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마지막 권리, '죽음'
인간의 마지막 권리, '죽음'
  • 박충구 교수
  • 승인 2019.08.20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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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죽음이라는 주제는 피할 수 없는 문제다. 태어난 인간은 죽음으로 생애를 마친다. 저자는 현대 세계에서 인간의 죽음은 과거의 죽음과는 매우 다른 색다른 죽음이라고 주장한다. 즉 낯선 죽음의 시대를 맞았다고 보는 것이다. 이 새로운 죽음 이해는 우리에게 인간의 마지막 권리, 인간다움을 지키며 고통 없이 죽을 권리에 대한 숙고를 요구하고 있다.

현대인의 죽음에 관하여 새로운 이해를 제시한 박충구 교수의 신작 [인간의 마지막 권리]에 대하여 한 달 전 서면으로 인터뷰를 요청했다. 책이 출간된 오늘 저자는 서면 인터뷰 요청에 답을 보냈다. 인터뷰 전문을 담는다.

이번 신간 [인간의 마지막 권리], 부제로는 '죽음을 이해하고 준비하기 위한 13가지 물음'을 내셨는데요. 책 내용에 대하여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 이 책에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가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대부분 과거의 것이어서 오늘날 그 적절성을 상당 부분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었어요. 과거의 사람에 비해 수명이 거의 배나 연장된 우리 현대인은 대부분 노화의 과정을 거치며 오래오래 죽어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수명이 비교적 짧았던 시대에 형성된 죽음 이해에는 죽음의 과정을 오래 동안 겪게 된 현대인의 고통에 대하여 세심하고도 사려 깊은 숙고를 담을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과거의 죽음 이해만을 가진 사람은 본의 아니게 죽어가는 이의 마지막 권리, 곧 편안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의식 혹은 무의식적으로 부정하게 됩니다.

이런 정황에서 우리는 하나의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고 무의미한 고통을 거부하면서 우리는 왜 죽어가는 이에게 무의미한 고통을 끝까지 견디라고 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이 책에서 과연 이 시대에 있어서 인간다운 죽음이란 무엇인지에 대하여 살펴본 것입니다. 언젠가 맞아야 할 우리 각자의 죽음,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준비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2. '죽음'이란 제목이 좀 어두운 면이 있습니다. 이 글 외에도 최근 월간 [기독교사상]에 '박충구의 죽음의 윤리 이야기'를 12회에 걸쳐 연재하셨는데요. 이 무거운 주제에 대하여 글을 쓰게 된 동기가 있으신지요?

-> 죽음이라는 주제는 위기 상담학이나 성도들의 죽음을 직면하게 되는 성직자 훈련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다루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기독교 생명윤리학에서도 다루는 주제입니다. 신학대학원에서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저는 사람들이 터부시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기독교는 죽음을 마치 '죄의 삯', 혹은 '원수'처럼 싸워 이겨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수명을 연장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을 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에 대해서는 매우 부당하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하여 저는 '의사 조력 자살'(Physician assisted suicide) 문제를 스위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연구하여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스위스는 조력사를 용인하는 나라고, 독일은 아직 입법화를 위한 논쟁 중에 있는 나라였기 때문이지요.

이 논문을 마치면서 이 주제는 스위스나 독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한국인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하여 논문 한 편으로는 충분치 않아 더 구체적으로 현대 한국인의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책을 구상하고 쓰게 된 것입니다.

3. 죽음이라는 주제를 통해 현대인, 특히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꼭 전달하고 싶으신 내용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 한국인 약 83%가 65세 이후에 자신의 죽음을 맞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현대 한국인은 남성은 70세 이후에, 여성은 80세 이후에 죽음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80대를 넘어 100세 넘게 사시는 분도 많습니다. 그런데 통계에 의하면 고령 노인 중 약 47%, 거의 절반에 이르는 분들이 암, 혈관질환, 뇌질환 이라는 3대 중증 질환을 겪고 있습니다. 특히 암에 걸려 고통을 겪다가 죽음에 이르는 이들이 약 27%나 됩니다. 앞으로 이 통계는 더 늘어날 것입니다. 이런 질환의 특징은 오랜 병고와 고통의 시간을 거쳐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가져온다는 점입니다.

