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과 구약의 하나님은 다르다"
"요한복음과 구약의 하나님은 다르다"
  • 김회권
  • 승인 2007.06.20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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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도올 김용옥의 기독교 및 성서 이해 담론 자세히 읽기 4

도올의 <요한복음 강해> 자세히 읽기

도올의 <요한복음 강해>는 RSV에 대한 도올의 번역(번역은 자연스러운 어투 도입 외에 별다른 의의가 없다)과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요한복음에 대한 선별적·취사 선택적 강해를 담고 있다. 우리는 장 별로 이뤄진 강해 순서에 따라 논평과 비평적 응답을 제시할 것이다.

서론 격인 “한국 성서 수용의 주체적 역사”는 성경과 기독교(특히 가톨릭)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을 ‘주체적 기독교 복음 수용사’라는 관점에서 다소 과장적인 필치로 소개한다.

그는 기독교 토착화의 소인 중 중요한 요인 하나가 팔레스타인과 조선이 공유한 역사적 지평이었다고 평가한다. 도올은 여기서 <절차탁마 대기만성>에서 보여준 기독교와 한국인의 샤머니즘적 공통점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지는 않는다. 도올은 이스라엘 역사는 존경의 대상이 아닌 반성의 대상이라고 말하면서, 구약에 대한 기독교의 흠모와 애착을 은근히 폄하한다.

“이렇게 유대 민족의 역사를 통관하여 보면 그것은 숭모의 대상이 되어야 할 역사가 아니라 반성의 대상이 되어야 할 역사요, 야훼 하나님을 잘 섬긴 역사가 아니라 끊임없이 야훼를 배반한 음탕과 방탕, 방종과 방황의 역사다. 그들이 지은 죄 때문에 끊임없이 다이애스포라를 전전해야만 했던 방황과 방랑 속에서 하나님의 뜻, 즉 섭리를 찾은 구속사요 신성사였다. … 그것이 유대 민족의 저주요 축복이요 강인함이었다”(47쪽).

반면에 도올은 한국 기독교의 자주성과 주체성과 능동성을 높이 평가하면서(60쪽), 한국 기독교는 세계 기독교의 생명력이라는 과장된 언사로 서론을 마무리한다(9-64쪽).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훌륭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선교를 의미 있게 만들어준 조선의 민중들의 의지가 위대한 것이다”(60쪽).

도올의 다소 과장된 언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20세기 세계 기독교가 한국 민중의 놀라운 선교 정신 때문에 그 생명력을 유지했다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60쪽). 도올 자신은 한국 기독교의 미래는 오직 ‘성서의 바른 이해’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며, 그 바른 이해를 위해 자신은 요한복음 강해에 착수한다고 선언한다(62쪽).

이 강해는 거의 1장 강해에 모든 공력을 쏟아놓고 있다. 1장 강해에서 도올은 로고스 개념의 역사를 일별하기 위하여 요한복음 1장 1절의 로고스의 의미를 추론할 수 있는 헬라적 1차 자료를 섭렵한다(특히 79-96쪽).

도올에 따르면 로고스에 우주론적인 의미를 부여한 사람이 에베소 사람 헤라클레이토스다(79쪽). 직접적 사승 관계를 떠나 “독자들은 헤라클레이토스를 이해하면서 요한의 로고스 기독론을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수없는 실마리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80쪽). “… 만물이 이 말씀에 따라 생성되지 않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말씀을 만나본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81쪽).

이후 파르메니데스, 중기 플라토니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에 이르기까지 로고스 개념은 약간씩 변형되면서 요한복음의 로고스 기독론 탄생에 이바지한다. 특히 알렉산더의 필로(BC 20-AD 50)는 유대 민족의 절대적이고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하나님의 개념과 플라톤주의와 피타고라스주의의 추상적이고 인식론적이고 초월적인 신학을 융합시키기 위한 산물로서, “창조되어질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 그 아버지의 맏아들로서의 로고스, 신과 세계의 중간 단계에 있는 신적인 존재로서의 로고스를 상정하고, 그 로고스를 통하여 신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이 융합될 수 있다고 믿었다”(95쪽). 그는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강림보다는 인간 정신의 고양을 꾀한다.

