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종류의 목사
두 종류의 목사
  • 지성수
  • 승인 2019.06.18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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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와서 첫 주일에 교회에 다녀왔다. 개인적으로 잘 아는 목사의 설교는 원숙한 목회자답게 태도나 방법은 모두 완벽하리만큼 흠잡을 것이 없는 훌륭한 설교였다. 그러나 내용은 40년 전 내가 전도사 때 믿고 하던 것과 단 한 글자도 다르지 않았다.

설교의 내용이 교인들만 이해할 수 있는 말이어서 지나가는 사람이 들으면 전혀 동의도 이해도 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말은 멋있지만 현실에서 아무 소용이 없는 공허한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불과했다. 정치로 말하면 당원들끼리 모여서 단합을 과시하는 전당대회용 연설인 셈이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구체적인 노력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오직 갈등과 투쟁의 현장에서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것 보다는 환란 시험 극복하고 얻을 수 있는 마음의 평화만을 추구한다.

그들이 그렇게 믿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친구들과 사이 좋게 지내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는 유치원이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오늘도 세상의 짐이 되고 있으면서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망상에 빠져있는 수백만의 기독교인들을 생각하니 하나님이 불쌍하게 생각이 든다. 세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정복하려 하고 있다. 설교를 듣는 내내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었는데 못되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뿐이었다. 

대형교회를 담임했던 친구 목사들을 만났다. 그런데 그들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비위가 상했다. 그래서 대화를 나눌 일이 없어서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왜 그랬을까? 큰 교회를 담임해 보지못한 루저의 열등의식일까? 아니다. 결코 그들이 부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되는 것으로 보아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루저의 자기합리화일까? 아예 근본적으로 신학적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면 왜 비위가 상하는 것일까?

그런데 이런 증세는 전에도 겪어 본 바가 있었다.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을 만났을 때였다. 권력이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도 그랬다. 결국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비위가 약한 내 체질이 문제인 것이다. 약한 자, 가난한 자들을 만날 때는 전혀 비위가 상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한기총 총무를 했던 선배를 만나서 점잖게 “전광훈이 문제가 많지 않아요?”라고 운을 떼었더니 “문재인은 문제가 없고?”라는 반응을 보였다. 상대가 원래 점잖은 사람이라 “정보를 어떻게 얻느냐?”고 물었더니 조선일보와 보수 우익 유투브를 본다고 했다. 그러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한국에 오니 자연스럽게 목사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내가 만나는 목사들은 두 종류이다.

하나는 년식이 년식이다보니 대부분이 은퇴 목사들이고 다른 하나는 신학을 공부했지만 목회 현장에 접근하지 않거나 못한 젊은 목사들이나 목회를 해도 힘들게 하는 목사들이다. 전자에 속한 목사들을 만나는 일은 적고 후자에 속한 목사들을 만나는 일이 많다. 앞으로 한국에서 이런 이들을 만나서 직업으로서의 목회가 아니라 목회적인 삶을 사는 방법을 함께 찾아볼 생각이다. 그것이 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보니 먼제 그런 경험을 하게 되얶던 사람으로서의 마땅히 해야할 의무라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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