다. ‘토지’는 윤씨부인 – 아들 최치수 – 손녀 최서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지만 “반역의 피는 억압된 상민들의 진실이요 소망”(‘토지’ 6권)이라는 김개주, 김환, 김길상으로 이어지는 저항 정신이 ‘토지’의 다른 쪽을 차지하고 있다.

동학 잔당으로 도피하던 김환이 윤씨 부인 집에 머슴으로 들어와 생모인 윤씨 부인의 정식 며느리이자 자신의 형수이기도 한 최치수의 아내(그는 남편 최치수에게 버려진 존재와 다름 없었다)와 야반 도주를 하고(도주를 도운 사람은 윤씨 부인이었다), '토지'의 실질적인 주인공 최서희가 노비였던 김길상(결혼 후 독립운동에 뛰어 든다)과 결혼을 했으니 이 구조만 봐도 박경리 선생이 김개남의 사상에 깊게 영향받은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김환은 김길상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가 최서희의 남편 김길상을 대신해서 죽음으로써 조카인 최서희에게 어머니를 뺏은 죄를 속죄한다.

최서희는 친척 조준구에 강탈당한 땅을 되찾기 위해 토지에 그의 삶을 걸었지만 결국 소설의 마지막에서 되찾은 땅을 모두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준다. 이처럼 '토지'는 윤씨부인으로 상징되는 봉건과 김개주로 상징되는 평등이 3대에 걸쳐 갈등을 겪다가 마침내 하나가 되는 소설이다. 토지 분배 결정이 일본의 재산 헌납 강요에 대한 최서희식 대응이었다는 점에서 '자주'도 큰 역할을 했다.  

전주 덕진 공원에 있는 김개남의 추모비에는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군사 어디 두고 짚둥우리가 웬 말이냐”라고 써 있다고 한다. 이 글귀는 당시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함께 불려졌던 노래다.

도올 김용옥은 동학혁명을 두고 프랑스 혁명보다 위대한 사건이라고 평했다. 그 평가가 인정받으려면 전봉준의 사상만으로는 부족하다. 반쯤 남은 드라마 ‘녹두꽃’에서 김개남의 역할을 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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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ri99 2019-07-31 06:42:20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