도올은 처음부터 요한복음의 하나님이 구약의 하나님과 다르다는 점을 공리로 삼고 출발한다. 그는 예의 그 영지주의 구속자 신화에 의존하여 요한복음을 강해한다. “요한의 하나님이 구약의 하나님과 다른 것은 유대 민족에게 계약의 충실한 이행을 점검하기 위하여 진노의 불길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암흑 속에 빠져 고뇌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구속자, 구세주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 구속자가 바로 로고스이다.

로고스는 유일신인 하나님과 다른 또 하나의 마이너한 하나님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다신론이 된다. 실제로 하나님과 이 세계의 이원적 분열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서, 그 사이에 다양한 중간 차원 신들을 설정하는 설명 방식이 요한의 시대에 이미 성행하고 있었다”(98쪽).

도올은 유다복음서를 인증(“이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바보멍청이 중간 신들의 창조물이다”)하여 구원에 대한 새로운 해석 가능성을 열어보인다. “구원의 목적이 이 잘못 창조된 세계를 벗어나서 진짜 하나님에게로 가는 것이며, 그 진짜 하나님에게로 가는 지혜를 유다에게 가르쳐주는 대가로 예수를 배반하는 사명을 준다.” 이런 경우에 로마서가 말하는 죄의 대속 개념은 많이 약해진다.

이 과정에서 도올은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죄론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다. “예수는 결코 원죄를 말하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사상은 매우 괴이한 사상이다. 예수는 결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 인간의 원죄를 주장한 것은 부활의 의미를 추상적으로 강조하기 위하여 원죄를 추상화시켜 윤색해야만 했던 사도 바울의 사상이었다”(104쪽).

도올의 악/죄에 대한 견해는 다음 인용문에서 어느 정도 간취된다. “그런데 악은, 실상 악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악한 의지와 관련되어 있다. 악한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 것은 악한 의지일 뿐이다.” “그런데 인간의 악한 의지는 대개 인간의 육체의 타성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육체는 도덕적으로 선량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105쪽).

1장의 109-113쪽에서 도올의 로고스 기독론 해석의 특이성이 포착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원초적 소통 가능성을 옹호하는 내재주의적 계시 수용성에 대한 그의 강조다.

“예수는 로고스이며 온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이며 온전하게 빛의 수육체다. 그런데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도 온전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인 빛의 파편이 있다. 그 빛의 파편이 바로 인간의 영혼이며, 그 영혼은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 그 갇혀 있는 빛의 파편을 당연히 원래의 자기 고향, 즉 하나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에로스적(상향적) 충동이 있다.

… 빛은 빛끼리 통한다. 그리고 이 빛(불꽃)은 하나로 뭉치기를 좋아한다. … 이 작은 불씨들은 하나의 불꽃으로 뭉쳐 하늘로 올라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예수가 인간의 탈을 쓰고 거지 왕자가 된 소이연이다. 인간들이 자신에게 내재하고 있는 생명의 빛을 직시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수난을 통하여 이 세계의 어둠을 해체시키고 인간들에게 내재하고 있는 빛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로고스는 수난을 통하여 자신을 파멸시킴으로써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다. 그는 인간과 자기 자신을 함께 구속함으로써 스스로 구속되는 것이다”(109-110쪽).

