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싼 용서
값싼 용서
  • 박충구 교수
  • 승인 2019.07.30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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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흑백 갈등 문제에 관한 투투 주교의 책 “용서 없이 미래 없다”를 오래전 서평을 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요즈음 일본인들의 전형적 악을 고발하는 글을 쓰니 어떤 분은 내게 혐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종교가 용서와 화해를 말해야지 지난 과거를 들추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혐일이 아니라 혐악을 한다. 나는 순진한 평화가 아니라 정의로운 평화를 원한다. 그래야 미래를 함께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불어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이 화해와 용서다.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사람을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용서는 화해를 이루고, 화해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를 허물어 하나 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악행인지 명료하게 밝혀져야 한다. 악행으로 인하여 겪은 피해자의 고통을 악행 자가 인식해야 한다. 이런 절차가 결여된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따라서 진정한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악을 행하고서 그 악을 부인하는 이를 향한 일방적인 용서란 그저 순진하고 값싼 용서다. 악행자가 악을 참회하지 않았고, 그의 악행으로 인한 피해자의 고통조차 인정하지 않을 경우 그 용서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 진정한 화해가 없는 용서, 그것은 심약한 자가 하는 단순한 면책 행위일 뿐이다. 이럴 경우 악은 뿌리가 살아남아 다시 행해진다. 많은 기독교인이 이런 유의 자가 용서에 익숙하다.

집단의 악행은 강한 자 편에서 행해진다. 집단의 악행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의 악을 징벌할 능력을 갖춘 힘이 형성될 때뿐이다. 집단의 악을 멈추게 할 능력이 없으면 우리는 속수무책 피해자로 살아가야 하고, 강한 자의 시혜만 기다리게 된다. 제국주의적 지배 아래 있었던 식민지 나라와 국민이 겪은 일이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결국 강자에 의한 약자 차별적인 관계가 보편화된다.

2차 대전 이후 자신들이 범한 악의 현실을 앞에 두고 고민하던 일본인들은 미군정의 약점을 파고들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인 양 행세했다. 이런 이들의 행태가 받아들여진 이유도 있다. 당시 점령군 지위에 있었던 미군정은 동아시아 냉전 체제 형성을 위해 막대한 피해를 본 조선에 대한 보상보다는 가해자 일본을 감싸고 돌았고, 이런 흐름에는 당시 미군정 내부에서 통역하던 순진한 평화주의자, 지일파 퀘이커의 활동이 컸다.

패망국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약자의 위치에서 교묘하게 벗어나 여전히 강자로 군림하는 것이 가능해진 이유다. 거기에는 한국전의 수혜를 입어 철학적이거나 도덕적인 우월성이 결여된 경제적 강자 의식도 한몫을 했다.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에게 범한 죄를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노동현장에서도, 시장에서도 강한 자들은 자신의 범죄를 쉽게 인정하거나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대학에서도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1948년 2차 대전이 끝나고 신생국들이 도처에서 독립했을 때 남아공에서는 공식적으로 어느 목사가 발의한 인종차별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흑인과 백인 사이에는 사랑도 결혼도 할 수 없었고, 사는 지역을 분리해 감시했을 뿐 뿐 아니라 흑인들에게 온갖 폭력을 가해도 권력을 쥔 백인들은 백인을 처벌하거나, 백인 범죄자를 잡지 않았다. 그 차별의 역사가 48년 동안 지속하였다.

마침내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남아공에서 백인들이 스스로, 혹은 흑인 하수인을 앞세워 범한 반인륜적인 범죄를 처리하는 문제가 제일 시급한 과제였다. 백인의 숨겨진 악행들이 드러날 때마다 그는 몸서리쳐야 했다. 이런 현실을 직면하여 그가 투투 주교를 만나 제안받았던 것은 용서를 통해 함께 미래를 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악행 자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악행을 진실하게 고백하며 참회하는 경우에만 기소 절차를 없애고 용서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악을 행한 자가 악행을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는 용서는 값싼 용서거나 거짓 용서라는 것을 알았다. 이런 거짓 용서는 피해자의 고통을 치유할 수 없다. 따라서 참된 희망과 미래를 열지 못하는 무능한 용서가 된다.

나는 인간에 대한 혐오를 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혐오하는 악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다. 우리 내부와 외부에서 일어나는 악에 대한 혐오는, 특히 인간을 여러 이유로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을 혐오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한 축이다. 그것은 우리의 미래를 정의로운 평화로 이끌어가는 힘으로 작용한다. 정의로운 평화가 없는 용서는 그저 무의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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