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입장권 판매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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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성수 목사
  • 승인 2019.09.27 05: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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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장관의 딸 논란 과정에서 들어난 한 가지 반응은 불평등에 관한 것이었다. 대표적 강남좌파인 조국의 배경이 알려지면서 흑수저 가운데는 아래 배가 사르르 아픈 것 같기도 한 느낌을 갖게 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늘이 열린 이래 불평등은 언제나 존재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이 있다면 우선 평등한 세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평등의 연습을 해보지 않고는 천국의 맛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불평등에 익숙한 사람들, 평등이 불편한 사람들은 천국에 가도 낮이 설어서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나마 예수를 비롯한 선구자들이 평등의 연습을 쉬지 않고 해왔기에 지금 젊은이들이 조국의 딸 때문에 투덜 될 수 있을만한 사회가 된 것이지 나이롱뽕으로 된 것이 아닌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면 출생신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그러나 보수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은 사망진단서가 곧 출생신고서가 된다. 왜냐하면 죽어야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간다는 천국은 어떤 곳일까?
1986 년도에 처음으로 하와이에 가서 부자들의 그림 같은 별장이 늘어선 다이아모든 비치라는 동네를 지나다가 ‘이 사람들에게 천국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천국에 있다고 한들 이 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이었다. 아무리 좋은 곳에 살아도 병이 들거나 죽으면 안되니까 그런 곳에 아프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을 추가하면 보수기독교인들이 바라는 천국 그대로 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곳이라면 나는 별로 가고 싶지 않다. 지금 내가 사는 호주도 그렇게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사는 동네는 무슬림 레바논 사람, 힌두교 인도 사람, 불교도 중국 사람들이 어우러져 큰 문제 없이 잘 살고 있다. 천국에 가면 기독교인들만 모여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얼마나 단조로울 것인가?

보수 기독교 신앙에서는 죄를 회개해야 천국에 간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개인이 모범적으로 살았나 불량하게 살았나 하는 것을 생활기록부에 기록하는 교사 같은 존재가 아니다. 유치원에서는 친구들과 싸우지 않고 사이 좋게 지내고 선생님의 말을 잘 들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 된다. 그러나 세계는 유치원이 아니다. 내가 착하게 사는 것과 세계가 돌아가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평등한 세상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으면서 천국을 가기를 바라는 기독교의 신앙은 미신이라고 생각한다. 미신의 사전적 정의는 ‘ 과학적 관점에서 헛된 것으로 여겨지는 믿음이나 신앙’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대부분의 한국 보수 기독교인들은 미신을 믿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연락이 끊겨서 시름을 덜었지만 오랜 동안 나에게 희망적인 일 보다는 항상 어둡고 걱정스러운 일만 가져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경쟁력 있는 직장도 아닌데 다니다가 해고가 되었다고 복직투쟁을 몇 년 동안이나 했다.
어느 때는 복직투쟁을 하느라고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그 힘으로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것이 더 좋을 듯 싶기도 했었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으니 이런 저런 일을 하다가 결국은 해고된 직장보다 더 좋지 않았던지 몇 해 만에 복직이 되어 다시 돌아갔다. 이 경우처럼 다른 직장 보다 해고되었던 직장이 더 좋아서 복직 투쟁을 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런데 삼성생명이 있는 강남역 사거리 앞 CCTV철탑 위에서 50일째 곡기를 끊고 고공농성을 이어가던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씨의 경우는 달랐다.
어느 페친의 김용희 씨에 대한 포스팅에 미국에 살아 한국의 현실은 잘 알 수가 없는 페친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았다.
“해고 당해서 저렇게 하는 거에요? 해고는 안타깝지만 얼른 다른 일 찾아서 일하는 게 답 아닌가요?”
당연한 의문이다. 그런데 김용희 씨의 경우는 해고를 당했어도 다른 곳으로 옮길 이유도 없었다. 돈 다발을 받고 조용히 잠수를 타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노조를 만든다고 해고 된 것이 억울해서 철탑에 올라가 단식을 했던 것이다. 목숨이라도 살리려고 시민단체가 설득을 해서 55일 만에 단식을 중단하고 복식에 들어갔다.

세상에는 가끔 이런 사람들이 있다. 남들의 눈으로 볼 때는 초라해 보일지라도 대체 불가능한 자신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도 가치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이익과 관계 없는 일에 희생을 하는 일 이상 가치 있는 일이 있을까? 이 살벌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내세에 천국 가는 것에 부여하는 기독교인들이 많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신앙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이들도 있다.
건강을 위해서나 환경 오염을 염려하여 승용차를 타지 않고 걷거나 자전거를 타든지 대중교통 수단만 이용하겠다고 하는 철학을 가진 사람에게는 집을 지을 때 창고가 필요할지언정 차고는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집을 사고파는 일을 생각하는 부동산업자의 눈으로 볼 때는 차고가 없는 집은 불완전한 집으로 보일 것이다. 이처럼 전문 종교업자의 눈으로 볼 때는 천국이 없다면 불완전한 종교로 보일 터이다.
그러나 집을 지을 때 장차 팔 생각이 전혀 없이 집을 짓는 사람이 있듯이 내세를 생각하지 않고 이 세상만을 책임 있는 자세로 살기 원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예수는 천국이 ‘다가 온다’, 혹은 ‘왔다’로 표현 했다. 즉, ‘죽어서 간다’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변했을까? 그래야 입장권이 팔리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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