이 점은 9-13절 강해에서 다시 한 번 두드러진다. 도올은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에게 내재하는 말씀의 가능성을 인지한다는 것이다”라고 규정한다(144쪽).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요한(혹은 도올의 해석에 따른 요한)에게 “즉 자신에게 내재하는 생명의 빛을 발견함으로써 하나님과 소통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2장 강해(12-25절)에서 도올은 성전 정화 사건을 복음서의 앞부분에 배치한 요한복음의 안목을 주목한다. 요한복음은 성전 정화(자기를 죽음으로 몰아간)를 그의 죽음의 계기가 되는 클라이맥스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최초의 이적과 연접시킨다. 이 점에 바로 요한복음의 구성적 파격성과 상징적 강력성이 내재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최초로 앞당겨 버린 것이다(186쪽). 요한복음에서의 예수의 죽음이 상실이나 파괴가 아니라 신성의 원래 복귀를 의미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셈이다.

3장 강해에서 도올은 요한복음이 어떤 점에서 영지주의에 기대면서 영지주의의 이원론을 창조적으로 해소했는지를 부각시킨다. “왜냐하면 예수는 육화된 로고스로서 하늘이 땅속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요한복음에 영육의 이원론은 강렬하게 깔려있는 주제지만 그것을 이원론적으로만 해석하면 요한복음이라는 복음의 의미가 상실된다”(196쪽).

도올은 여기서 요한복음(자신)과 헬라적 영지주의적 이원론을 구별한다. “예수가 인간이 아니라면 가현론의 가능성밖에는 남지 않는다. 예수가 인간이 아니라면 복음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 그것은 하늘과 땅이 하나된 몸일 뿐이다”(바레트, 74쪽 인용)(197쪽). 18절(“믿지 아니하는 자는 …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다) 강해에서 도올은 요한복음의 현재화된 종말론을 도출하고 있다. “종말은 철저히 현재화되고 있다. 예수는 이미 육화될 때 심판의 자격을 지녔다”(197쪽).

19-20절 강해에서 도올은 요한복음이 빛과 어둠의 이원론을 창조적으로 해소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악을 행치 않고 진리만을 좇는 자들에게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빛일 뿐이다. 빛과 어둠의 이원론은 사라진다”(197-198쪽).

4장 강해에서 도올은 사마리아인의 기원과 사마리아와 유대의 갈등사를 잘 재구성하고 있다(214-219쪽). 도올은 구약 자체가 반사마리아 문헌이며, 히브리 성경 자체가 유대교(예루살렘) 중심으로 편찬된 매우 편견 있는 문헌이라고 규정한다(215-216쪽).

도올은 여기서 다시 한 번 구약 역사가 이스라엘의 추악한 배교 역사라고 단정한다. 언뜻 보면 도올의 관찰이 옳아 보인다. 그러나 구약은 어떤 민족 서사시나 종교 성전물보다 더 정직하고 투명한 자기 성찰이나 고백으로 가득 차 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이스라엘 민족만이 자기의 배타성, 추악한 자기중심성을 기록물로 남겼다.

구약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야수적 정직성과 고백이 있을 뿐 자기 의를 자랑하는 기록은 거의 한 줄도 없다. 오히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은 자기 역사를 자랑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한 승리, 이스라엘과 인류의 죄와 불순종, 패역과 타락을 초극한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의 승리(치드코트 아도나이)를 노래한다(존 골딩게이).

구약은 메시아를 앙망하고 기다린 이스라엘 민족의 길고 긴 인고의 세월이나 초인적인 성실, 신실한 의리 지킴을 현양하지 않는다. 도올의 구약에 대한 편견은 아마도 폭력과 억압을 동반한 율법주의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또 변덕스럽게 폭발하는 화염 같이 진노하시는 야훼에 대한 혐오 어린 도올의 반감은 깊이 있는 연구와 토론이 필요한 분야임이 틀림없다.

5장 1-18절 강해에서 도올은 맥락을 다소 벗어난 주제를 다루면서도 유대 민족, 구약 율법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감을 표출한다. 38년 동안 병들었다가 치유 받은 사람에게 안식일을 지키도록 강요하는 유대인들의 요구에 직면한 도올은, 유대 민족의 역사와 율법에 대하여 적의를 감추지 않는다. “하여튼 유대 민족의 역사는 온통 근친상간의 역사였다. 레위기 18장에 나오는 근친상간의 리스트를 보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근친상간 목록이다”(231쪽).

