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 교수 강연을 들으려면 인문적 소양부터 갖추라
이정훈 교수 강연을 들으려면 인문적 소양부터 갖추라
  • 전영수 목사
  • 승인 2019.08.16 12:1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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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교회의 강단, 인문적 소양에 초점을 맞춘 내용입니다.

‘인문’(人文, humanities)이 지니는 힘은 아주 대단합니다. 인문적 소양이 무엇인가.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는 필수적인 영양소와 같습니다. 인문이 우리의 삶의 목적은 될 수 없고, 더불어 살아가는 동반자와 같은 도움이 되는 자양분입니다. 그런데 인문성 자체를 인본주의적인 가치관 정도로 간과해버리는 측면이 있는데, 본 글에서는 그런 의미가 아님을 미리 밝힙니다.

인간다움이란 뜻인 라틴어 휴마니타스(humanitas)를 ‘인문’으로 번역해오고 있습니다만, 그 후 인간의 문화와 문명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중국 은나라 이후, 그리고 공자 이후 ‘인문’이라는 인간 이해 양식이 생겼는데, 동양의 뜻이 더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언급하는 ‘인문’은 ‘사람(人)에 대한 진지한 이해와 관계, 그리고 문(文) 즉 인간 역사와 합리성의 이해에 대한 가치’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회중석과 강단 사이의 설교나 강연을 들을 때에 인문적 소양은 과연 필요한가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난전처럼 천박해져버린 우리 한국 교회의 도덕적 윤리적 몸뚱아리는 결국 영성의 핍절에서 온 자연스런 부산물 덩어리임을 우리 모두는 너무나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돈, 명예에 대한 욕심은 기도를 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성경 지식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결국 기독교적 인문적 소양을 우습게 여기고 짓밟아온 한국 교회의 이원론적 죄악에 있습니다. 새벽기도를 귀하게 여기는 성도가 돈의 늪에 빠져 있다면, 이것은 기도 문제로 분석도 안 되고, 성경으로도 조언이 불가합니다. 이것은 그의 인문적 소양이 이미 천박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문적 소양’의 중요함과 고귀함을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τὰ αἰσθητήρια)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히 5:14)

믿음의 사람은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지각’ 곧 ‘상식’(합리적 근거, common senses)에 따라서 말하고 행동하고 판단합니다. 성령의 이끄심은 인격으로 드러나는 법이고, 그 인격은 삶의 상식에 두 발을 디디고 서기 때문입니다(갈 5:22~23). 이 ‘지각’을 영적인 깨달음으로 생각하기에 앞서서, 다른 말로, ‘인문적 소양’과 다름 아닙니다. 영적인 깨달음은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야 하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교회 내에서 인문적 소양에 대한 강조나 언급이 희박한 이유는 이원론적 사고가 아직도 팽배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한 멸망의 예비처라는 이원론적 식견은 죄와 구원이라는 이원성을 논하기 이전에 우리로부터 제거되어야 하는 이원론적 사고입니다.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요1서 4:5)

인문적 지식이나 소양은 세상에 속한 말이 아니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필히 갖추어야 하는 ‘지각’(τὰ αἰσθητήρια, 히 5:14)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인문의 특성이 담겨 있음을 감지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인격성을 띱니다.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인문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인문적 소양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그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마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막 6:34)

하나님의 부성적 계획,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과 구원, 성령의 인격적 이끄심과 역사하심은 신학적인 예찬을 차치하고라도 그 풍성한 인문적 함의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성경의 진술을 통해서도 너무나 잘 인지할 수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은혜에 제대로 잠긴 성도라면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구속적 의도와 동시에 사람들의 삶과 역사를 함께 지나시면서 변함없는 섭리와 논리적 여상함으로 보듬으시는 인문적 풍성하심을 알게 모르게 인지하고 체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지도자가 메시지를 전한다고 하더라도 비성경적인 진술이나 실천적 적용에 맞지 않을 시에는 스스로 걸러내는 자증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교리적 지식이나 믿음을 따지기에 앞서,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인문적 소양이 그 바탕으로 활성화하기 때문입니다. 인문사철(人·文·史·哲)이 그 소양의 구성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존중과 이해 그리고 말과 행동’입니다. 건강하고 성경적인 믿음은 이러한 객관적 인문적 소양 위에서 겨자나무처럼 풍성하게 자랍니다.

