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때문에 교회가 망하는 게 아니다.
동성애 때문에 교회가 망하는 게 아니다.
  • 최태선
  • 승인 2019.07.15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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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신학자가 한 말이다. 나 역시 그분의 말에 동의한다. 전에도 나는 ‘우리가 주님을 지켜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말을 자주 했다. 비단 동성애뿐이랴. 역사 속의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교회가 망할 것을 걱정해왔다. 그리고 실제로 교회의 위기는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망하지 않았다. 동성애라는 말만 들으면 가슴이 떨리는 분들은 여전히 내 말이 못마땅하게 들리고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본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지를 알게 되기를 바란다.

1632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그의 책 <<대화>>에서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당시 교회는 종교 재판을 걸어 그의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 가톨릭은 무려 359년이 지난 1991년에 와서야 이 종교 재판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고 교황이 나서 이에 대해 공식 사과를 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무지한 인간이 선을 알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 얼마나 잘못된 태도인가를 볼 수 있다. 당시로서는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악이었다. 그러나 곧 이어 이루어진 과학적인 발전에 의해 자신들의 판단이 잘못된 것이었음이 명백하게 드러났음에도 그 잘못을 인정하는 데만 무려 359년이 걸린 것이다. 그만큼 선을 가리는 인간의 태도는 바로잡기가 힘들다.

갈릴레이의 지동설의 가장 중요한 인류 정신사적 의미는 지구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로부터의 탈피였다. 당시까지 서구인들의 의식 속에서 우주의 중심은 지구였고, 지구의 중심은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인간 중심의 사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인간이 비록 하나님이 아니더라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역할을 자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1859년 찰스 다윈이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을 때 교회는 그의 얼굴을 원숭이의 몸에 덧붙여지는 캐리커처로 그리며 그를 조롱했다. 그의 주장을 옳고 그름으로만 생각한다면 나 역시 그의 주장이 틀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면 인류 역사에 중요한 변화를 줄 수 있는 귀중한 통찰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

다윈의 진화론의 가장 중요한 인류 문명사적 의미 역시 인간중심주의에서의 탈피라고 말할 수 있다. 다윈은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고 주장하지 않았고 사회진화론을 말하지도 않았다. 다윈의 진화론의 메시지는 인간이 다른 모든 생명체 위에 군림하는 '창조의 면류관'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과 함께 얽혀 살아온 우주의 한 작은 생명체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생물학적 진화론의 정신사적 의미는 인간을 자연 위에 군림하는 어떤 특별한 존재로 보던 소위 정통적 기독교의 인간관을 거부하고, 인간을 자연 안에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존재로 파악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관이 본래 성서의 인간관이라는 점이다.

갈릴레이와 다윈은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서구 문명의 숭고한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지동설은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서 추방했으며, 진화론은 인간이 '창조의 면류관'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생명체와 연관된 존재임을 이야기했다. 둘 다 우리 인간이 이 광활한 우주에서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닐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당시 교회는 이것을 신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그것을 명백한 악으로 규정하였다. 하지만 갈릴레이와 다윈의 과학적 발견은 오히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인간중심주의로부터의 해방은 결코 신앙심을 축소시키는 게 아니다. 도리어 기독교 신앙의 지평을 확대해주고 풍요롭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지구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인간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진정으로 우주 만물의 창조주임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한한 우주에서 그리고 아주 오래된 생명의 역사에서 인간이 아주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과학적 발견은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게 도와준다. 인간이 '창조의 면류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주 변두리의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한없는 은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행한 수많은 일들이 얼마나 옳지 않은 일들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중세 마녀 사냥이나 이단 정죄, 인디언 학살 사건이나 남미의 식민지 정복과 수탈, 흑인 노예 제도의 옹호와 여성의 학대 등등은 모두가 인간들 스스로 선한 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함에서 비롯된 참혹한 비극들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들은 인간이 계속해서 선을 판단하고 거기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한 역사 속에서 반복될 것이다.

그렇다. 혐오와 배제의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의 선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다. 엘륄은 그것을 원죄라고 한다.

인간이 잘못되는 것은 인간이 악을 택하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선을 정하고 그것을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숙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왜 선악과를 따먹었느냐고 추궁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된 인간에게 물으신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질책이 아니라 관계의 확인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바로 설 때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는다. 구약 성서의 가장 핵심 질문이다. 신약에도 이와 똑같은 질문이 있다.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질문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교회가 망하는 진짜 이유는 바로 이 질문에 담겨있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끊어졌을 때 교회는 망한다. 부패하고 타락한 오늘날 교회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오직 유일한 길은 이 질문에 옳게 대답하고 대답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고, 주님이 주님 되실 때 교회는 바로 선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백성이 되어 주님처럼 아버지의 뜻을 행할 때 교회는 비로소 교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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