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 운동을 했던 일본인들, '늑대 부대'
반일 운동을 했던 일본인들, '늑대 부대'
  • 김기대
  • 승인 2019.07.27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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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도발로 시작된 한일간의 갈등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그 중심에는 미쓰비시가 있다. 대표적인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는 1970년 일본의 반전 단체들에게도 제국주의 일본의 상징이었다.

갱내 인부들은 원래 토목 공사 인부들이었다. 전쟁 말기에는 조선인 노동자가 대부분이었으며, 이 인부들은 돌관 작업을 위한 갱도 뚫기, 암석 굴진, 물이 있는 현장 등 어려운 곳을 맡았다. 현장에는 늘 우두머리가 지키고 있었고 도망을 감시하는 파수꾼을 갱도 요소에 배치했다. 기숙사에는 높은 울타리를 쳐 봉건적 노예 노동의 철칙에 묶여 있는 것과 같았다. 장소를 불문하고 린치를 가했다. 탄 차가 탈선했는데 혼자서 바로 하지 못하면 허리가 빠질 정도로 때리는 것은 다반사였다.’ < 미쓰비시 비바이 탄광 노조 편 『탄광에 산다』 > (김이경, 강제 징용 문제의 몇 가지 논점, 민플러스 2017년 3월 30일 기사에서 재인용)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을 다룬 영화 '늑대부대를 찾아서'의 한 장면 (DMZ 국제다큐영화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을 다룬 영화 '늑대부대를 찾아서'의 한 장면 (DMZ 국제다큐영화제)

이 글에 따르면 도주한 조선인 강제 징용자가 40%가 넘는 작업장도 있었다. 일본의 이러한 만행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일본 내 급진 단체가 1960년대 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일본의 제국주의가 패전으로 무너졌다는 인식에 반대하며 전범 기업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급진 단체 중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 늑대’가 가장 활발하게 그들의 강령을 실천에 옮겼다.

1971년 12월 11일, 시즈오카에 있는 ‘관음상 흥아관상(興亞觀音) 순국7사비’에 폭탄을 설치해 비석을 파괴한다. 흥아관상이란 말 그대로 아시아를 흥하게 했던 관음상을 말하는 것이고, 순국7사란 도쿄 재판에서 전범으로 처형당한 7명을 말한다. 순국7사비는 전범의 유골 등을 모아 1959년에 건립된 비석이다. (중략) 또 이들은 1972년 10월 23일에는 홋카이도 개척 100년 사업의 일환으로 홋카이도에 설치돼 있던 ‘풍설의 군상’이라는 조각상을 파괴한다. 홋카이도 선주민 아이누에 대한 일제의 침략에 항의하고 그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서다. 이들은 홋카이도 설치를 ‘개척’이 아니라 ‘침략’으로 보았다. 10월 23일은 아이누 민족의 지도자인 샤크샤인이 1669년 일본인에 의해 살해된 날이다. (권혁태, 일본을 폭파한 일본인, 한겨레 21, 2011년 11월  16일)

동아시아 항일 무장 전선은 마사히 다이도지에 의해 1970년 봄 결성되었다. 다이도지를 중심으로 모인 젊은이들은 재일사학자인 박경식의 ‘조선인 강제 연행의 기록’(2008년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으나 현재 주요 인터넷 서점에서 모두 절판되었다)을 교재로 사용했다. 그들은 도시 게릴라전에 관심을 갖고 저항 운동에 관한 자료도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1972년 12월에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다른 좌파 조직들과 달리 전위당을 만들지 않았던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은 세포 중심으로 움직였다. 아마도 거대 조직보다는 행동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단위(세포)가 필요해서였을 것이다. 그중 늑대 부대는 1974년 8월 30일 미쓰비시 중공업 도쿄 본사에 폭탄테러를 감행함으로써 8명이 사망하고 376명이 부상당했다.  1974 년 8월 14일, 히로히토 천황이 타고 가던 열차가 지나는 철교를 폭파하려고 했으나 ‘레인보우 작전 (Rainbow Operation)’ 이라는 코드 명을 썼던 이 계획은 사전 정보 유출로 실패로 돌아갔다. 한국의 김미례 감독은 ‘늑대 부대를 찾아서’라는 영화를 2017년에 제작해서 DMZ 영화제에서 선보였다.

