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같은 제일 개혁교회의 마지막 선택
변기같은 제일 개혁교회의 마지막 선택
  • 김기대
  • 승인 2019.07.04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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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서 책을 읽다(7) - First Reformed
영화 First Reformed 한 장면 @ NEWS M 편집부
영화 First Reformed 한 장면 @ NEWS M 편집부

 

네덜란드계 이민자들이 세운 뉴욕 스노우 브리지의 제일 개혁교회(First Reformed Church)는 250년 된 유서깊은 교회지만 오래된 교회들이 그렇듯이 지금은 초라하다. 과거의 명성에 기대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제일 개혁교회는 독립전쟁 당시 민병대의 기지 역할도 했고 캐나다로 탈출하려는 노예들을 돕기 위해 노예반대론자들이 만든 통로인 이른바 ‘지하철도’의 ‘대합실’로도 이용되었다. 지하철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주로 퀘이커 교도들과 개혁교회 교도들이었으니 영화의 제목과 이 설정은 어색하지 않다.

지금은 10여명 미만의 교인만이 남았고 간혹 명성을 듣고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을 팔거나 학생들의 역사 체험 학습장으로 교회는 기능한다. 때문에 톨러 목사(에던 호크)는 그 일을 위한 ‘관광 가이드’이자 막힌 변기를 수리해야 하는 교회 관리인에 다름 아니다. 그는 컴퓨터 자판보다는 펜으로 일기를 쓰면서 자기 위안을 삼는데 과거에 매여 있는 교회와 그의 삶도 별로 다르지 않다는 의미다. 하지만 화려했던 교회의 과거와 달리 톨러 목사의 과거는 화려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때부터 군인 집안이라는 가풍을 잇기 위해서 톨러 목사도 군목으로 복무했고 아내의 반대에 아랑곳 않고 군대에 보낸 아들이 이라크에서 전사했고 그 일로 이혼했으니 ‘전통’을 중시하던 그의 판단은 가족의 슬픔만 불러 왔을 뿐이다. 때문에 어릴 때부터 같은 교회에서 성장한 에스더가 그의 주변을 맴도는 게 과거를 후벼파는 것 같아 부담스럽다.

어느날 톨로는 메리(아만다 사이프리드)라는 임산부의 상담 요청을 받는다. 극단적 환경 주의자로 환경 보호 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가석방 중인 남편 마이클을 만나달라는 요청이었다. 종말을 향해 치닫는 듯한 환경문제와 활동가들의 피살 사건을 전하는 마이클, 이런 문제들로 지구는 곧 멸망할 것이기 때문에 아내의 뜻과 달리 아이를 낙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를 목사는 상투적인 말로 위로하고 가르치지만 목사 자신이 자꾸 마이클의 논리에 빠져들어가는 것만 같다. 자기의 삶에서 큰 의미를 찾지 못한던 톨러는 환경문제에 몰입한 마이클 앞에서 초라함을 느낀다. 

마이클이 집에 없을 때 메리는 목사를 불러 남편이 숨겨 놓은 자살 폭탄 조끼를 보여준다. 그는 마을의 환경 오염 공장을 날려 버릴 작정이었다. 며칠 뒤 공원으로 와 달라는 마이클의 전화를 받은 톨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마이클은 자살한 뒤였다. 메리와 툴러는 자살 조끼를 들킨 일로 마이클이 자살한 것 같아 자책감에 사로잡히고 이 자책감은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를 만들어 낸다.

톨러는 제일개혁교회의 후원 교회이자 가끔씩 가서 젊은이들의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풍요로운 삶 교회’ 청년들을 마이클의 장례식에 참석시키고 그들에게 일종의 ‘운동가요’를 조가로 부르게 한다.

시간이 갈 수록 마이클이 던져 놓고 간 환경문제에 천착하게 된 톨러는 악명높은 공해 기업이 자신의 마을에 있는 사실에 분노하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에 좌절한다. 한 술 더 떠 공해기업의 대표는 ‘풍요로운 삶 교회’의 큰 손이었다. 제일 개혁교회는 풍요로운 삶 교회의 후원으로 25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여기도 공해 기업은 돈을 내 놓았다.

공해 기업을 폭파시키기 위해 사전답사까지 한 톨러는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기업주에게 면죄부를 주는 교회도 문제가 있다고 보고 기업가 목사 정치인 지역 유지 할 것 없이 다 모이는 자리인 250주년 기념 예배에서 마이클의 자살 폭탄 조끼를 입고 ‘순교’하기로 마음먹는다.

