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대한 관심은 기독교의 DNA!"
"세상에 대한 관심은 기독교의 DNA!"
  • 신기성
  • 승인 2019.09.11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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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김홍일 신부
사진 출처: 김홍일 신부

[뉴스M=신기성 기자] 성공회 뉴욕한인교회 피정 인도 차 뉴욕을 방문한 김홍일 신부를 만났다. 김홍일 신부는 스물여섯 살이었던 1986년에 상계동 ‘나눔의 집’을 통한 빈민 선교를 시작해서, 청소년을 위한 공부방과 탁아소를 운영했고 가난한 이웃을 위한 자활지원센터와 고용지원센터 등을 설립했다. 현재 한국샬렘영성훈련원의 프로그램 디렉터를 맡고 있고 피정과 저술 활동을 통해 관상적 영성 운동을 이끌고 있다.

신부님을 잘 모르는 미주 한인 동포들을 위해서 신부님이 그동안 해오신 활동을 간략하게 소개해주시겠습니까?

저는 나눔의 집을 시작해서 빈민 선교를 약 20년간 했습니다. 빈민 선교에 동참했던 분들이 좀 더 생명력 있고 활발한 활동을 위해서는 우리 안에 근원적인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영성과 기도에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주로 같이 일하던 성공회 사제들과 함께 5년 정도 매월 모여서 전국에 있는 기도원이나 피정집 혹은 교회를 다니면서 기도하고 공부하는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런 모임이 5년 정도 지난 후 ‘성공회 영성센터’로 발전했습니다. 이 센터를 통해서 기독교 전통 중에 있던 침묵기도나 관상기도를 소개하고 보급해서 신자들의 영적인 여정을 돕는 활동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2년 동안의 유학을 했었는데 미국에 있는 동안 주교님이 ‘샬렘 인스티튜트(Salem Institute)’에서 훈련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샬렘 인스티튜트는 에큐메니칼 영성훈련 기관입니다. 역사가 50년이 넘은 미국에서는 꽤 많이 알려진 영성훈련 기관입니다.

설립자는 성공회 사제입니다. 하지만 운영을 하는 분들은 다양한 개신교단들과 가톨릭에 속해 있습니다. 거기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귀국 후에 그곳에 있는 분들을 한국에 초청해서 프로그램을 하게 됐는데 그때 모였던 에큐메니칼 그룹들이 모임을 지속하기를 원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영성훈련을 받으려면 주로 가톨릭 프로그램에 참여하곤 했었습니다. 개신교 내에 초교파적으로 이런 모임들이 처음 생기게 됐는데 이를 지속적으로 해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의지를 가진 분들이 계셨습니다. 이분들과 함께 모임을 계속 가져왔습니다. 2008년도에 첫 모임이 시작됐고 2012년에 ‘한국살렘영성훈련원’이라는 조직을 공식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조직이 미국 살렘과 파트너십을 갖고 운영되면서 한국에서 평신도, 지도자, 성직자들을 위한 영성훈련 프로그램을 초교파적으로 실시하고 있습니다. 저도 일주일에 3일씩 그곳에 가서 프로그램 디렉터로 섬기고 있습니다.

한국샬렘영성훈련원의 활동을 좀 소개해주세요.

한국샬렘영성훈련원은 세상 속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임재에 우리를 끊임없이 열어 드리는 태도를 훈련하는 곳입니다. 일상 속에서 주님과 보다 깊고 풍성한 관계를 맺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현존에 늘 깨어 있으면서 전인격적으로 응답하는 훈련을 말합니다.

샬렘영성훈련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지는 분들은 크게 세 그룹입니다. 미국도 비슷합니다. 첫 번째 그룹은 상담 전문가들입니다. 상담을 통해 도움을 주는 분들인데 자신의 역할의 한계를 체험한 분들입니다. 주로 기독교인 상담가들입니다. 이분들이 교회 안에 오랫동안 존재해 왔던 ‘영성 지도 전통(spiritual direction)’을 자신의 상담 지식과 연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영성 훈련에 참여합니다.

두 번째 그룹은 교회에서 사회 선교를 담당하거나 사회 운동을 하는 분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좋은 일을 한다고 하지만 사역의 동기가 정화되지 않으면 그 일이 사람을 살리는 일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활동’과 ‘영성’을 ‘샘’과 ‘물줄기’에 비유합니다. 샘이 마르면 물이 흐를 수 없습니다. 물은 고갈되고 길만 남아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또 샘은 고여 있으면 썩게 마련이죠. 사회 선교나 사회 운동을 하는 분들 중 활동과 영성을 분리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분들, 즉 샘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분들이 참여합니다.

세 번째 그룹은 내면적, 내세적, 이원론적 영성과 개인의 경건에 지나치게 치우친 교회들이 새로운 기독교 영성에 대한 재발견의 기회를 찾기 위해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세 그룹이 한국샬렘영성훈련원에 주로 참여하시는 분들입니다.

수도원을 다니시면서 영성과 기도 훈련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신수도원 운동을 소개하고 계시기도 하구요. 새로운 대안 신앙공동체로서 신수도원 운동을 하고 계신 건가요?

