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과 하나님 나라
조국과 하나님 나라
  • 최태선 목사
  • 승인 2019.09.03 10:0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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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후보의 기자회견을 보았다. 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법무부 장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그에게서 절망도 함께 보았다. 그것은 그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정치, 더 정확히는 법에 대한 절망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세상에 대한 절망이기도 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헷갈릴 것이다. 정리하자면 조국은 법무부장관의 적임자이다. 그는 분명 도덕성과 합리성을 가진 좋은 지도자이다. 그런 사람이 장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장관이 되고 지도자가 되어도 세상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조국과 같은 좋은 지도자가 있어도 세상은 정의로워지지 않는다.

세상에는 늘 더 나은 세상, 다시 말해 정의로운 세상을 향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많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이론을 피력해왔다. 나름대로의 방안과 대안들을 해결책으로 제시해왔고 그 모든 것들은 인류의 고민이기도 하고 귀중한 유산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모든 방안과 대안들은 정의로운 사회 구축에 모두 실패했다. 또 어느 정도 이루어지더라도 곧 모순으로 드러나는 현상들에 의해 부정되거나 지속성을 상실했다.

정의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문제이다. 초기의 모든 그리스도인 지도자 혹은 지식인들 역시 이에 대해 고민하고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정의롭게 되고,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법을 그 해답으로 생각했다. 공정한 법이 있다면 완벽한 법이 있다면 정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다. 어제도 조국의 입에서 공정한 법집행이라는 말이 나왔다.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면 정의로운 사회가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런데 정말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면 정의로운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공정하게 집행되기만 하면 정의로운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을 정도로 법이 완벽한가.

이런 질문에 순진하게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류역사에 법에 의해 정의가 이루어진 사회가 있었던가. 정의는 곧잘 평화로 대변된다. 평화가 곧 정의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것은 합당한 생각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평화는 거의 대부분 힘을 기반으로 하는 평화, 곧 로마가 주장하던 ‘팍스(PAX)다. 그러나 팍스는 힘을 가진 자에게는 평화지만 상대적으로 힘을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는 불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미국이다. 미국은 언제나 정의와 평화를 내세우지만 결국 그것은 힘을 바탕으로 한 제국주의라는 국가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이 주장하는 것들은 자신들에게는 정의이고 평화이지만 상대방에게는 불의일 뿐이다. 그들은 걸핏하면 폭력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한다.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희생양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라크의 입장에서, 경제제재를 당하고 있는 이란과 북한과 같은 나라의 입장에서 미국은 악마일 뿐이다.

그것은 조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가 아무리 정의로운 사회를 주장한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정의로운 사회란 여전히 강자를 위한 사회일 뿐이다. 약자들에겐 그저 파이 한 조각으로 만족해야 하는 불평등의 안전이 제공될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의 무의식에는 세상은 그런 곳이라는 결론과 체념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다시 행각해보라. 조국이 그렇게 절대적인가. 찬성 측에도 반대 측에도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만 찬성하고 반대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저마다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바울의 천재성이 부각된다. 그는 법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모세의 법에 따르면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 예수는 저주 받은 것이고, 로마법은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인간이 만들어낸 최선의 두 가지 법이 메시아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정의와 완전히 대립되는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종교와 정치와 법,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종합된 세상의 체계 자체로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정의가 만들어질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는 과부, 고아, 나그네(난민), 노예와 같은 모든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적용되는 정의를 말한다.

법은 언제나 힘을 가진 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만 가변적이다. 국회를 보라. 국회의원에게 불리한 법이 법으로 상정되고 통과되는 경우가 있는가. 없다. 세상은 힘을 가진 자들이 법을 제정하고 법은 당연히 그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 조국과 같이 약자를 대변하겠다고 천명하는 사람 역시 약자들을 대변할 수 없다. 그가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에게 말했듯이 금수저인 그는 흙수저들의 심정을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것을 대변할 수 있는가. 그것을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순진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법은 결국 사망을 낳는다고 말한 바울의 말보다 실증적인 것은 없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세상과 다른 완전히 새로운 길을 상상하고 제시한다. 예수는 지금 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구원을 생각한 적이 없다. 예수의 구원은 내세의 영혼구원이 아니라 현재의 구원으로부터 시작하는 하나님의 정의의 실현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변되는, 법 가운데 가장 훌륭한 법을 부인했고, 공정한 분배를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분은 하나님의 거룩한 관용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정의를 말했다. 당신의 제자들이 당신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관용에 사로잡히면 관용이 주도하는 새로운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당신이 환영하고 받아들이고 용서한 것처럼 당신의 제자들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일러주고 또 일러주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적대적인 세상 한복판에 하나님 나라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이 모습은 단순히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구현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맞는다면 우리 역시 자본이 신이 된 신자유주의 한 복판에 하나님의 정의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 나라인 교회를 향해 가려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없는가. 오늘도 나는 가슴이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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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닝맨 2019-09-03 13:55:46
먹먹할 필요 있나요. 본인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아닌지가 중요하겠죠. 가고 있으시다면 다른 이들이 보고 뜻이 이루어지겠지요. 그렇게 못살고 계시다면 나는 왜 알면서 안되나는가에 대한 글을 부탁드려요..

정직 2019-09-09 21:09:34
맞습니다
조국이 법무부장관으로서 권력기관개혁을 잘할거같고 재산비례벌금제도 잘할거같아요.

한편, 오히려 금수저들이 하는 편법을 막아줄수도 있고 공정한 복지국가를 이룰수도 있어요
금수저가 흙수저를 무시하는데 흙수저를 챙길 샹가한게 장해서 응원하고있습니다

우리 인간중엔 그나마 믿음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