그는 더 나아가 구약의 타부 같은 율법이 많은 이유를 전혀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다. “당시 개돼지처럼 한 텐트 안에서 근친끼리 음욕을 충족시키고 금송아지나 만들어 광란의 춤이나 추고 있었던 유대인들을 질서 있게 데려다 정착시키기 위한 방편은 오직 율법밖에 없었다. 인간을 구속하는 온갖 타부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 하나의 법칙이었다. 야훼라는 유일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 그것이 강요되는 원리의 세계였다.

원래는 역사적 상황에서 발생한 방편이었던 것이 절대화되고 조례화되어 그 의미나 전체적 도덕 원리는 무시되었다. 율법을 통해 생명을 부여하려는 하나님의 의지는 사라지고 단지 율법이라는 세부조항의 형식적 권위만 살아남은 것이었다. 예수가 본 유대인의 현실 중에서 가장 절박한 것은 메시아의 도래나 천국의 도래가 아니고 어떻게 율법에 얽매여 사는 인간을 해방시키느냐 하는 과제 상황이었던 것이다”(231-232쪽).

도올은 예수의 천국은 유대인들의 마지막 보루인 토라를 폭파시켜 버리는 혁명적 작업을 통해 도래한다고 주장한다. 도올의 저작물에서는 정교한 학문적 분석과 대중적인 억측과 상상이 어지럽게 병존하는 경우가 자주 눈에 띈다. 율법에 대한 도올의 이해를 보면 그의 율법 이해, 구약 이해가 너무나 불균형적일 정도로 빈약함을 느낀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사랑의 멍에라고 느낀다. 로마서 8:4에 의하면 성령의 내주도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단 한 순간도 율법은 억압이나 폭파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다. 아마도 도올은 구약이나 구약의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에 의하여 교조화된 원칙들과 규례들을 페기하자는 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미쉬나 39개 조항 안식일 부칙)(234쪽).

절대화된 율법주의에 대한 도올의 극단적인 반감은 다음 인용 구절에서 명료하게 표출된다. 안식일 계명을 어긴 사람에 대한 응징을 담고 있는 두 구절(출 31:14-15; 민 15:32-36)을 인증하여, 도올은 안식일 계명 위반자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하나님이라고 힐난하며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제발 기독인들이여! 성경 헛읽지 말라! 성경 그 자체에 유대인과 야훼의 잔악함이 다 그대로 쓰여 있다. 이것이 율법이다! 과연 일요일 일 좀 했다고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할까? 이것이 위대한 종교의 모습이가? 과연 일요일 여호와 하나님께 돌로 쳐 죽임을 당하지 않을 자가 대한민국 기독교인 중에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235쪽)

도올은 여기서 주석의 기본을 잠시 잊은 듯하다. 안식일 계명이 국가보안법처럼 아주 중대한 계명처럼 간주되었을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는 구절(느 13장)들을 교조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을 희화화하고 있다. 그가 성서 본문을 역사적 지평 위에서 해석한다면, 문제가 되는 이 구절들의 유래와 기원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구약의 율법 제정은 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깊은 배려와 융통적인 적용 감각 아래서 이뤄졌다. 슬로브핫의 딸들의 아버지 땅 상속법 제정 과정(민 27, 36장)은 구약 율법은 어떤 상황에서도 죽음을 대가로 지불하고서라도 지켜져야 할 절대법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19-47절 단락 중 24절(“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 그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에서 도올은 또 다시 요한복음 특유의 현재화된 종말론의 흔적을 발견한다. 역시 최후의 심판과 같은 종말론적인 사건이 현재화되어 있다(243쪽).

27절 강해에서 도올은 ‘인자’라는 용어가 전혀 종말론적인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데, 다소 의심스러운 판단이다. 인자의 묵시론적 혹은 종말론적 심판 배경을 삭제하고 나니까 아주 뜻밖의 해석이 이뤄진다. 인자가 심판한다는 것은 예수 자신이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에, 즉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을 심판할 수 있다는 사상의 언표로 이해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 권세를 부여받았지만 인간의 체험을 공유하는 한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을 평가하고 심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245쪽).

