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누구냐?
너는 누구냐?
  • 박충구
  • 승인 2019.06.27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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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한겨레 티브이에서 한국교회의 변종적 특성에 대한 대담을 녹화하기로 했다. 손봉호 교수님이 전반을, 내가 후반을 맡았다. 주제가 “한국교회 나는 너를 모른다”다. 얼마전 전 씨의 뜬금없는 청와대 퍼포먼스가 만들어낸 질문 같다. 기독교, 교회, 도대체 뭘까? 내 생각 속에 얽혀 있는 기독교 2000년의 기여와 과오, 130년 역사를 가진 한국 기독교의 기여와 과오, 그리고 무수한 분파로 나뉜 오늘의 현실을 생각하니 나의 머리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이 없다. 기독교 너는 정말 누구냐? 정말 고민이 많다.

이사야는 상한 그루터기에서 솟아나는 새싹을 노래했고, 절망의 현실에서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하실 것이라는 비전을 가졌는데, 그 새싹과 새일은 우리에게 어떻게 된 것일까. 우리는 그 새일이 메시아의 도래, 그 메시야로 시작된 기독교, 교회라고 여겼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사람의 교회라는 증거만 쌓이고 있다.

서구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 중심의 하나님 이해는 교회의 쇠퇴와 더불어 사라지고 만다. 어쩌면 예수도, 하나님도 오늘의 교회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을 거부하실 것 같다. 성서에는 “남은 자” 사상도 있다. 모두가 참 하나님 신앙에서 벗어나 패역의 길을 간다고 하여도 남은 자가 있다는 믿음이다. 간혹, 증오와 혐오를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이 자기 무리를 의화하기 위해 남용하기도 했던 개념이다. 요즘도 그런 자들이 날뛴다. 이렇듯 죄많은 인간은 성서도, 하나님도, 교회도, 관계도 자기 욕망을 위해 이용한다. 법과 정의를 위해 일한다면서 불의한 자들도 적지 않다.

로마 제국이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까지 그 영토를 확장하며 군사주의 폭력의 위세를 떨칠 때 예수는 무엇을 생각하셨을까. “예수를 새롭게 깨닫는 것, 그것은 곧 예수를 지금까지 모른다는 말”이라는 페친의 글이 의미가 깊다. 깨닫는 것과 그 깨달음을 실천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실천 없는 깨달음이란 죄다. 모르면서 짓는 죄 보다 알면서 짓는 죄가 더 나쁘다 하셨으니, 우리 기독교인들은 더 나쁜 죄인들인 셈이다. 그 중에서 나와같은 성직자들은 더더욱 죄인이다. 남에게 깨닫게 하면서 자기는 딴 길을 가는 아주 노골적인 죄인이다. 두려운 일이다.

그러니 우리 기독교인은 비기독교인보다 더 죄인이다. 아니 우리 목사들은 더 더욱더 죄인이다. 알면서 모르는 척 사는 위선의 대가들로 사는 일이 습성화된 무리다. 나의 주장에 반대하는, 24시간 예수만 바라본다는 이들도 있겠지만, 목사들의 세계에서 보면 정말 그렇다. 장로와 결탁해서 가난한 신자가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대단위로 털어가는 이들을 보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알고 바친 신도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세워진 교회에 걸터앉아 주인 노릇 하다가 제 자식에게 넘겨주는 것을 성공이라고 치켜세워주는 자도 목사다.

이젠 교단을 불문하고 “도둑질로 목회를 마감한다”라는 세간의 놀림 말이 목회 실습 훈련에 들어가야 할 정도다. “교회가 결정해 준 것이지... 훔친 것 아니다.”라고 항변하는 이도 있다. 제 재산은 꼭 움켜쥐고 신도들의 헌금을 마구 퍼주는 장로들이 민주적으로 결정했다면 그건 “특수절도”다. 목사가 교회법에 없는 돈을 장로들과 짜고 가져갔다면 공금횡령이다. 대형교회일수록 돈이 많으니 크게 털어갈 수 있다.

대통령도 제 자식에게 일자리 하나 줄 수 없는 세상인데, 교회 목사는 제 자식에게 신도의 헌금으로 교육비, 유학비를 고급스럽게 대주고, 제 교회 데려다 일자리 주고, 마침내 교회를 물려준다. 교회는 목사가 오너고, 큰 교회 오너의 자식은 대통령의 자식보다 더 특권을 누린다. 가난한 교회 목사들에게는 꿈과 같은 이야기다.

우리가 죄인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떤 이는 원죄를 그 근거로 대지만, 그리고 그 대응책으로 예수의 속죄양 이론으로 땡처리하듯 처리하지만, 속죄받았다는 부흥회 찬송을 부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노골적인 죄인이다. 그래서 죄인과 속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루터가 오죽하면 용서받은 우리 존재를 바라보며 아무래도 의로움이 전혀 없는 데 의롭다 하시니 겸연쩍어 낯선 의라고 했을까 싶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와 은총이 필요한 존재다. 하지만, 보편적 죄론으로 모든 행위를 상대화할 수는 없다. 예수를 모른다면 몰라도..., 하지만 목사가 예수를 모른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젊은 목사들의 앞날이 걱정된다. 지금부터 연금을 들어 노후를 준비하시기 바란다. 교단 연금도 크게 믿을 바가 못 된다. 지금은 평신도들이 그루밍 되어 목사들이 교회를 털어 나갈 수 있지만, 앞으로는 그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금도 넣을 처지가 못 된다면 천박하고 가난한 이를 이웃과 벗으로 대우한 예수의 가르침으로 국가가 사회정책을 세우도록 하시라. 북구의 기독교 세계가 그 길을 택했던 것이 아닌가? 자본의 단물을 빨던 미국 근본주의자는 그 길을 인본주의, 자유주의 신학의 길이라고 버렸지만, 북구의 나라에서는 국민은 거지꼴, 국회의원, 정부 고위층은 귀족으로 사는 세상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나라에선 목사들이 교회를 터는 일로 목회를 마감하지 않는다. 가난해도 국가사회가 인간다운 양심과 품위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나라에서는 동성애자도 차별하지 않고 인간으로 정중하게 대우한다.

교회의 미래, 희망의 근거는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알면서 외면하거나 슬며시 버려온 예수의 가르침 외엔 다른 것이 없다. 원시 기독교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사상으로 돌아가 그의 하나님 나라 비전에서 우리의 삶을 구조 조정하자는 것이다. 이 길이 아닌 길에서 길과 진리와 생명의 길을 찾으려 한다면, 굳이 목사로서 살 이유가 없고, 기독교인일 필요가 없다. 영혼 구원? 그것이 삶의 목적이라면 죄 많은 세상에 버려두지 마시고 일찍 데려가시기를 기도하면 된다. 금식과 단식을 오래 하면 더 빨라진다. 영혼 구원 외치다가 특수절도로 목회를 마감하는 이들을 뒤따르지 마시라. 성의를 걸치고 권력, 금력, 명예욕, 육욕에 빠져 절어 있는 한 자신의 영혼 구원조차 물 건너 간 것이 아닐까.

웨슬리는 교회 위기의 원인에 대하여 “믿음의 좋은 본을 보이는 이가 적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교회에 나갔는데 ”예수는 없고 목사가 주인이더라”라는 소리가 사라져야 한국교회가 산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 아니 목사의 욕망이 죽어야 교회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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