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책 느끼는 양심, 화인 맞은 양심
가책 느끼는 양심, 화인 맞은 양심
  • 허경조
  • 승인 2019.10.31 00: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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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요 8장 2절~9절)

수많은 목회자가 목소리를 높여 설교하는 ‘음행 중에 잡힌 여자’에 대한 본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음행 중에 잡힌 여자보다는 이 본문에 등장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싶다.

예수님이 성전에 등장하신 때는 유대인의 명절에 접어드는 시기였다. 로마군에게는 폭동이 빈발하는 위험한 시기로 긴장을 늦추지 않는 기간이다. 비상 경계를 위해 127km 정도 떨어진 가이사랴 군대까지 동원하여 성전 옆 안토니 요새에서 성전 광장의 유대인 동향을 면밀히 감시하는 중이었다.

예수님의 등장과 함께 몰려든 인파로 인해 이미 매섭게 변한 로마 군인의 눈초리를 배경으로, 저들은 득의만만하게 고발의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며 묻기를 마지아니하는 중이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하면 로마 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고함을 질러 로마 군병을 불러들일 것이며, 반대되는 답변을 하면 율법을 무시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경히 여긴다고 성전 안의 제사장들에게 바로 고발하려는 기세가 등등한 모습이다.

예수께서 즉답 대신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시니, 저들은 쾌재를 부르며 더욱 묻기를 마지아니하게 됐다. 이윽고 일어나신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 하셨다. 그러고는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계속 쓰셨다. 순간 노인부터 젊은이까지 양심에 가책을 느껴며 하나씩 하나씩 자리를 떠나갔다.

과연 이 짧은 장면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기세등등하던 저들을 순식간에 변화시킨 힘은 ‘양심(良心)’이었다. 이 낱말을 이해하는데 일반적인 국어 사전이나 철학 사전이 제공하는 정의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신 이에 대한 정확한 답을 찾느라 헤매다가 발견한 글의 일부를 인용한다.

“오전 내내 답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마지막에 읽기 시작한 헬라어 성경에서 답을 찾았다. 헬라어 성경에 나오는 ‘양심’은 수네이데시스(συνε δησι )이다. 의미는 ‘서로를 아는 것’(knowing together with)이다.

양심이라는 단어의 뜻이 ‘서로를 잘 아는 것’⋯.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비로소 사도 바울이 왜 하나님을 양심으로 섬긴다고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후 나는 성경 속에서 양심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들을 찾기 시작했다.

바로 다윗과 사도 바울이었다. 그들은 우리보다 양심의 의미를 훨씬 넓고 깊게 알고 있었다. 심지어 양심을 인격체처럼 대하고 있었다. 이것은 잠언 기자가 잠언 8장에서 ‘지혜’를 인격체처럼 표현하는 것과 같다.

‘양심’이란 단순히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인간의 품성을 나타내는 게 아니다. 양심은 하나님과 내가 서로 교제하게 도와주는 수단이다. 즉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음성의 통로다. 그래서 다윗은 ‘양심이 밤마다 나를 교훈하도다’라고 하였다.” (영어 말씀 묵상하는 쿡샘, 국영호 목사)

선한 양심(베전 3:16)이나 청결한 양심(딤후 1:3)은 우리를 교훈하여 가책을 느끼고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게 만든다.

이에 반하여 화인 맞은 양심(딤전 4:2)이 있다. 화인이 찍히면 살이 탄 부분은 상처가 남고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의 양심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너무나 손상되어 감각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에 대해 경고를 해 주거나 이의를 제기해도 수치심이나 죄책감 대신 외식할 방법을 찾고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말씀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최근에 일반 언론에 게재된 한 교회의 대표적 거짓말 일부를 인용한다. 지난 17일 대법원이 “서초구가 도로 지하에 사랑의교회 예배당 건축을 허가한 것이 재량권을 남용해 위법”이라는 최종 판결에 대한 교회 측 해명에 대한 기사 내용 중 일부이다.

사랑의교회는 해명 글을 통해 “서초구청이 2010년 발급한 도로점용 허가증에는 ‘도로점용 허가가 취소된다 해도 원상회복을 할 수 없거나, 원상회복하는 것이 부적당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라고 돼 있다”라고 밝혔다. 한마디로 허가 취소 시 사랑의교회는 원상회복할 의무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사랑의교회가 홈페이지에 올린 내용은 도로법 73조의 일반적 사항일 뿐인 것으로 확인됐다. 2010년 실제 서초구청이 사랑의교회에 발급한 도로점용 허가증에는 ‘허가가 취소되었을 때에는 허가받은 자의 부담으로 도로를 원상회복해야 한다. 원상회복 전까지는 변상금을 납부해야 한다’라고 명시돼 있다. 아울러 허가증에는 ‘허가받은 자는 도로의 점용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민ㆍ형사상의 모든 책임을 진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사랑의교회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명에서 이 부분을 생략했다. 대신 교회 측에 유리해 보이는 조항만 취사선택해 교인들에게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일보 10월 23일 자)

말세지말의 대표적인 전조 증상 중 하나가 양심의 가책을 받는 자가 적어지고 죄책감 없이 거짓말을 하는 자들은 늘어나는 것이라 감히 주장하고 싶다. 이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가책을 느끼는 모습을 바라보며 거짓말 대신 참말을 하려는 노력이 더욱 절실한 때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롬 9: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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