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예배는 더 이상 없다
‘그런’ 예배는 더 이상 없다
  • 이민규 교수(한국성서대학교)
  • 승인 2019.08.27 0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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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규 교수(한국성서대학교)
이민규 교수(한국성서대학교)

예배란 무엇일까요? 구약에서 예배로 번역한 히스타바는 “스스로 허리를 굽힌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바닥에 엎드리고, 발이나 옷자락, 바닥에 입을 맞추는 고대 근동의 관습에 근거합니다. 신약은 이를 “프로스퀴네인”이라고 번역합니다. 이는 “몸을 숙여 경배하다”라는 뜻입니다. 예배(禮拜)란 한자어는 우리말로 “예를 갖추어 절한다”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예배로 번역한 또 다른 히브리어 용어는 “아바드”인데, 이는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신약은 이를 '라트류에인'으로 번역합니다. 즉, 예배는 문자적으로 경배와 섬김이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예배하는 장소를 지정하여 주셨습니다. 그곳은 처음엔 성막이었고 훗날 성전이었습니다. 예배는 반드시 하나님이 정하신 제사장 직분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으로 진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어디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습니까?" 이에 예수님은 다음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23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24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 4:23-24)”

여기서 예배는 경배의 뜻인 ‘프로스퀴네인’의 번역입니다. 예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때가 온다고 했습니다(요 4:23). 영은 보혜사 성령이고 진리는 예수님입니다(요 14:6). 예수님은 이제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시대가 열렸다고 하십니다. 신약에서 성전은 바른 예배의 필수 요소가 아니라는 파격적인 선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죽음과 부활로 성전을 대치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반복적으로 드려야 하는 속죄 제물이 필요 없어졌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는 성전에서 제사장들에 의해 진행되고 속죄 제물을 바치는 방식의 예배 형식은 이제는 불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구약의 기대와 예언의 성취입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3)”

이스라엘이 제사장이 되면 이제 나머지 민족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기회가 생깁니다. 이사야는 마지막 때에 만민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성전으로 몰려들 시대가 열린다고 예언했습니다. “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 2:2-3)”

하나님의 백성이 제사장 나라가 되고 만민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엄청나게 큰 성전이 필요합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모든 곳에 성전을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종말의 성전 되심으로 영과 진리 안에 있으면 누구나 어디서나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당시 예수님이 성전이 아닌 곳에서 예배가 가능한 시대가 열렸다는 선포는 정말 놀라운 선언이었습니다. 신약의 예배는 장소나 제의에 국한될 수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가 성전이시고 그분은 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어디서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더 파격적인 것은 예배에 대한 이해 자체가 변했습니다. 로마서 12장에서 예배는 구약과 달리 새롭게 이해됩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예배의 내용이 바뀌었습니다. 로마서 12장에서 예배로 번역한 헬라어는 섬김의 뜻인 ‘라트레이안’입니다. 성전 예배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제물이란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제물은 어떤 것일까요? 로마서 12:1절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 “합당한 예배”라고 합니다(개역성경은 신령한 혹은 영적 예배라고 번역합니다. 하지만, 헬라어 ‘로기코스, 라트레이안’은 합당한, 혹은 합리적인 예배로 번역해야 맞습니다)

이제 신자들이 드려야 할 희생제물은 그들의 “몸”입니다. 물론 그들의 육체적인 살과 뼈가 아니라 전 인격적으로 그들의 모든 삶을 바치라는 뜻입니다. 원래 제물은 죽여서 드려야 하는데, 여기서는 살아있는 상태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즉, 삶이 제사 행위이고 예배입니다. 로마서 12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예배 본질임을 암시합니다.

즉, 합당한 예배란 복음을 진실로 깨닫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의미에 따라 살기 원하는 자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섬김으로 드리는 삶입니다. 어떻게 섬겨야 예배일까요? 먼저 그 마음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런 이들의 생활 방식은 더는 “이 시대”의 가치와 풍조와 행동을 따르지 않습니다(롬 12:2 ; 골 3:9-10 ; 엡 4:22-44). 이것이 합리적인 예배입니다.