폭탄을 장착하고 흰색의 목사 가운을 입는 순간 남편의 사망후 언니 집으로 떠났던 메리가 기념예배를 위해 교회로 들어오는 것을 본 톨로는 갈등하기 시작한다. 자살 폭탄 테러를 계획하던 즈음에 언니집으로 떠났던 메리에게 기념식때 오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메리가 나타난 것이다. 자신과 다른 이들은 다 죽어(여)도 되지만 그녀는 죽일 수 없다. 그는 온 몸에 철조망을 두르며 자해한다. 예수의 가시 면류관처럼 그는 죄인들을 용서해주어야 하는가의 혼돈에 빠진다. 시간이 되어도 기념예배시간에 나타나지 않은 톨러를 목사관으로 찾아간 메리는 피투성이가 된 그와 격렬하게 포옹한다.

이 영화를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는 영화로 읽는다면, 즉 교회의 사회 참여를 주제로 이해한다면 완전한 오독이다. 악덕 기업주를 교회의 핵심 교인으로 인정하는 대형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한 영화로 본다면 아이슬란드 영화 ‘언더 더 트리’를 이웃간의 일조권 분쟁이 가져온 살인의 비극 즉 층간소음 같은 문제를 다룬 영화로 본 것과 같은 감독에 대한 모독이다. ‘언더 더 트리’는 일조권 분쟁을 다룬 영화가 아니라 옆집의 일조권을 방해하는 거대한 나무가 있는 집의 주인이 가진 과거의 트라우를 다룬 영화다. 잎사귀가 무성한 오래된 나무의 깊은 뿌리는 과거로부터 한발짝도 나가지 못한 주인의 삶이다. ‘퍼스트 리폼드’도 과거가 주제다.

영화에는 변기가 자주 등장한다. 첫 장면부터 변기의 수리를 놓고 후원교회의 기술자를 부르자는 장로와 직접 하겠다는 목사가 충돌한다. 후원교회 목사와 톨러는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마틴 루터가 화장실에서 작곡했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변기가 막혔을 때 뜷는 강한 화학 약품도 자주 등장한다. 톨러는 자살 폭탄 테러를 앞두고 늘 마시던 위스키 잔에 그 화학약품을 붓는다. 변기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꽉 막혀있는 톨러의 심리를 보여주는 장치다. 그는 결국 약품을 마심으로써 답답함을 뚫으려 한다. 톨러가 성경공부에 참여해서 극단적인 의견을 내 놓는 청년에게 분노했을 때 표현한 ‘성조기에 똥을 뿌린 거 같다’에는 청년과 자신, 그리고 미국에 대한 분노가 모두 담겨 있다. 청년을 비난하지만 톨러도 군대를 꼭 가야하는 국가주의자였고 극단적 환경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극단의 ‘똥’들이 자신을 변기삼아 배설되면서 내려가지는 않고 있는 것이다.

과거란 무엇인가? 프랑스 혁명 이후 진보가 최고의 가치로 대접받던 시기에 과거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 사람은 발터 벤야민이었다. 벤야민은 시간을 역사의 사간과 자연의 시간으로 나누는데 김진영은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다.

벤야민이 응시하는 당대의 시간은 역사의 시간이 아니라 자연의 시간으로 매몰되어 가는 무상한 시간, 즉 자연사의 시간입니다. 다시 말해 당대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을 따라서 그 어떤 미래의 도래도 기대할 수없이 다만 무상하게 몰락해 가도록 운명지어진 시간이었습니다. 이 몰락의 운명, 도래하는 미래의 부재는 그러나 벤야민의 역사관에 따르면 과거의 부재 때문입니다. 한 시대의 몰락은 많은 이들이 외치듯 그 몰락할 미래시간에의 비전이나 가능성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비록 풍요로운 미래가 약속되어 있다 해도 만일 그 시대가 과거의 시간을 망각한다면 그 시대의 미래는 몰락의 미래, 지배자들의 미래일 뿐입니다.(김진영, 김진영의 벤야민 강의실-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24쪽 )

미래는 우리의 미래가 아니기 때문에 없는 미래이고 우리의 미래를 가능케 할 과거도 없다. 공해기업같은 지배자의 미래는 톨러의 미래가 아니기 때문에 그는 미래를 구성할수 없는 과거로부터 자꾸 벗어나려 한다. 우리의 미래가 가능하려면 과거를 기억해 내서 새롭게 직조해야 한다.

 제일개혁교회가 다시 소환해야 할 과거는 지하철도다. 사회적 최약자였던 흑인 노예의 탈출을 도왔던 교회의 과거가 미래의 가능성이다. 교회가 가진 독립운동과의 연관성도 자랑스러울 수 있지만 그것은 땅의 논리였고 패권의 논리였다. 그렇게 땅을 차지한 1세대 백인 이민자들은 영국으로부터 뺏은 것을 지키기 위해 노예와 원주민에게 똑같은 짓을 했고 21세기에는 세계를 향해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지배자들에게 포획된 현재는 고립된 시간, 비상사태의 시간이다. 이 비상사태는 메시아적 개입과 같은 신비의 영역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다.
 