6장 1-15절의 이어오병 사건에 대한 강해에서 도올은 다소 합리주의적인 해석을 시도한다. 먼저 그는 “이적은 이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것을 사실로서 인과적 고리를 맺으려는 하등의 노력도 그 이적 설화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감소시킬 뿐이다”(249-250쪽)라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이 요한의 설화도 결코 이적이라고만 우리가 볼 수는 없다. 오천 명이 모인 상황이 있었고, 배고픈 상황이 있었고, 사소한 이어오병이라도 있는 것을 모두 다 같이 동등하게 나누어 먹었다는 사건이 있을 뿐이다. 요한은 이것을 이적으로서 신기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초대교회 성찬 예식의 가장 원초적 형태의 현장을 그렸을 것이다.

… 여기 ‘나누어’ ‘주었다’는 표현 사이에 이어오병이 불어나는 이적에 관한 설명이 전혀 없다. … 예수의 혁명은 이와 같이 나누어 먹는 혁명이다”(250쪽). 아마도 일본인 학자 사천건삼의 <원시 그리스도교 연구>의 입장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도올은 합리주의적 해석과 신화적 이적으로서의 해석 사이에 우왕좌왕하고 있다. 16-71절 강해에서 도올은 미래 종말론적 차원을 애써 무시하려고 한다(39, 40, 44절 마지막 날 언급). 아무리 요한이 현재적 종말론을 외친다 하더라도 여전히 윤색하지 못한 미래적 종말론이 여기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도올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마지막 날에 살리리라는 이 말이 철저히 현재적 종말을 강조하는 요한의 종말론에 혼동감을 주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나, 그것은 자신의 현재적 종말론 안에 유대 전통적인 종말관의 여음을 남겨두려는 저자의 문학적 풍요로움이라고 축소시켜 버린다(264쪽).

7장 41-42절 강해에서 도올은 나사렛 예수는 처음부터 갈릴리 출신이며, 이 두 절의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 이야기는 마태나 누가에 의하여 꾸며진 스토리임을 증언한다고 판단한다.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지도 않고 다윗의 혈통과도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8장 32절(“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강해에서 도올은 신약학자들의 구약-유대교 의존적인 신약 이해를 비판한다. 그는 여기서 진리(알레테이아)는 사람의 품성에 관한 담론이라기보다는 실재(reality)의 인식에 관한 것임을 밝힌 후, “진리를 안다는 것은 실재 즉 하나님의 영역을 파악하는 것이며, 이 육신으로 파악되는 세계에 대한 지식, 생성되고 소멸되는 코스모스의 판타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302-303쪽).

도올은 여기서 다시 인간의 내재적 계시 수용성을 강조한다. “예수라는 인성 속에서 그의 인성의 베일에 가려 있는 신성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의 인성을 가지고 예수의 인성만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수난이요 인간의 비극인 것이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예수의 신성을 파악할 때 우리 자신 내에 숨겨진 신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영생을 얻는 것이다”(303쪽).

도올에 따르면 9장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어떤 다른 요한의 담론보다도 더 생생하고 완벽하고 간결하게 그리고 토탈하게 표출시키고 있다”(318쪽). 10장 34절 강해에서 도올은 또 다시 신약의 구약 인용의 조야성과 무근거성을 비판한다(시 82:6). 11장 강해에서 도올은 나사로 부활 이적을 예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강력한 증표로 드러내는 드라마적 장치라고 규정한다(342쪽).

