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문명은 희생의 체제이다.
세상 모든 문명은 희생의 체제이다.
  • 최태선
  • 승인 2019.07.04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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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맞는다면 가장 먼저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사실을 모른다면 복음은 결코 복음이 될 수 없다.

모든 문명에는 노예가 있었다. 오늘날 비록 노예라는 직접적인 제도는 사라졌지만 사회 곳곳에 노예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먼저 성서를 살펴보자. 성서가 쓰인 시기는 노예제도가 사회적으로 당연하게 용인되던 때였다. 초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노예들이 많았다. 심지어 오네시모와 같이 도망친 노예까지 있었다. 도망친 노예들은 잡히면 주인에게로 돌려지는데 그렇게 잡혀온 노예들은 심각한 린치를 당한 후에 가장 천한 일을 하는 노예가 되거나 사형을 당하는 것이 당시의 관행이었다. 노예들은 ‘말하는 짐승’들이었다. 그들에게는 같은 인간이라는 동료의식이나 인권이라는 최소의 존엄마저 없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성서는 그런 노예들에게 가일층 굴레를 씌우는 듯한 권면을 한다.

“(종들아)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런 말씀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노예제도 찬성자라는 비난을 하기도 한다. 정말 바울이 노예제도를 찬성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인가.

아니다. 바울은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권력에 굴복하여 노예제도를 찬성하거나 동조하여 이런 권면을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노예의 비참한 현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런 권면을 한 것은 첫 번째로 노예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로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바울의 이런 방식은 비폭력저항이라는 하나님 나라 방식의 전형적인 일환이었다. 또 가히 하나님의 지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현실적으로 가장 완벽한 방식이기도 했다. 빌레몬서는 그 해설서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바울은 세상 권력에 직접적으로 저항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저항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노예제도 반대를 외쳤다면 그는 노예들과 함께 권력자들의 손에 희생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순식간에. 그러나 그가 노예제도에 동조하거나 찬성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노예를 노예가 아니라 형제로 대한 것이다. 그는 그들과 한 식탁에서 먹으며 노예들이 형제들임을 말없이 보여주었다. 식사뿐만이 아니라 모든 행동을 통해 그들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신과 똑같은 인간임을 보여주었다.

그리스도인들 중 누구도 바울의 그런 행동에 의아해 하거나 불의하거나 무질서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자매와 형제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노예제도는 근본적으로 존립의 이유를 상실했다. 그 생생한 모습이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 중 누구도 바울의 그런 행동에 의아해 하거나 불의하거나 무질서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자매와 형제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노예제도는 근본적으로 존립의 이유를 상실했다. 그 생생한 모습이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모든 문명은 존립을 위해 희생양들을 필요로 한다. 세상 자체가 희생의 체제인 것이다. 그런 세상이 잘못된 것이고 희생양이 없는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복음이고 또 그래서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희생의 체제인 세상에 대한 이해 없이 복음을 아는 것만으로는 복음이 복음 될 수 없다. 희생의 체제인 세상의 실체를 보고 희생양이 하나도 없는 하나님 나라가 진정으로 완벽한 나라임을 깨닫지 않은 사람, 또 하나님 나라가 현실에서 가능함을 믿고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아가기로 결단하지 않은 사람은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라. 자한당은 시장의 자유를 내세우며 최저임금 때문에 경제가 엉망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마치 개가 뼈다귀를 물고 다니는 것처럼 집요하게 마치 그것이 정답인 것처럼 말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의 그런 행태가 바로 희생의 체제의 가장 분명한 특징이라는 것을 영적인 안목으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주장대로 오늘 우리의 경제가 어려운 것이 최저임금 탓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희생의 체제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아무리 복음에 대해 많이 배우고 아무리 제자훈련을 받아도 그리스도인도 아니고 예수의 제자도 될 수가 없다. 나의 이런 말을 들으며 내가 좌파목사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지난 3월에 광화문광장에서 있었던 3.1절 구국기도회 @ [NEWS M] 편집부
지난 3월에 광화문광장에서 있었던 3.1절 구국기도회 @ [NEWS M] 편집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진보와 보수를 말하는 것은 그들이 희생의 체제의 신봉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가장 분명한 관점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진보와 보수가 있을 수 없다. 좌파와 우파가 어찌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평화의 나라이다. 희생의 체제인 세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평등을 이해할 수 없다. 희생양이 없는 샬롬 역시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끝없이 사람들을 진보와 보수, 혹은 좌파와 우파로 나누면서 희생양을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의 방식을 따를 것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교회가 가장 보수적이라는 말에 안정감을 느끼고 자긍심을 가진다. 정말 웃기는 일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세상으로부터 진보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희생양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기만 해도 그것은 세상의 눈에 진보로 인식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보가 옳다는 말이 아니다. 가장 약한 자들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 세상 사람들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시는 분이시다.

우리 교회에서는 음식점 종업원들에게 반말 안 하기. 조선족 종업원들에게 팁 주기와 같은 가장 희생양이 되기 쉬운 사람들을 사람답게 대하고 섬기는 일을 우리 교인들의 실천사항으로 정했다. 나는 얼마 전 종업원에게 갑질을 하는 진상 고객에게 음식값을 받지 않을 테니까 나가라고 하고 다시는 우리 식당에 오지 말라고 한 음식점 주인의 기사를 보았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돈은 희생의 체제가 질서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세상의 질서를 사랑으로 뒤엎으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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