이 죽음의 과정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라고 가르치는 것이 과거의 죽음의 윤리가 주는 규범입니다. 그러나 이 규범은 오늘날 여러 사회에서 그 타당성을 잃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고 책임 있게 관리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주어지는 죽음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게 관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과거의 죽음 이해는 이 부분에 대하여 침묵해 왔습니다. 이젠 이 문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을 나누고 어떤 죽음이 하나님 앞에서 좋은 죽음인지 나름 판단을 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즉 “나는 어떻게 죽어갈 것인가”에 대하여 충분히 생각하고 준비해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책에서 '낯선 죽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는데 무슨 의미인지요? 죽음이 낯설어졌다는 의미입니까?

-> 네. 과거의 죽음은 익숙한 삶의 자리에서의 죽음이었고,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죽는 죽음이었어요. 죽어가는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지요. 환갑까지 생존하는 것이 어려워 환갑만 넘겨도 축하 잔치를 벌이는 그런 시대였지요. 죽음이란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었어요. 집안 식구들이 죽어가는 이의 죽음을 나름대로 각자 경험하면서 죽음이란 저런 것이로구나 하는 “익숙한 죽음” 이해가 있었어요.

그러나 현대인은 우리 조상들이 죽어가던 죽음에 비하여 매우 다른 죽음을 겪습니다. 죽어가는 이는 즉시 가족과 분리되어 낯선 병원으로 실려 갑니다. 낯선 의료진에 둘러싸여 죽음과 사투를 하지요.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고령 노인이 되어 죽어갑니다. 죽어가는 이가 자신의 죽음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의료진이 죽음의 길을 가로막고 지연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죽음을 일러 “의료화된 죽음”(medicalized death)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죽음은 과거의 사람들이 죽어가던 방식에 비하면 매우 낯선 죽음입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런 낯선 죽음을 겪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지요.

5. '합리적 자살'이라는 용어도 눈에 띄더군요. 무슨 의미입니까?

-> 인류 역사는 자살에 대하여 다양한 관점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살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시점은 19세기 말 이후입니다. 사회학적으로 자살의 의미를 분석한 에밀 드뤼켐의 자살론에서 시작하여 쟝 아메리에 이르기까지 자살 이해의 변천사는 인간의 존엄성과 주체성을 관리한 주체의 변이를 보여줍니다.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국가나 권력은 개인의 자살을 사회적 손실로 보았고, 종교는 신앙의 원칙을 파괴한 무서운 죄로 간주하여 영혼 파멸을 선고했지요. 정신의학에서는 자살을 자기 증오에 따른 자기 파괴 질환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아메리(Jean Amery)는 자살을 자기 살해로 보는 차원만 아니라, 삶의 무의미와 고통에서 자유를 얻는 인간다움을 지키려는 '자유죽음'(Freitot)이라는 차원도 있다고 보았어요.

결국 자살을 바라보는 주체의 시각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합리적 자살은 이성적으로 이해 가능한 자살, 곧 생존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죽음을 기다리는 말기 환자가 극심한 정신적 및 신체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자신의 죽음을 자의에 따라 앞당기려 할 때, 그의 요구를 인간의 마지막 권리로 이해하고 사회가 이를 법적으로 승인하고 도와주는 자살을 의미합니다. 이런 형태의 자살에 대하여 네델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위스, 그리고 미국의 여러 개 주에서 이미 합법화하고 시행하고 있습니다.

