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보가 아니라 망보
오보가 아니라 망보
  • 김기대
  • 승인 2019.06.08 10: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일 신문을 매일 검색하는 독일어 동시통역사 자격증을 가진 벗이 내게 말했다. 김영철은 노역형에 처해졌고 김혁철은 총살 당했다는 소식이 조선일보를 통해 세계로 퍼져 나갔고 독일신문에까지 실리게 되었을 때 독일신문의 기사나 댓글을 유심히 살펴봤는데 화법 조동사 sollen이 압도적으로 많이 쓰였다는 것이다.

Sollen은 주관적 진술이나 소문을 전달할 때 쓰이는 조동사인데 조선일보도 “알려졌다”, “전해졌다” 를 사용해서 최후 결론은 피해가려 했지만 거의 단정적인 논조였다. 반면 독일 신문에서는 ‘주관적 진술’이라는 뉘앙스가 훨씬 강한 sollen이 쓰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왜 주관적 진술에 해당하는 조동사를 썼을까? 조선일보를 못 믿어서? 북한 편을 드느라? 아니다. 북한에 대한 편견만 없다면 누가 봐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기사이기 때문일 것다.

(사진:SBS 영상)
(사진:SBS 영상)

하노이 회담의 장면을 되살려 보면 그 결과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충분히 분노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여러 번의 연설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언급하면서 우리 다음 세대들이 핵무기를 이고 살아갈 수 없다고 언급하는 등 몸을 잔뜩 낮추었다. 수령 무오론으로 일관해 온 전임 지도자들과 달리 이러한 태도는 큰 변화라고 세계 언론은 평가했었다. 회담 당일에는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 여기까지 오는 길이 멀었지만 오늘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을 기대한다고도 했다. 분명 트럼프를 살살 달래서 이번에 회담을 성사시키자는 참모들의 진언이 있었을 것이고 북한 성격상 최고 지도자에게 몸을 낮추라고 충고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몸을 낮춘 자세를 마치 항복선언을 하러 나온 패장처럼 취급한 미국 당국의 오만한 태도가 문제였지 북한은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김정은의 분노 가능성과 장성택의 사형을 조합하면 김혁철 사형 정도는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가설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시비거리를 찾으려는 미국입장에서 회담에서 머리를 맞대었던 북한측 전문 관료들이 총살을 당했다는 게 사실로 드러난다면 ‘인권’을 부각시켜 핵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고 나갈 터인데 북한이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할 이유가 없다. 독일 신문의 sollen도 이런 점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다. 주관적 진술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객관적 추론으로는 나올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용례다.
 

장성택 사형을 놓고 체제의 잔인성을 이야기하지만 그것과는 경우가 다르다. 박근혜 정부의 통일 대박론, 통일이 가져올 경제적 효과에 대한 보수 언론의 심층기사, 심심찮게 들려오던 북한 붕괴론, 북한 측에 정보가 전달된다는 점을 뻔히 알면서도 대중집회에서 북한체제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았았던 캐나다 L모 목사의 근거없는 자신감, 장성택의 구속과 사형이 모두 비슷한 시기에 겹쳐진다. 그는 고모부임에도 불구하고 체제에 반하는 행위를 실제로 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북한은 매주 금요일이면 교사 같은 특별 직종을 제외한 사무직 종사자는 모두 노동에 봉사해야 한다.직책이 높을수록 더 힘든 노동으로 구성원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게 취지다. 토요일 학습의 날에는 이데올로기 학습과 자기 성찰(자아 비판) 등으로 흐트러진 자세를 다잡는다.

그러므로 그 사회에서 노역과 자아 비판은 일상에 다름 아니다. 어느 사회든 정책에 실패한 공무원에게는 징계가 따른다.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그들의 징계가 있을 뿐이다. 하노이 회담 실무진들이 진짜로 징계를 받았다면 이런 종류였을 것이다.

조선일보의 오보사태를 놓고 X망신 등등하는 SNS 상의 비판이 있지만 실제로 그들은 잃은 것이 없다. 세계를 한 번 뒤집었고 트럼프까지 언급할 정도였으니 그들의 노이즈 마케팅은 성공했다. 대중들의 기억력에 오보는 사라질 것이고 조선일보는 남을 것이다. 다음에 비슷한 기사가 나오면 또 국내  언론과 세계 언론은 열심히 퍼 나를 것이다. 조선일보라는 브랜드보다 기사가 가진 논리적 완결성을 봐야 하는데 ‘북한은 나쁜 나라’라는 고정관념은 쉽게 조선일보의 기사를 퍼나르게 만든다.

그러므로 오보가 아니라 망보(望報, 亡報)라 불러야 한다. 오보라고 하면 북한에 대한 정보를 얻기 어려운 현실에서 어쩌다 실수한 것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보라기 보다는 북한은 끝까지 나쁜 나라, 잔인한 나라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보수세력들이 만들어 내는 망보 즉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소망이다. 아니면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레 진행되는 남북미 관계가 망하기를 바라는 보도이기도 하다.

오보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의 ‘실수’를 용인해주지 말자. 그것은 의도를 가진 ‘망보’라고 불러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