복음 선포는 강단에서 활성화되는 사건입니다. 이정훈 교수의 강연에 대해 본인이 염려하고, 그가 강단이 아닌 다른 곳에서 강연하기를 바라는 것도 본 주제와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의 강연은 인문적 소양의 시각에서 듣고 생각하면, 팩트 여부의 논지를 떠나서 그의 주장이나 논지는 어떤 주제든지 묘하게 비틀어져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에 대한 신뢰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인문적 소양의 시각에서 그러함을 느낍니다.

그의 말은 하나의 각인각설이 아니기에 그를 신뢰하고 따르는 자들은 하나의 새로운 지식이나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성도들 각자가 행 17:11의 과정을 거쳤다면 아주 건강하게 반응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현실을 보면서 걱정이 앞섭니다. 이정훈 교수의 주장은 흡수력이나 흡착력이 아주 강해서, 혹이라도 후에 사실 파악을 통한 오류가 드러나게 되면 탈이 클 것입니다. 이로 인한 어지러운 소용돌이는 회중석에 앉아 있는 회중들의 삶에서 일어나게 될 결과들이기에 매우 염려됩니다. 이정훈 교수의 강연은 강단이 아닌 포럼장에서 이뤄졌으면 합니다.

회중석 측의 문제나 책임 또한 적지 않습니다. 성도들 스스로 걸러내고 소화해내야 하지만 그런 생각이나 의지가 없어 보입니다. 이정훈 교수의 인지도가 높아져가는 것에 비례해서 그가 강조했던 내용들이 최근 여러 사람들을 통해 물감이 번지듯 퍼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강단과 회중석에서의 성숙한 소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이 심히 크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의 강단들은, 회중들이 스스로 인문적 소양을 구비하고 강화하도록 돕는 일에 아예 손을 놓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예를 들라고 한다면, ‘아멘’ 화답의 현실입니다.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아멘’이라는 화답을 하느라 선포되는 말씀을 제대로 듣고 내재화시킬 여력이 없습니다. 반면, ‘아멘’ 화답하는 순간, 진술된 메시지가 자신의 신앙 소양이나 실력으로 내재화되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오해가 심각합니다. 회중석에 앉은 신자들이 아멘이라는 화답을 함으로써 설교자가 설교를 잘하도록 섬기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입니다.

데살로니가 지역의 성도들은 지도자의 말씀을 들었을 때 설령 그가 주의 사도라고 할지라도 저녁에 가정으로 돌아가서 그날 들었던 말씀을 서로 나누면서 과연 진실한 말씀인가를 세세하게 가려볼 정도로 성숙했습니다. 파피루스나 양피지로 된 성경이 그들의 상 위에 펼쳐져 있지 않았던 시대였지만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간절함의 영성’으로 옳고 그름까지 분간해낼 정도로 성숙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부흥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멘 화답의 문화로 인해 성도들은 생각하는 힘, 내력, 훈련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상실한 것은 없습니다. 애당초 갖춘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문적 소양이 없는 가운데, 그 소양으로 가득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기에는 시작부터가 언감생심이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나마 소양을 갖춘 사람은 스스로 그 필요를 찾아내는 고생을 감내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느새 우리 한국 교회는 아름답고 소중했던 신앙의 이런 자산을 스스로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염려가 됩니다. 어느 정도로 강단이 허물어지고 있는가 하면, 설교를 하던 목사님이 아멘으로 화답하지 않는 성도들에게 은근한 질책을 해댈 정도입니다. 성도들이 ‘아멘!’ 소리를 내야 자신의 설교가 제대로 들리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멘 추임새가 있어야 설교하는데 힘이 난다는 것이므로 복음 선포의 세계관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어떤 분은 강단에서 ‘성도 여러분, 왜 아멘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힐난합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 심비에 새기는 시간이 설교 시간임에도, 진지함과 경외함의 공간은 어느새 사라져버렸고 회중들이 졸지 않게 하기 위해 우스운 이야기나 임기응변적 위트로 그 자리를 메우려고 몸부림치는 설교자들의 형국이 아주 일상의 모습이 된 것은 아닌가요. 자신이 스스로 은혜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경외함을 누리지 못한 설익은 말씀이라면, 한 주간 생업과 공부에 함몰된 삶을 살다 모인 신자들의 심령 밭을 어떻게 다시 일구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4부, 5부로 드려지는 예배도 중요하지만, 잃은 것을 되찾는 것도 중요합니다.

