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체제와 사막의 교부들
신자유주의 체제와 사막의 교부들
  • 최태선 목사
  • 승인 2019.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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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훈이 주도하는 반정부 집회에 황교안과 나경원이 참석했다. 물론 반정부라는 그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이유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들의 다른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폭력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약자들에 대한 폭력이 자연스럽다. 최근 김용균씨의 비극이 바로 그것이다. 그 근본적 이유는 우리 사회가 신자유주의 체제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통제받지 않는 경우, 시장이 다시 말해 사회 체제가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소모품으로 여기는 파시슴적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는 과거에 없던 전혀 새로운 상황이다. 과거에는 나치와 같은 국가 위주의 파시즘이 유대인을 혐오하고 배제하여 대량살상이 이루어졌다면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무한 경쟁 속에서 약자들을 배제하고 그들에게 폭력을 가하여 눈에 안 보이게 대향살상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국가가 폭력을 사용하여 특정한 인종을 배제하고 사회를 통제하였다면 이제는 사회 자체가 폭력적으로 변한 것이다. 그것이 곳곳에서 폭력적인 혐오로 분출되고 있는 것을 우리가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것이 더 치명적인 이유는 인류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의 공동체성을 파괴하고 각자도생을 진리로 여기는 사회적 파편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위계와 서열을 질서로 인식하면서 자신보다 약한 자들을 억압하는 것을 당연하면서도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수저이론이 지배하고, 사회가 폭력적이 되고, 위계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적 파편화가 일반화되고 있다.

전광훈과 황교안과 나경원 같은 이들은 이러한 사회의 흐름에 자신도 모르게 편승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의 판단으로 그러한 행위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신자유주의 체제가 그들에게 강요하는 시대정신에 아무런 저항 없이 휩쓸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들을 나누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선 황교안과 나경원과 같은 정치가들은 민심을 헤아린다는 이유로 자신들로 모르게 신자유주의 체제에 휩쓸린 일반 대중의 흐름에 자신들도 모르게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그것이 약자들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죽음으로 몰아넣는지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것이다. 자신들이 그토록 주장하는 더 나은 사회, 더 많은 사람들의 행복과 더 나은 경제에 사실은 무비판적으로 역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신자유주의 체제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에 편승하고 있는 것이다.

전광훈의 경우는 더욱 치명적인데 그 이유는 사회를 폭력적으로 만들어 약자들을 대량살상으로 몰아넣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진면목을 드러내고 그러한 세상이 잘못된 세상임을 보여주어야 하는 평화의 종교인 기독교를 폭력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광훈이 보여주는 기독교에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은 오늘날 기독교가 철저히 세속화되어 세상보다 더 세상적인 세상의 하부구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전광훈이 믿는 기독교가 기독교가 맞는다면 그는 자신이 평화의 나라이어야 할 하나님 나라에 역행하는 반역자라는 자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반대의 길을 가면서 희희낙락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의 정체성이다. 그를 따르고 지지하는 사람이 그처럼 많다는 사실이 바로 오늘날 기독교의 큰 비극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박해의 종교이던 기독교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자 사막의 교부들이라는 새로운 사람들이 기독교 역사에 등장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살지 않는 사막으로 들어갔다. 사막에 들어간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작은 공동체를 이루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외따로 떨어진 동굴이나 버려진 폐허에서 살기도 했다. 고독 속에서 그들은 기도와 단식에 전념하였고, 성서묵상, 그리고 단순한 노동을 수행했다.

사막의 수행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한 것은 실제로 권력, 재산, 쾌락, 그리고 지위에 대한 추구라는 사회적 관습을 거부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세속적인 것”에 대한 부정이었다. 세속적인 것이란 실제보다 허상을, 존재하는 것보다 가지는 것을 더 선호하는 문화, 가치관들을 의미한다. 세상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세상의 가치관에 순응하는 삶을 거부한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가치관이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인식한 첫 번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단지 물질적 쾌락을 상대하지 않기 위하여, 또 자신들을 징벌하기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도피한 것이 아니라, 관습, 일상, 그리고 사회적 기대치의 굴레보다 더 깊고 풍요로운 실존에 “깨어있기 위하여” 사막으로 간 것이다.

나는 오늘날 기독교에 사막의 교부들과 같은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토마스 머튼이 말해준다.

“사막의 교부들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의 참다운 자아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하여 교부들은 가짜 자아, 형식적인 자아, ‘세상’ 속에서 사회적인 규약 아래 제조된 자아를 완전히 거부해야 했다. 그들은 알려져 있지 않은 또한 자유롭게 선택하는 하느님의 길을 찾았다. 그 길은 사람들이 앞서 그려놓은 길, 다른 이들로부터 전해 받은 길이 아니었다. 교부들은 어떤 다른 사람이 고정시켜 놓은 ‘주어진’ 하느님이 아니라, 그들 홀로 발견할 수 있는 하느님을 추구하였다.”

그렇다. 그들은 살아있는 것, 깨어있는 것을 배워간 사람들이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살아있고 깨어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런 사람들만이 신자유주의 체제로 인해 사회 자체가 폭력이 된 우리 시대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그렇지 않은 다른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자신들의 삶으로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질 폭력의 사태를 파악하고 있다. 복음이야말로 신자유주의라는 파시즘을 깨뜨리고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를 더 이야기하고 싶다. 사막의 교부들이 추구하던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이 추구하던 것이 무엇인가. 더 사려 깊게 살아가기 위하여, 구원에 이르는 더 좁은 길을 찾기 위하여, 주위의 문화에서 느끼는 무기력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생명의 원천에 닿기 위하여 등등의 여러 대답이 모두 가능하다. 그러나 더 놀라운 핵심적인 대답이 남아있다. 행복이다. 그렇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갈망하던 것은 행복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행복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행복을 이루어냈다.

이 시대의 깨어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사막의 교부들이 보여주고 이루어냈던 바로 그 행복을 재현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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