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난'을 이야기하는 이유
내가 '가난'을 이야기하는 이유
  • 최태선목사
  • 승인 2019.07.31 00:0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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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난에 관한 글을 쓰면, 보고 배우고 받아들이려는 태도보다는 모순을 지적하거나 불가능을 내세워 내 글의 부당함을 부각시키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도 이런 분들은 그야말로 양반이다.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어야만 신앙 좋은 사람이라는 개신교 신화에 함몰된 사람들은 불같은 분노를 표출하면서 그런 글을 쓰는 나를 아주 잔인하게 짓밟고 빈정거린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올바른 길을 가는 당신의 주변에 왜 사람들이 없느냐는 지적으로 내 글의 부당함을 점잖게 증명하려 든다. 가난에 관한 내 글을 이해하거나 동의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거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 기독교 불행의 근본적인 이유라고 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가 불행해진 근본적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며 교회가 부자가 되는 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졌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돈을 숭상하고 힘과 권력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에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가 열리고 임하겠는가. 그런 곳에서 세습과 거짓과 성범죄와 헌금 유용이 횡행하는 것은 얼마나 당연한가.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가난을 그토록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가난이 비참하고 참람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 서울대를 수석 졸업한 사람이 인터뷰에서 “가난은 불편하지만 부끄럽지는 않다”고 말했다. 어떤 생각이 드는가. 그때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존경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가난은 불편하거나 부끄러움의 대상 정도가 아니라 천형(天刑)이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되었다.

청년들을 보라. 그들에게 유산이나 로또 당첨금이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돈을 모아도 서울에 아파트 한 채 살 수 없다. 그리고 집이 없어도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 역시 없다. 따라서 오늘날 누군가 가난은 단지 불편할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연인이거나 은둔 수도자일 것이다. 가난이 부끄럽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합리화의 달인이거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정신신경증 환자일 것이다.

그러면 가난을 말하는 나 역시 마찬가지인가. 맞다. 겉모습은 똑같다. 그러나 내가 가난을 말하는 이유는 단순하고 분명하다. 복음이 그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따르는 그리스도께서 가난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이 기꺼이 가난해질 때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통치하에 이루어지는 샬롬을 날마다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가장 본질적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다.

물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 그 가장 대표적인 본보기이다. 그러나 오늘날 판토크라토르의 예수님이 되신 그리스도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본보기가 아니라 경배해야 할 믿음의 대상이 되셨다. 그래서 나는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하나씩 예를 들어보겠다.

먼저 사르밧 과부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얼마나 가난하면 마지막으로 가진 가루와 기름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은 후 죽으려는 생각을 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는 그런 과부에게 먼저 자신에게 작은 떡을 만들어 오라는 잔인한(?) 요구를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이다.

이것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 이야기이다.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다. 여기서 주목하라. 가난은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였다.

다음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과부의 헌금이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고 계셨다. 그런데 그때 한 과부가 와서 연보궤에 돈을 넣었다. 두 렙돈이었다. 렙돈은 가장 작은 돈의 단위다. 그러니까 과부는 오늘날 길에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지 않는 십 원짜리 동전 두 개를 연보로 드린 것이다.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나치지만 그것은 매우 불경한 일이었다. 성전에서 드리는 헌금은 환전상에게서 바꾼 거룩한 돈인 은화여야 했다. 세속에서 사용하는 동전을 연보궤에 넣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처사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과부를 보시고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는 경제 개념이라고는 전혀 없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때 감격하셨다. 그 과부가 가진 모든 것을 비우고 하나님의 품 안으로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것을 보셨기 때문이다. 그 과부는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샬롬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감격하신 이유이고,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의 진짜 의미이다.

엘륄은 <하나님이냐 돈이냐>에서 성서가 말하는 가난의 정의를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아무 희망이 없는 상태’라고 하였다. 우리가 예로 본 두 과부에서 우리는 그 가난을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성서가 말하는 가난의 정의는 단순한 물질 개념이 아니라 모든 것을 망라한 총체적인 개념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 역시 바로 성서가 말하는 가난이다.

믿음이란 두 과부에게서 보았듯이 예수님에게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 가난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을 실천하는 순간 하나님의 통치와 샬롬이 우리에게 임한다. 나는 그 가난을 선택했다. 내가 가난에 관한 글을 쓰는 이유는 같이 죽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샬롬을 함께 맛보고 누리자는 것이다. 그 불가능한 선택을 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한 가지를 부연하자면, 그 선택이 바로 구원이며 부활이라는 것을 꼭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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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 2019-07-31 06:44:33
언제나 주님 명령하신 자기부인을 깨우쳐주시니 말씀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