4복음서 어디를 보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전하실 때에 청중들이 아멘으로 화답하기를 요구하신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당시에는 그런 화답의 반응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이 입을 다문 채 우리에게 던지시는 화두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신 6:4, 6)

이 명령은 우리의 복음이 “들으라”의 복음임을 알게 합니다. 강단은 소중한 자리입니다. 자신의 정치적 야심이나 가치관으로 또 하나의 괴상한 신앙관을 정립시키는 자리가 아닙니다. 사람들을 살리려면 말씀의 바다에 푹 빠진 채 함몰되게 해야 함이 옳습니다(창 49:2, 민 16:8, 신 6:4, 신 20:3, 신 27:9, 수 3:9, 삼상 8:7, 대하 13:4, 대하 29:5 등).

시대를 초월해서 설교 시간은 회중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강단과 회중석 간에 주거니 받거니 화기애애하게, 서로 만들어가는 시간이 아닙니다. 한국과 미국의 현대화된 교회들이 왜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까? 그것은 강단이 연극 무대로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생각이 담긴 메시지를 듣고 회중들은 박수와 웃음과 아멘으로 반응하면서 하나의 공감대가 만들어지는 시간에 어떤 영적 변화와 각성이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했지 서로 나누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는 이런 소중하고도 위중한 소통 원리를 자꾸만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아, 들으라!”의 대명제를 결코 내던져서는 안 됩니다.

강단에 선 설교자는 기도와 말씀에 전무했던 준비, 곧 하나님의 말씀을 죄인들에게 일방적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이 시간을 통해 근심 중에 누워 있던 자들이 일어나고, 자기 욕심으로 츱츱하게 살았던 자들이 회개의 심령으로 깨어나고, 부모와 자녀, 시모 사이의 미움과 이기심이 녹아내리는 회개와 변화로 이끌게 됩니다. 세상을 향한 마음을 다시 일깨우고 다잡아서 세상의 빛과 소금답게 주인공으로 일으켜 세우는 시간이 강단의 시간입니다. 그런 말씀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여기저기서 외치는 ‘아멘!’이 진정한 아멘이요, 그 말씀을 그의 심령에 내재화되고 활성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강단과 회중석 사이에서 하나의 긴장의 끈이 되고만 ‘아멘’ 문제를 제가 언급한 이유는 인문적 소양의 부재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귀에 들리는 복음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고 싶은 사모함의 열망이 식어가고, 선포된 그 말씀에 대해 더 알고자 하는 영적 배고픔도 없는, 육체적 부자인 신자들은 결코 인문적 소양의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합니다. 회중석에 오늘도 자신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음에 스스로 대견스러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정훈 교수의 강연을 들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인문적 소양이 필요합니다.

그로부터 “진보 진영 즉 정권을 잡은 저 사람들이 혐오 표현을 규제하는데, 쟤네들은 신나치주의자들입니다”라고 들었을 때, 성도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그 전이나 지금이나 나치주의자가 드러냈던 반인륜적 말이나, 행동이나, 이념을 말하거나 드러냈던 사건이 있었는가’를 생각하는 사고의 소양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집에서 곧장 살펴보고 공부해야 합니다.

이정훈 교수가 소수자를 말하면서 ‘동성애 소수자’를 언급하면, 성도들은 ‘문재인 정부가 말하는 소수자는 동성애 소수자만 지칭하는지, 장애인도 포함되는지, 남녀 성차별도 포함되는지 살펴봐야 한다’라는 생각을 해야 하고 또 알아봐야 합니다.

누군가가 강단에서, ‘세상법보다 더 우월한 법이 하나님의 법인데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법만 따라서 나아갈 것입니다’라고 말하면, ‘하나님의 명령에 충돌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여러 법이나 도덕은 꼭 지켜야 해’라는 생각을 스스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를 들어 교회에서 재정적 사고가 났을 때 예레미야처럼 하나님 말씀 편에 서지 않고, 아사랴와 요하난처럼 사람 편에 서는 것이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나중에는 소리치는 세상을 사탄이라고 정죄하는 그릇된 자리에 함께 서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모습들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성도들에게 인문적 소양이 얼마나 대단한 힘인지 보여줍니다. 상식과 도덕마저도 지키지 못하는 상태로 추락해버렸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동성애로 인해 교회가 파괴되어 사라질 것이고, 사회주의적 복지 정책으로 인해 나라 살림이 거덜 나고 맙니다”라는 말을 들었다면, ‘그런 일들이 지금 주변에서 일어나거나 조짐이라도 있는가? 증거를 내게 보여 달라’고 자문해야 합니다.