12장 강해에서 도올은 세 차례의 구약 인용(15절 스가랴 9:9; 38절 이사야 53:1; 40절 이사야 6:10)을 “매우 엉성한 인용이며 해석의 여지도 많고 또 텍스트 자체의 문제들이 개재되어 있다”고 본다(365쪽). 도올은 “신약 속에 나오는 구약의 인용에 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쓰는 모든 시도는 조잡한 권위에로의 복속에 불과한 것이다. 요한의 복음 자체가 그러한 구약의 단구(短句)의 가치를 몇 억만 배 뛰어넘는다는 사실에 새롭게 눈을 떠야 한다”라고 말한다(365-366쪽).

13장 강해에서 도올은 다시 구약과 예수와의 관계를 급진적으로 단절시킨다. 예수의 섬기는 사랑을 구약의 하나님의 진노와 대비시키는 맥락에서 무리한 단절을 시도한다. “예수의 전 생애의 사상의 핵심은 율법의 부정이라는 한마디로 압축될 수 있다고 나는 말해 왔다. … [그것을 긍정적인 언설로 바꾸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율법을 대치할 수 있는 모든 계명을 폐할 수 있는 새로운 계명이다”(377-378쪽).

도올은 여기서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감정이나 파토스가 아니라 신에 대한 사랑임을 역설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지에 의지를 완벽하게 복속시킨다는 의미의 사랑은 구약의 신명기가 그토록 강조하는 그 의지적 사랑이다. 요한복음의 사랑 이해는 신명기적 음조를 반향하고 있다.

14장 1-31절 강해에서 도올은 요한복음이 일반적 재림의 기대에 대한 종말론적인 해석을 예수의 담론에서 지워버리지는 않지만 예수의 재림을 보혜사 성령의 인격체로서 대치함으로써 그 재림의 물리적 성격을 완화시키고 있음을 지적한다(389쪽).

15장 1-17절에 대한 강해는 아주 견실하나 포도나무 비유의 기원을 추적하는 방식은 다소 의아스럽다. 굳이 신약과 구약과의 단절이라는 교조적인 경직성을 도올이 벗을 수 있다면, 아마도 그는 이사야 5장과 예레미야 2장을 금방 떠올렸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성경 내재적인 주석 방법을 적용하면(Michael Fishbane, Biblical Interpretation in ancient Israel[Oxford: Clarendon, 1988]), 이런 방식의 주석적 관찰은 어렵지 않게 수행할 수 있다.

15:1은 에고 에이미 본문으로 예수 자신과 이스라엘 공동체를 구별지우는 발언이다. 마치 10:11, 14가 자신을 에스겔 34장의 거짓 목자들과는 달리 선한 목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에고 에이미 어법을 구사하듯이, 예수는 들포도나무인 이스라엘과는 다른 참 포도나무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포도나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하여 만대아교, 지중해 문명 이집트 문명의 생명나무 신화, 중동 및 동방 문명권에 공통된 유기체 사상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그렇게 먼 지방의 자료까지 참조할 열심이 있다면 왜 구약을 참조하지 않았겠는가? 이 단락 강해의 마지막 부분에서 도올은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종교 혼융적이고 다원주의적 공존과 포용의 윤리를 주창하면서 동시에 배타적인 한국 기독교를 힐난한다.

“예수라는 나무는 우주적 생명이다. 이 우주적 생명나무에는 전 인류의 가지가 달려 있다. 그리고 전 인류가 사랑의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 것이다. … 예수의 사랑이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이라고! 그리고 예수가 전 인류를 사랑하심같이 전 인류가 서로 사랑할 때만이 예수의 복음은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인류 속에는 단군 숭배자도 있고 불타 숭배자, 공맹 숭배자, 알라 숭배자, 야훼 숭배자도 있을 수 있다”(397-398쪽).