신약은 예배라는 표현 대신, “세움”, 혹은 “덕을 세움”(edifìcation, 오이코도매)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합니다(고전 14:3-5, 12, 17, 26 ; 살전 5:11 ; 엡 4:11-16) 이 이미지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건물’인 교회를 세우고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묘사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건물인 성도가 바로 세워지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밭이며, 하나님의 건물입니다(새번역 고전 3:9)”

여러분은 지금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까? 여전히 구약의 예배라는 용어에 사로잡혀 주일 예배와 같은 특정한 시간에 제의와 장소에 따른 예배를 드리는 것에만 집중하고 계십니까? 물론 주일, 수요일, 금요일에 혹은 새벽에 “덕을 세움”(예배)은 중요합니다. 이는 또한 모임으로 이해됩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가 모이기에 힘썼다고 기록합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히브리서 저자도 우리에게 모이기에 힘쓰라고 명령합니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날이 가까워져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새번역 히 10:25)”

그러나 분명히 신약은 구약의 맥락이 아닐 때, 우리가 보통 “예배” 혹은 “공예배”라고 말하는 모임을 예배라고 표현하는 것을 회피했습니다. 예배가 단순히 성전에서 일정한 시간에 제사장에 의해 진행되는 집회와 같은 방식으로 정해진 교회 건물 안에서 일정한 시간에 성직자에 의해 진행되는 예식으로 오해되는 것을 피한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삶이 예배가 돼야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오히려 예배라는 용어를 피하고 오히려 그 대신 "세움“, ”덕을 세움"이란 용어를 선택한 것 같습니다. 신약의 맥락에서 예배라는 용어는 오로지 삶의 예배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신약에는 주일 예배, 수요 예배, 철야 예배와 같은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종종 사용하는 공적 예배, 삶의 예배와 같은 구분은 신약성경에는 무가치할 뿐더러 오히려 많은 오해를 만듭니다. 굳이 말한다면 삶이 공적 예배입니다. 삶이 진짜 예배입니다. 신약의 맥락에서 다른 예배란 없습니다. 신약에서 예배를 중시하라는 말은 삶이 온전히 경배와 섬김으로 바쳐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사후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원한 예배를 드릴 그것이라는 뜻은 절대로 현재 많은 기독교인이 오해하듯 제의적인 ”공예배“를 끊임없이 드려야 하거나 드리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본질보다 종교 제의와 형식, 건물이 강조되는 예배에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인 것에 집착이 심해지면 이는 성전과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먹는 열심입니다(요 12:17). 열심을 낼수록 문제는 커질 뿐입니다. 구약에서도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고 했습니다(삼상 15:22). 이는 형식보다 본질이 낫다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삼상 15:22 ; 마 12:7). 진정한 예배는 종교 형식이 아니라 그 예배가 추구하는 참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준행하는 삶이 곧 예배하는 삶입니다.

오늘날 막상 사회의 손가락질을 받을 정도로 부정부패가 넘쳐나면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위대한 예배를 드린다고 거대한 교회 건물을 세우며 돈과 권력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일부 목회자들을 예수님이 보신다면 뭐라 하시겠습니까? 교회의 가장 큰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자들 가운데 있습니다. 아무리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강조해도 늘 신앙의 본질을 오해하고 변질시키는 무지에 가득 찬 내부자들만큼 무서운 적은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들을 이용하는 탐욕스럽고 편견에 가득 찬 종교 지도자들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섬기는 행위를 합당한 예배라고 합니다. 공 예배, 주일 예배, 수요 예배, 금요 예배란 신학은 신약에는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일 모임, 수요 모임, 금요 모임이 맞습니다. 이제 예배란 용어가 이미 굳어져 바르게 사용하긴 어려우니, 그 뜻이라도 제대로 압시다. 주님을 찬양하고 말씀을 배우기 위해 모이기에 힘쓰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예배는 교회 모임 그 이상입니다. 참된 예배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종교적 행위 이상의 것입니다. 예배와 모임은 신약에서 다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배는 신약에서는 세움, 혹은 모임이라 표현했습니다. 신약의 예배는 우리의 모든 영역을 살아있는 제물로 드리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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