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하나님 나라
권력과 하나님 나라
  • 최태선 목사
  • 승인 2019.09.05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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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 상품 불매운동과 일본 안가기 운동의 대일본 강경분위기 속에서 몇몇 교수들의 친일발언이 심심찮게 보도되고 있다. 일본이 식민지 통치를 통해 한국인들을 유린한 모든 사실들은 결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얼마나 잔인했고 지독했는지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치가 떨린다.

그런데 어떻게 위안부가 끼가 있는 여자들이었다든지 돈을 벌기위해 자발적으로 징용에 지원했다든지 하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어제도 티브이에 오키나와의 한국 군부들, 다시 말해 징용으로 끌려갔던 경상도 청년들, 아니 소년들 이야기가 현지인의 증언과 함께 방영되지 않았는가. 그 프로를 시청하면서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자신들의 말도 안 되는 일본 이해를 그토록 떳떳하게 주장할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잔인한 것이다. 한 개인의 인생이 그토록 무참하게 산산조각이 났는데도 어떻게 그에 대한 조금의 긍휼함도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럴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해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이 ‘오만증후군’이다.

버클리대 심리학과 교수 켈트너 교수는 20년 간 연구를 통해 연구대상에게 권력을 줄 경우 그들이 마치 정신적 외상을 유발하는 뇌 부상을 당한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연구대상들은 더 충동적이 됐고, 위험에 대한 인지도가 떨어졌으며, 가장 중요하게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할 능력이 하락했다.

영국의 외무부 장관이었던 신경학자 오웬과 그의 공동저자 조나단 데이비슨은 2009년 브레인 학술지에 실린 논문에서 이 장애를 ‘오만 증후군’(Hubris syndrome)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증후군을 “권력자, 특히 굉장히 성공적으로 특정 기간 동안 큰 견제 없이 권력을 누린 지도자에게 생길 수 있는 장애”라 정의했다.

권력은 환자의 공감능력을 모두 죽이는 종양과 같으며 오만 증후군의 14가지 의학적 증상에는 남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 매우 떨어지는 현실성, 침착하지 않거나 무모한 행동, 무능함의 표출 등이 있다고 한다.

최근 이우연의 유엔 발언, 최장집의 발언 그리고 과거 박유하의 발언 등이 이해가 가지 않는가. 그들의 노골적인 경멸, 그리고 매우 떨어지는 현실성 등은 권력이 그들에게 가져다 준 장애이다.

사람들은 흔히 권력을 정치가들이나 재벌들에게나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권력은 그야말로 일상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 모두에게 주어지는 권리이며 힘이다. 권력은 마치 인간이 숨 쉬는 공기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든 영역에 예외 없이 분포한다. 인간은 모두가 숨을 쉬듯 권력을 휘두르며 살아간다. 노숙자 선생님들에게도 권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분들 역시 자리다툼을 하고 소유권을 주장한다. 권력의 범주 하에 있는 것이다.

권력 가운데 가장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가르치는 권력이다. 사람들은 이 권력을 권력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르치는 사람의 권력이야말로 가장 지독한 권력이다. 얼마 전 쇼트트랙 감독의 국가대표 여자선수의 성폭력을 생각해보라. 물론 감독의 다른 힘도 있긴 하지만 가르친다는 것의 권력이 얼마나 큰가를 생각할 수 있다. 목사들에게 성범죄가 자주 일어나는 것 역시 그들이 가르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확고한 권력이 주어진 것이다.

나는 인간의 소유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으로 돈과 함께 박사 학위를 꼽는다. 박사 학위를 받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박사가 되면 자신이 들인 노력보다 수십 배 강한 자의식이 생긴다. 이 자의식이 권력에 영양을 공급한다. 거의 무한정으로. 그래서 박사로서 가르치는 권리를 행사하는 교수들 대부분이 ‘오만증후군’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한 번 한 걸음 물러나 잘 생각해보라. 교수들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한가.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는 교수들의 넋두리는 그야말로 넋두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고양된 자의식은 올려다보아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본인들은 물론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권력의 정점에 박사들이, 교수들이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위에 언급한 세 사람은 모두 교수이거나 교수출신이며 박사들이다. 그들은 ‘오만증후군’이라는 질병에 감염된 환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만무방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교수들을 많이 아는 사람, 혹은 지성인으로만 인식하지 말라. 그들은 권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가련한 인간들일 수 있다. 개척교회 시절 겸손했던 목사들이 대형교회 목사가 되면 달라지듯이 권력은 모든 사람들을 잠식한다. 무조건 잠식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세상의 진면목 가운데 하나이다.

세상은 어떤 권력이든 권력을 가진 자가 지배하고 다스리는 곳이다. 그래서 세상은 희생양을 필요로 하고 희생양을 양산하는 ‘희생의 체제’가 될 수밖에 없다. 희생의 체제에는 희망이 없다. 저마다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타인을 지배하려는 곳에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그곳에는 힘의 균형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세상은 ‘제로 섬 게임’을 하는 정글이 될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 행복한 자는 권력을 가진 자이다.

그러나 그 반대를 주장하는 곳이 있다. 성서다. 팔복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 해설서이다. 복음과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 편만한 권력에서 독소를 제거하는 강력한 치료제이다. 가진 자는 소유를 나누어야 한다. 권력이 있는 자는 섬겨야 한다. 이 사실을 단순한 도덕으로 이해하지 말라. 여기에는 정확한 세상 이해와 세상을 치유하는 강력한 처방이 제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세상을 권력이 없는 세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는 기독교는 진리가 될 수 없다. 왜 복음을 깊이 이해한 사람들이 평화주의자가 되고 아나키스트들이 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권력을 섬김으로 무력화시키는 의인들이다.

오늘도 명성교회의 특별새벽기도회는 특수를 누릴 것이다. 그 ‘특새’는 가르치는 권력을 극대화하는 강력한 도구로 작용한다. 김삼환이 축복하면 세상을 이기는가. 아니다. 김삼환의 축복을 받은 어린아이들은 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부인하는 역적들이 된다. 기독교 신앙은 돈과 함께 권력을 무력화하는 하나님 나라의 누룩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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