폴 슈레이더 감독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의 몽타주를 재조립하는 것이다. 충분히 흥미로운 방법으로 재조립하면 그것은 새로운 것이 될 것이다”라며 자신이 사랑했던 거장 감독들을 재료 삼아 자신만의 세계를 보여준다. 모두가 블록버스터영화만 좇는 시대에 그가 보여주는 이 오묘한 장면은 조악한 퀄리티의 장면처럼 보일지 모르나 단단한 규칙을 깨고 안전한 선택을 거부해온 그의 ‘초월적 스타일’이란 태도를 가장 잘 보여준다. (김현수, 퍼스트 리폼드, 씨네, 21 1202호)

몽타주를 재조립하는 것, 그것은 기억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독실한 개혁교회 집안에서 태어난 폴슈레이더는 17살까지 영화 한 편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경험에 기초한 기억은 신비로 재구성되어 영화에 나타난다. 톨러 목사는 마지막 일기에 이렇게 쓴다. 

모든 보존 행위는 창조행위다. 모든 보존된 것들은 창조를 지속한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하는 방법이다. 

환경보존은 교회와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당면과제지만 교회는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기념예배에 모인 죄인들의 보존도 신비다. 이 영화를 2018년 10대 영화 중 하나로 꼽은 미국 영화 평론가들의 선택은 극단을 치닫는 현대가 신비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5: 20)

김은국의 소설 '순교자'는 평양을 점령한 국군이 평양에서 일어난 공산당에 의한 목사 14명의 학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을 다룬 소설이다. 사람들은 14명 중 풀려난 2명을 배교자로 지목하고 12명의 순교자를 체제 선전 차원에서 거대하게 추모하려 한다.

하지만 조사 결과 12명은 모두 살기 위해 배교했다가 죽임을 당했고 자신이 존경하던 박목사의 배교 과정을 지켜 보면서 미쳐버린 젊은 한 목사와 끝까지 신앙을 지킨 신목사가 석방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김은국은 여기서 초월적 진리와 정치의 긴장관계를 다룬다. 점령한 국군의 입장에서는 공산당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추모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려고 한다. 신목사는 추모예배를 집례하면서 배교자 역할을 마다않고 맡는다. 진실과 달리 사망자들을 순교자로 미화하고 자신이 죄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신목사의 거짓 증언에 의하여 배교자들은 대중들의 기억 속에 순교자로 보존된다. 

순교자는 진실과 정치의 긴장관계를 다룬 수작이다. 이렇게 낮아진 신목사는 국군이 평양에서 다시 퇴각할 때 함께 가자는 국군의 권유를 거절하고 남겨진 자들과 함께 한다.

신목사는 후퇴하는 남한군 유엔군과 함께 평양을 떠나기를 거부했으며, 결국 어느 누구도 그의 최후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영역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상충하는 소문만 무성할 뿐, 누구도 그의 순교를 목격하지 못했다. 수사학자 버크 Kenneth Burke 가 지적하듯이 순교는 인간이 아니라 절대자가 증인이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순교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허영에 불과하다. 이 점에서 신목사는 아렌트의 “설사 진리/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인간은 진실할 수 있다”는 말을 실행에 옮겼음은 물론이고 생각컨데 “설사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인간은 신앙심이 충만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모범적인 행위와 즉음을 통해서 보여준 것일까? (강정인, 죽음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170-171쪽)

공해기업은 누가 봐도 악 즉 부정의다.하지만 톨러의 역할은 부정을 응징해서 진실을 밝히는데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는 비겁하다. 마지막 톨러를 발견한 메리가 그를 목사가 아닌 이름(FIRST NAME)으로 호명하자 비로소 톨러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깨닫고 메리와 격하게 포옹한다.
 

교회는 신비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대형교회의 추한 민낯이나 그들을 비판하는 조롱의 손가락질에 이미 신비는 사라진지 오래다. 그 자리에 서로가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거친 목소리만 남았다.

 신의 정의는 최선의 경우에도 거의 불가사의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존재하는지 조차 매우 의심스럽지만 우리는 고통받는 대중을 위한 신목사의 희생적 헌신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적 정의의 원리를 만나게 된다. (강정인, 위의 책, 152쪽)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도 First Reformed Church가 아니라 First Reformed다. 개혁되어야 할 것은 교회 말고도 많다. 개혁이 꼭 제도여야 할 필요도 없다. 신비로의 귀환은 왜 개혁이 될 수 없는가?

 

 

영화

퍼스트 리폼드, 폴슈나이더 감독, 2018년

언더 더 트리, 하프슈타인 군나르 지그라쏜 감독, 2017년

순교자,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문학동네, 2010년 

김진영의 벤야민 강의실-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김진영 지음, 포스트카드, 2019년

죽음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강정인 지음, 책세상,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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