6. 다종교, 다문화 사회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한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죽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 저는 기독교적 죽음 이해 역시 많은 부분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죄의 삯이라고 보는 관점은 태어나면서 노화되어 죽어갈 인간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적합하지 않습니다. 또한 부활절 신앙도 마치 죽음을 적이나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는 논리 위에서 형성된 것인데, 이 또한 인간의 죽음을 많은 부분 왜곡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듯이, 이미 생명 속에 담겨 있는 죽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보아야 하겠지요. 부정적인 죽음 이해가 아니라 죽음을 보다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새로운 죽음의 윤리에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기독교인이나 다른 종교인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가지는 요소는 다 같이 인간이므로 인간다운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7. 책 제목을 '인간의 마지막 권리'라고 정하신 각별한 뜻이 있습니까? 왜 인간의 마지막 권리입니까?

-> 인간의 권리에 대한 이해는 사실 근대적인 것입니다. 권력으로부터의 자유와 소유에 대한 배타적 권리에서 시작한 권리 개념은 20세기에 들어서서 비로소 보편적인 인권 개념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보편적으로 인권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인간 사이에 자율적인 윤리적 가치, 즉 자유, 정의, 유대, 평화와 같은 기초 가치를 피차 존중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는 비교적 이러한 기초 가치가 면밀하게 존중되고 지켜지지만, 환자가 죽어가는 자리에서는 그 죽어가는 이의 권리가 무시되고 과거의 가치 체계가 강요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사회 구조와 인간의 삶의 질이 심원하게 바뀌었는데 죽어가는 방식은 과거와 동일하게 답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죽어가는 이의 마지막 권리, 곧 고통 없이 죽을 권리가 쉽게 부정됩니다. 아무리 고통이 크더라도 그 기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죽을 때까지 수동적으로 견디라고 강요하는 것이지요. 매우 비인도적이고도 잔인한 윤리입니다.

제 생각에는 인간다운 존엄성을 지키며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인간의 마지막 권리를 부정하는 죽음의 윤리는 그 시효가 다 되었다고 봅니다. 이제는 인간의 마지막 권리, 곧 인간다움을 지키며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지켜줄 수 있는 새로운 죽음의 윤리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런 뜻에서 '죽음의 윤리의 갱신'을 요구하는 이 책의 제목을 '인간의 마지막 권리'라고 정하게 된 것입니다.

8.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이 책을 처음 쓰려고 했던 5년 전에는 “인간의 마지막 권리”에 대한 세계적인 논의는 그저 몇 나라에서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국가적으로는 캐나다와 호주의 빅토리아 주에서 합법화했고, 미국에서는 오리건, 워싱턴, 버몬트, 몬태나 주에서만 법적으로 허락되고 있었어요. 하지만 2019년 8월 현재 새롭게 입법화한 5개주(캘리포니아, 콜로라도, 하와이, 뉴저지, 메인)를 더하여 총 9개 주와 워싱턴 디시가 조력사를 합법화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수명이 연장되어 고령화되어가는 사회에서는 과거의 죽음 윤리가 그 적절성을 상실하여 갱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에서 사회적 합의가 일어나고 있다는 뚜렷한 증거입니다. 출생의 과정에서 조산원(助産員)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죽어갈 때에도 조사원(助死員)이 필요하다고 했던 몽테뉴의 주장이 이젠 사회적 합의를 거쳐 합법화되는 셈입니다.

저는 이 책을 쓰면서 우리가 죽음을 잘 이해하면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죽는다는 것은 '인간다운 일'이니까요. 따라서 우리보다 앞서서 죽어가는 이에게 마지막까지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 사회의 책무요 과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도 그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변화된 세계에서 종교의 보수성은 간혹 종교 스스로의 진실성을 의심받게 합니다. 이제는 종교를 위한 종교가 아니라, 인간을 위한 종교가 되기 위하여 더욱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안식일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보셨던 예수의 시선을 따라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는 인간을 지켜주는 역할을 잘 해야 합니다. 예언적 사유를 한다고 자랑하는 특성을 가진 종교도 이 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는 과거의 규범과 유산에 매여 늘 머뭇거립니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지키는 데 존재 의미를 두고 있는 법은 과거의 규범이 그 타당성을 상실했다면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 인간의 권리를 지켜주곤 했지요. 이런 변화가 세계 도처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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