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가 많다
목사가 많다
  • 최태선
  • 승인 2019.06.25 10:59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 천주교회 교세’ 추이 분석(2000-18년)를 보았다. 그중에 사제수가 얼핏 계산해보니 3천5백 명을 조금 넘는다. 새로이 사제가 되는 수품 수도 년 간 최고가 2003년의 154명이며 2018년에는 93명이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전체 교인 수가 5,886,511이니 적절한 숫자라는 생각이 든다. 전체 교회의 20% 정도가 두 명 이상의 사제가 상주한다고 한다. 물론 수녀나 수사와 같은 수도자들이 부교역자의 역할을 하니까 개신교의 목사의 수와 산술적으로 비교하기에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고 해도 적절한 숫자라는 생각이 든다.

개신교의 경우는 이런 통계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것을 단순히 개신교의 특성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무질서한 측면들이 많다. 길을 가다 보면 2층에 신학교 간판을 단 곳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런 곳에서 목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 곳에서 목사가 된 분들은 항상 자신이 목사라는 걸 내세운다. 뒤가 구리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가 다니던 신학교는 학생 수가 천 명이 넘었다. 한 해에 쏟아져 나오는 목사의 수가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수천 명은 넘을 것이다. 그러니까 천주교와 비교하면 한국의 개신교인의 수가 적어도 일억 명은 넘어야 한다.

오늘날의 한국 개신교가 난장판이 된 것은 당연하다. 정통이고 이단을 가릴 필요도 없이 그토록 많이 쏟아져 나오는 목사들이 도대체 어디에서 무얼 할 수 있는가. 목사 일인당 교인 수 열 명도 많은 것이다. 그러니 수만 명을 모은 목사가 거들먹거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는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어떤 존경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 받는 존경이다. 그런 사람들이 재벌의 특성을 보이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오늘날 재벌을 동경하는 이들은 많지만 재벌을 존경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오히려 그들의 특권을 반칙으로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시대의 흐름이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한 때는 큰 교회 목사들이 존경을 받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큰 교회 목사들은 경멸의 대상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주변의 다른 작은 교회들을 고사시키고 자기 교회를 성장시킨 사람들을 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말고 누가 존경하겠는가. 그러면서 다른 교회를 ‘우군’(소강석의 표현)이라고 하고,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설교하는 것은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인가. 더구나 그런 교회들이 자기 교회를 한국교회의 귀감이라고 떠드는 것은 얼마나 낯 뜨거운 처사인가. 그런 곳에서 자기 교회를 뭐라 하는 사람들에게 낫을 들고 돌진하는 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강도의 굴혈은 예루살렘 성전만이 아니다. 이제 한국의 교회들은 강도의 굴혈이라는 말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참혹한 부패와 타락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수님은 그런 성전체제를 뒤로 하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치셨다. 물론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질 것이라는 예언도 하셨다. 오늘날은 그런 예언을 할 필요조차 없다. 이미 모두가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슬퍼할 이유는 없다. 그런 교회 아닌 교회는 무너져야 하고 무너지는 것이 당연하다.

예수님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이다. 나는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개교회성을 복음이 가지는 자유의 온상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이 요구하는 모든 것들은 지향점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각각의 교회는 최선을 다해 그 지향점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그것은 각각의 교회에 주어진 실험의 기회이다. 교회가 유기체라면 모든 교회는 다른 특성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다. 개신교 교회는 그 각각의 특성에 맞는 방향과 목표를 가질 수 있다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그 실험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개신교 교회에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면 교회 역시 찬장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든 낡으면 버릴 수 있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교회가 바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언제든 보배를 담을 수 없는 그릇이 되거나 그릇 자체가 보배가 되었다면 그 그릇은 폐기되어야 한다. 그런 그릇을 담은 찬장은 버려야 한다. 나는 지금의 교회가 그렇고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일어나는 교회의 모든 일탈과 부조리들은 본말이 전도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운동을 열심히 한다. 요즘은 좀 뜸해졌지만 책도 열심히 본다. 그 두 가지는 내가 지난 2십여 년간 고수해온 내 삶의 근간이었다. 건강하기 위해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을 쌓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 두 가지를 내 삶에 가장 중요한 실천사항으로 행하는 것은 언제든 주님이 나를 쓰실 수 있도록 나를 닦는 것이다. 깨끗이 닦아 언제든 보배를 담을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런 나를 사용하시는 것 역시 주님의 몫이다. 그래서 나는 조바심을 내지 않는다. 내가 신학교를 나온 것도, 내가 목사가 된 것도, 내가 전 재산을 드렸던 것도, 아무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주님이시고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하는 그 일을 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날마다.

나는 이십여 년 간 교회를 한 후에 3년 전 복음이 말하는 교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기존의 교회의 틀에 담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예배를 멈추었다. 새로운 지체들을 만나 복음이 말하는 참된 교회를 이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여전히 혼자이고 예배는 기족들과만 드리고 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교회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는 내가 아직 일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교회의 반석이 되기에는 내가 아직도 너무 미흡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내가 쓴 글을 보고 어떤 이가 당신은 당당하냐고 물었다. 물론 당당하지 않다. 내가 가는 길은 애초에 당당하게 가는 길이 아니고 겸손해야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쓴 글의 내용대로 그렇게 실천하고 있는 것이냐고 묻는 질문이라면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시대가 어둡다. 암울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그 길을 갈 것이다. 그것은 ‘마이 웨이’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내 외로움은 당연한 것임과 동시에 인내를 이루는 환란이라는 축복이다. 아무리 목사가 많아도 주님이 쓰실 수 있는 목사는 많지 않다. 나는 꼭 주님이 사용하시는 목사가 되고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이강진 2019-06-26 15:26:04
목사가 많아서 문제라기보다는 참된 목사가 적어서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