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깨달음
큰 깨달음
  • 지성수
  • 승인 2019.07.12 10: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울 신촌의 퀘이커 미팅에서  독립해서 모임을 가지는 곳이 있어서 갔다. 가서 보니 사무실이 있는 장소가  나와 깊은 인연이 있던 장안 빌딩이었기 때문에 생각나는 일이 많았다.

1981년에 황산이라는 곳에서 시골에서 올라와 공장의 기숙사나 자취를 하는 노동자들이 모이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교회는 1년 예산이 300만 원도 안 되었고 월 10만 원으로는 도저히 생활이 되지 않았지만, 가냘픈 여공들이 뼈를 깎으면서 번 십일조라서 생활비를 받을 때마다 “저 애들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구나.”하 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때부터 어떻게 하면 내 손으로 돈을 벌어먹고 살면서 이들을 섬길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지인의 소개로 봉제 노동자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 장안평에 새로 시작하는 봉제공장 총무과장으로 취직이 되었다.  신설공장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생산 라인을 채우기 위해서 공원을 구하는 것이었다. 먼저 들어온 노동자들을 통하여 부도가 나거나 운영이 잘 안 되는 회사가 있다는 정보를 얻으면 그 회사의 노동자들을 끌어들였다. 그래도 안 돼서 추운 겨울날 성북지역 노동부 지역사무소 앞길에서 떨면서 하루 종일 기다리다가, 다른 공장에서 일을 하고도 돈을 못 받아서 신고를 하고 나오는 노동자들을 데려왔다.

한 달 동안 열심히 뛴 결과 2개 라인에 100여 명의 노동자들을 채울 수 있었다. 총무과장으로서 노동자들을 위한 기숙사나 식사 등 모든 것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지만 기숙사의 환경이 열악에서 추운 겨울 날 여자들이 찬물로 머리를 감았다. 안 되겠다 싶어 우선 화장실에 대형 연탄난로를 설치하고 물을 데워 쓰도록 했다. 하지만 더운물에 머리를 감으려면 새벽에 남보다 두 시간은 먼저 일어나야 겨우 차례가 올 정도였다.

자금이 원활하게 돌아가지를 않아서 월급이 한 번도 제 날짜에 나오지 않더니 결국 6개월이 안 돼서 부도가 났다. 일단 부도가 나자 회사의 분위기가 살벌해지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돈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야 했고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선 빨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했다.

경영자는 줄 것이 없자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나는 회사에 남은 물건들을 처분해서 나누어 주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총무과장님이 회사 편이 아니고 자기들 편에 서주어서 고맙다면서, 밀린 월급 때문에 무거운 재봉틀을 한 대씩 가지고 갈 수 밖에 없던 어린 여성 노동자들과 눈물을 흘리면서 헤어졌었다. 

회사를 모두 정리하고 텅 빈 공장과 기숙사를 바라보는 것 보다 마음속에 뚫어진 구멍을 메우기가 더 힘들었었다

당시 나는 생존의 현장과 영적 생활이 하나 일 수 밖에 없었다.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야만 했고 기도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회사에 가면 불교신자인 부사장이 번번이 “총무과장! 목사라며?”라고 시비를 걸었다. 그럴수록 나는 업무로서 내 능력을 보여야만 했다. 그러나 생각하면 감사한 일은 이 시기는 참다운 영성은 삶의 현장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된 시기였고 비로소 전태일의 죽음을 느끼게 된 시기이었다는 일이다.

 

나와 동갑인 전태일의 1970년 8월 9일의 일기이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간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명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 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

전태일이 분신한 순간 그는 영과 육이 하나가 된 순간이었던 것 즉 다. 그 순간 전태일은 다석 유영모 선생이 ‘솟아나는 나’라고 표현한 ‘솟나’ 가 된 것이다. 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솟아나는 나’ 즉 ‘얼나’로 태어나서 수 많은 노동자들의 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태일이 어린 여공들의 권리를 찾아주기 위하여 자신의 몸에 신나를 끼어 얹고 불을 지를 때 나는 그 여공들에게 교회에서 4영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왜냐하면 청계천에서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장로님이 여공들을 데리고 나왔는데 신학생인 나에게 그들의 새 신자 교육을 맡겼기 때문이었다. 전태일이 얼나로 태어나는 순간 기성종교에 포섭되어 있던 나는 같은 대상을 교회의 신자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제도 교회는 사람의 영성을 맡아서 관리해주는 위탁업체일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 생활과 영적 생활은 다른,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관계가 없을 수 있는 것이다.

지성수목사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