참 대범하고 감동적인 발상이면서도 동시에, 과연 어떻게 우리가 이런 보편적인 사랑의 유기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타종교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은 모든 종교를 다 같은 줄기에 붙은 가지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15장 18-27절 강해에서 도올은 보혜사 강림이 예수의 재림 성취라고 말한다. 16장 1-15절 강해에서 도올은 예수의 부활은 보혜사의 강림으로 상징화되고 있다고 말한다(407-408쪽). 17장 1-26절 강해에서 도올은 또 다시 신일합일적 구원을 말한다. 그는 11, 21, 22, 23절에 나오는 “제자들의 하나됨”은 단지 초기 기독교 공동체 자체의 내부 결속이나 일체감, 종말론적인 공동체의 유니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의 연합성을 토대로 삼은 제자들과 하나님과의 연합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14:20, 17:21에는 예수를 매개로 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이라는 사상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도올은 기독교 교회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요한복음의 신일합일 영성을 은폐하고 축소시키고 왜곡시켜온 역사라고 규정한다. 이런 인간론적인 신성(divinity)의 테마를 신비주의라는 이름으로 애매하게 취급하는 주류 기독교를 비판한다.

그는 “요한복음의 깊은 사상에는 인간과 예수와 신의 ‘하나됨’이 깔려 있다. … 나의 실존 속에서 신성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모든 종교는 하나님의 권위를 빙자한 무당 푸닥거리밖에 되지 않는다”(420-421쪽)라고 말한다.

도올이 말하는 요한복음의 신일합일 사상은 동방 정교회의 영성을 대표하는데,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 클레멘트 등에 의하여 발전되고 계승된 구원관이다.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진 이그나티우스와 그의 제자인 오리겐과 또 그의 제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이런 요한복음적 구원 이해를 발전시켜 온 인물들이다.

도올의 구원 이해는 동방 교회적이다. 형벌 대속론적 실용적인 법정적 구원관을 발전시켜온 서방 교회의 눈에 비칠 때는 이런 요한복음적인 구원관이 낯설어 보일 수가 있다.

18장 28-40절에 대한 도올의 강해는 아주 좋고 적확해 보인다. 도올이 잘 지적한 것처럼, 확실히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은 빌라도와 예수의 대화를 심문의 장면으로서가 아니라 요한 철학의 가장 드라마틱한 대결 장면으로서 매우 신랄하게 처리하고 있다(437쪽). 19장 강해에서 도올은 재판 과정이 엄청나게 자세하고 드라마틱하며 등장하는 인간의 내면적 심리 묘사가 일정한 주제 속에서 명료하게 진행되고 있는 요한복음적 특성을 잘 포착하고 있다(443쪽).

20장 1-18절 강해에서 도올은 요한복음의 부활 이해를 잘 포착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부활이 단지 “무덤에서 일어남”이 아니요 이 지상에서의 물리적 출현도 아니다. 부활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라감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463쪽).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죽음 자체가 이미 부활이었다. 죽음 자체가 승리였고 생명이었고 다 이룸이었고 감동이었고 육의 극복이었고 성령의 현현이며 영생이었다. 따라서 육신으로써 부활한 모습에 마리아가 집착한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나에게 집착하지 말라. Do not cling to me(NEB). 살아난 예수의 몸에만 다시 우리가 집착하면 부활의 궁극적인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이다(463쪽).

20장 19-31절 강해에서 도올은 요한복음의 목적을 단 두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진정한 그리스도시다.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행위를 통해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기독교라는 종교는 단 이 두 마디로 이루어진 종교다. 이 밖의 무엇을 꾸며 말하든지 그것은 이단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로고스가 아니다”(469-470쪽)

21장 15-25절 강해에서 도올은 이 단락이 초대교회 상황과 관련 요한복음서의 저자가 베드로를 정통으로 하는 어떤 순수 혈통의 크리스천 커뮤니티의 사람이라는 역사적 사실도 암시한다고 말한다(479쪽). 이런 판단은 요한복음의 원독자가 에베소를 중심으로 한 헬라적 교양을 가진 지식 대중이었다는 강해서의 앞부분의 판단과 어떻게 조화되는지 궁금하다.

김회권 / 숭실대 인문대 기독교학과 교수
* 이 글은 제1회 인문과학연구소 포럼, '회권, 도올을 깨다'(2007년 4월 24일)에서 저자가 발제한 논문으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몇 차례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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