우선 현재 수도원 운동의 큰 줄기를 보자면 미국과 유럽을 들 수 있는데 두 지역의 수도원 운동이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유럽은 기독교 신자들이 계속 감소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신수도원 운동을 하는 분들은 가톨릭 전통에 속한 분들도 있지만 복음주의권에서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참여하고 있죠. 이분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은 신자 감소 현상입니다. 선교가 잘 안 되고 교인이 감소하는 원인이 무엇인가 묻고 대안을 찾고 있습니다.

국민 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을 때는 믿음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영향을 줄 수 있었습니다. 제자 훈련이 한 예입니다. 확신을 더 강하게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죠. 문제는 지금 영국 같은 경우에 전체 국민의 20% 정도만 교회에 나갑니다. 80% 정도는 교회 밖에 있는거죠. 그리고 교회를 아예 한 번도 안 가 본 사람이 40% 정도 됩니다. 어린 아이들만 보면 전체의 5%만 교회에 나갑니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봅니다. 유럽은 더 이상 기독교 국가라고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독교인의 믿음의 확신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없어집니다.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뭔가 다른 삶의 모습입니다. 기독교인들의 말은 별로 영향력이 없습니다. 사실상 기독교인들의 삶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점점 영향력을 잃어갑니다. 영국의 복음주의권 안에서는 교인 수가 감소하고 선교가 되지 않는 이유를 ‘제자화의 실패’로 진단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인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개인이 믿음의 확신을 가졌을 수는 있지만 사는 것은 비기독교인들과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다가 발견하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그런 비슷한 고민을 가장 오래 한 사람들이 수도자들입니다. 수도자들은 그리스도를 닮도록 삶의 변화를 추구해 온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이 가진 전통의 중요한 요소들이 무엇인지 연구해서 그것들을 일반 평신도들에게 적용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기존 교회가 좀 느슨하게 보였습니다. 자신을 좀 더 깊게 헌신할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한 갈망을 가진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분들은 교회 안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새로운 공동체를 찾아 나섰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통해서 이 세상과 다른 뭔가 대안적인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나, 기독교인들의 일상 속에서 이런 대안적 공동체의 위상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예언자적 기능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비판 등이 새로운 형태의 수도원 운동을 가능하게 했던 동기가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가나안 신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200만 정도 된다고 합니다. 기존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성서가 증언하는 공동체를 찾아 떠도는 분들을 말합니다. 좀 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신앙공동체를 추구하는 분들이 모여서 대안 공동체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 중심으로 신수도원 운동 같은 신앙운동이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개인 경건과 내세 구원을 지향하는 이원론적 사고가 현재 한국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대안적 신앙 공동체를 목표로 한다면 신학적 강조점에서도 차이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신부님이 이끄시는 영성 운동에서는 어떻습니까?

저는 기독교 영성은 개인 중심이라기보다 공동체적인 성격이 더 강하다고 봅니다. 주기도문에서도 ‘나’라고 하지 않고 ‘우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전통적으로 교회가 영성에 관해 얘기할 때 개인의 구원, 개인의 경건 중심으로 가르쳤습니다. 저는 개인의 영성과 사회적 영성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분리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영성 자체가 공동체적 영성이고 세상에 대한 관심이 기독교의 DNA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일과 하나님 나라의 일을 구분하는 이원론은 기독교 영성의 본질에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지주의적 이단 사상에 가깝습니다.

수도원 운동에서 완덕을 추구한다고 하는 것은 성육신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레네우스의 말을 빌려 얘기하자면 성육신은 사람이 하나님을 닮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수도자들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단지 자신만이 아니라 이 세상이 거룩해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성육신 사건을 통해 확신합니다. 한 개인이 거룩하게 되는 것과 사회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진수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때가 16세기입니다. 가톨릭에 반기를 들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개신교 영성이 이때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은 서방교회는 어거스틴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가톨릭과 개신교 공히 인간의 죄를 많이 강조합니다. 성서에 ‘원죄’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어거스틴이 원죄를 교리화했습니다. 그 후로 인간의 죄성에 대해 굉장히 천착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동방교회는 ‘인간의 죄가 있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파괴가 되어서 없어진 것은 아니다’고 가르칩니다. 동방교회 전통은 죄성보다는 하나님의 형상에 강조점을 둡니다. 현재의 영성신학의 큰 흐름은 동방신학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수도원 운동이 동방교회에서 시작되었고 가톨릭교회의 수도원 전통에서도 동방교회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도원 영성은 동방교회 전통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전통을 강하게 받은 개신교에서는 인간의 죄성을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원론적 사고를 기초로 영성을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부분이 변화가 필요한 지점이라고 봅니다.

인간의 의(義) 혹은 의지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는 모든 기독교인이 동의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에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노력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데에는 비판이 많습니다. 본 회퍼의 ‘값싼 은혜’ 같은 비판이죠.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우리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의 노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김홍일 신부는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늘 사람들과 같이 살았다고 한다. 나눔의 집에 있을 때는 야학 교사들과 학생들과 같이 살았다. 지금은 ‘숨과 쉼’이라는 공동체에서 청년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삶을 나누고 가난을 나눈다. 그는 ‘하나님 나라’라는 대안 공동체를 몸으로 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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