여기서 낯익은 이름이 등장하는데 육영수 여사 시해범으로 알려진 문세광이다. 늑대 부대는 같은 해 8월 15일 문세광의 ‘거사’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문세광이 마오저뚱과 김일성 사상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재일 소설가 양석일의 2001년 소설 '죽음은 불꽃 같다'에서는 문세광과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의 연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타진하고 있다고 한다. 2001년 출판 당시 한국어 번역판을 낸다는 신문 기사가 있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국에서의 출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박정희는 일본 제국주의의 충직한 장교였으니 반제국주의적 늑대 부대가 영향을 받은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미쓰비시를 비롯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기업, 침략자에 대한 공격’으로 규정한 그들은 일본에 의한 난징대학살이 시작된 1937년 12월 10일에 맞추어 1974년 12월 10일에 또다른 전범 기업 다이세이 건설 본사를 폭파한다.

이듬해인 1975년 5월 19일, 다이도지는 대부분의 행동대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중 사이토는 체포된 직후 자살했다. 구속되지 않은 조직원들은 일본 적군파와 연대해 비행기를 납치해서 구속자 석방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다이도지는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인 2017년 옥중에서 병사했다. 테러 당시 21세였던 기리시마 사토시는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

'에펨 코리아'라는 사이트의 미스터리/공포 게시판에 2017년 1월 한국인 여행객이 나리타 공항에서 찍은 거라며 기리시마 히토시의 현상 수배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흉악범들과 나란히 수배된 그가 한국인 관광객에게는 그냥 흉악범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런 급진 운동이 일본 적군파에서 정점을 찍으면서 일본 진보 운동의 궤멸을 가져왔다고 비판하는 소리들이 있다. 일견 맞는 말이지만 한국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칼럼리스트 후지이 다케시는 조금 다르게 본다. 후지이 다케시는 그들의 행동이 폭력적이었다는 점에서 비판의 소지는 있지만 그런 급진 운동의 소멸이 일본이 아직도 제국주의 망령을 못버린 이유라고 진단한다.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은 미래의 비전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과거와 그 연장선상에 있는 현재만을 직시하며 그것을 단절시키는 것을 자신의 책무로 여겼다. 그들이 천황제 문제와 식민 지배 책임 문제 등을 선구적으로 제기할 수 있었던 이유도 미래를 고민하기보다 현재가 어떤 과거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시도는 실패했으며 그들이 제기한 문제의식이 많은 시민 운동에 의해 계승되었지만 일본의 역사는 끝내 단절되지 않았다. 지금 일본에서 일제의 망령이 넘쳐나는 것은 그 결과다. (무명의 말들, 포도밭출판사, 2017년)

권혁태 성공회대 교수도 위 한겨레 21의 칼럼에서 비슷한 입장을 보인다.

이들의 행동과 문제의식은 매우 거칠고 단락적이고 유아적이고 관념적이다. 이 점이 너무 지나쳐서 이들에게서 완전무결한 순수함마저 느낀다. 하지만 20여 년 전에 접했던 이들의 ‘반일 혁명 전선’이라는 문건에서 받은 충격은 지금도 나에게 남아 있다. “우리들 일본인은 아이누·조선·중국을 침략한 제국주의 본국인이며 지금도 그 생활은 피식민지 인민의 생활을 희생으로 삼아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세계 혁명의 주체로 스스로를 만들어나가려면 우선 무엇보다도 일제 본국인인 우리 자신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일 갈등이 심화되면서 보수 언론을 비롯한 일부 지식인들은 불매 운동이 감정적이라고 ‘훈장질’을 한다. 그러나 어떤 운동이든 시도할 자유가 있다. 그것이 젊음이다. 게다가 그런 류의 훈장질 대부분은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에 대한 대안 제시가 없다. 오직 양보하며 굴복하라는 말뿐이다. 불매 운동에 나서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일 불매 운동이 ‘민족’을 불씨 삼아서 이어가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들, 활동가들, 노동자들과 연대해서 ‘제국주의’의 망령과 함께 싸워나가는 긴 호흡을 준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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