인문적 소양은 거대한 힘입니다. 이 소양은 자신과 배우자 그리고 자녀들까지 지키는 보호막을 치게 할 것입니다. 옳은 것은 받아들이고, 확정되지 않은 것은 미리 골라내고, 그 진위를 밝혀내고, 부지런하게 데살로니가 지역의 성도들 같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동성애가 확산되면 우리 대한민국이 무너지고, 교회가 무너집니다. 그러니 이런 강연을 통해 제대로 알고,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들을 때에, 여러분은 ‘의인이 없어서 나라가 망하지 동성애 때문에 망한 나라는 없지 않은가. 동성애를 반대하지만 그들까지 끌어안는 복음으로 사랑해야 해. 그러면 그들도 변할 수 있어’라는 적용에까지 넓혀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좌파가 득세하면 나라가 사회주의 나라가 되어 망하고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로 뭉치면 복음적인 나라가 된다”고 듣게 되면, ‘주변의 진보 성향의 사람들이나 우리나 별다른 게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좌와 우가 없고, 보수와 진보가 하나이고, 원수까지 사랑하고, 형제를 위해서 죽을 만큼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지켜 주신다’라는 소양으로 재해석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문적 소양입니다. 이 소양은 건강한 성경관에서 비롯됩니다.

현재 이정훈 교수가 중심으로 해서 이끌어나가는 연구소 활동, 여러 세미나 등 강연 활동에 대해 우려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우려들은 이정훈 교수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바로 잡아주는 등대의 불빛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불빛을 자신의 시야를 흐트러뜨리는 못된 불빛으로 여기기보다는, 잠시 멈춰 서서 그 불빛이 향하는 방향을 쳐다보는 것이 이정훈 교수에게 분명 좋을 것입니다.

이정훈 교수의 강연들은 하나의 범주가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열거한다면 이렇습니다.

  • 조선, 대한민국에 대한 심각한 열등적인 민족 역사관
  • 복음적 가치를 내세우면서 민족적 뿌리를 무시해버리는 가학적 역사관
  • 상대적으로 일본과 미국의 것에 대한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사대성
  • 사상과 정치에 대해, 교회안과 교회 밖으로 엄격하게 구분해버리는 이원론적 세계관
  • 너무나 단순하고도 선명하게 그어버리는 피(彼)와 아(我)의 구분
  • 적으로 규정한 자들을 변화시킬 섬김의 대상이 아닌 제거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부분적 인간 이해

그가 객관적인 인문적 소양에 있어서 한 부분으로만 점철되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강연에서 그림자가 드리워진 인생 가치관을 보게 됩니다.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사상과 사건의 전개를 들었을 때에 맹목적인 수용은 건강한 성도답지 못합니다. 그가 넓은 범위의 주제를 다루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세세한 설명이나 진술이 결여된 특징이 있기도 하기에 청자들은 인문적 소양으로 극복해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모범으로 주신 ‘주 기도문’의 문맥을 세세하게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문맥마다 기승전결이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비약(leaping)이나 과장(hyperbole), 건너뛰기(skipping)를 찾을 수가 없음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인문성, 즉, 얼마나 죄인들을 사랑하시는지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이정훈 교수의 강연을 듣는 성도들은 필히 먼저 인문적 소양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경과 양서를 독서하고, 무릎으로 기도하고, 배운 대로 식구들과 직장 동료들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실천으로 낮아지십시오. 객관적으로 세상사를 바라보십시오. 그런 성도들이라면 이정훈 교수의 강연을 들으면서, 우리 조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실제적인 문제를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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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수씨? 2019-08-19 09:30:27
전영수씨 그만좀 하셨으면 좋겠는데..
당신이 하는 말들은 일반 사람들이 봤을때 아무런 합리적인 근거도 없고 설득력도 없어요.
온통 자기생각에서 나오는 참으로 무식하고 비논리적인 말들만 가득해요.
그리고 이정훈 교수를 개인적으로 비난할 생각 없다면서 페북글이나 영상들에서는 의도적인 비하가 너무나 넘치고,
본인은 동성애를 반대하고 정통교리를 중시한다면서 동성애 등을 옹호하며 교회를 오히려 공격한다는 합리적인 의심과 비판을 받는 언론사와 인터뷰를 하는 이중성은 쩔고...
게다가 본인은 자한당, 일본 등에 대해 극도의 분노와 반감을 가지고 계시고,
현 정부에 대해 극도의 친밀함을 표하시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는 개인적인 정치색이 너무 강하시더군요.
당신의 정체가 정말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