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신뢰 하락을 보는 클리셰 또는 데자뷰
개신교 신뢰 하락을 보는 클리셰 또는 데자뷰
  • 김기대
  • 승인 2010.12.30 15:28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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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중산층 구미에 맞추다 갈 길 잃은 개신교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이하 기윤실)가 의뢰한 여론 조사에서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는 17.6%로 3년 새 가장 낮은 수치로 나타났다. 그나마 비기독교인 중에서는 8.2%만이 신뢰한다고 했는데 나는 이 수치가 높게 나온 데 오히려 놀랐다. 비기독교인 중에 기독교에 대한 신뢰라는 것이 남아있기는 한 것인가?

이러한 현상에 대해 많은 분석이 나온다. 연세신학연구회의 3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나온 분석에 따르면 “원인은 무엇보다 리더인 목회자의 문제로서 세상의 한가운데로 나가지 않고,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고,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지 못한 데” 있다. (연세대 정종훈 교수)

또한 그는 한국 교회가 "부끄러운 현실에 대한 회개 때조차 무게중심을 회개에 두는 게 아니라 새로운 부흥에 두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윤실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교회 지도자들의 언행일치(38.8%), 타종교에 대한 관용(29.7%), 재정 사용의 투명화’(13.0%), 사회봉사(12.3%)를 개신교에 요구했다. 이와 함께 향후 한국 교회 신뢰도 제고를 위한 중요 사회적 활동 중 1순위는 ‘봉사 및 구제활동’(48.2%)이 꼽았다고 한다.

한국 개신교와 목회자의 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가? 분석조차 어제와 오늘 똑같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분석은 내가 그 연구회에 속했던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교회야 그렇다고 쳐도 분석과 평가는 달라져야 하는 것이 지성인의 몫이 아니던가? 이러한 분석은 항상 상투적이며(클리셰) 어디선가 본 듯하다(데자뷰).

또 다른 여론 조사를 보자. 지난 2010년 8월 시사저널에서 발표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인에는 1위 고 김수환 추기경 2위 정진석 추기경 3위 자승 스님이었으며 10위권 내에는 5위의 조용기 목사를 비롯해 이광선 목사 김삼환 목사가 포함되었을 뿐이다. 이 조사도 한국개신교가 외형적 성장에 비해 영향력이 약하므로 반성하자는 상투적 분석이 제기될 법했으나 문제를 제기하기에는 개신교쪽 인사들이 불교나 천주교의 인사들과 특색이 겹치지 않았다. 청렴, 지도력, 이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 포함되었기에 이 조사를 매개로 한국 교회의 영향력 하락을 이슈화시키지 못했다.

분명 오늘 한국 개신교는 문제다. 그런데 과연 문제의 중심에 목회자만 있는가? 나는 이 글에서 목회자를 변호하자는 생각이 없다. 한국 교회의 목회자는 분명 문제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상투적인 분석으로 한국 개신교는 신뢰 회복을 하지 못하고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먼저 상투적 분석들이 간과하는 부분을 보자. 목회자(모든 종교지도자들을 이 단어로 통칭하기로 한다)의 윤리 문제는 왜 유독 개신교에서만 그렇게 강조되는가? 불교에서 스님은 세 가지 보배중 하나로 귀의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매 예불 의식에 앞서 삼보 즉 부처님과 그 가르침과 스님에게 귀의 한다. 예불에 앞서 목회자는 나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고참이 하나님과 동격이라는 군대의 농담처럼 스님은 부처님과 동격이다.

천주교 사제는 아버지와 동격으로 나의 고백(고해성사)에 대해 사죄권까지 갖는다. 여기서 목회자는 대중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 즉 예외 상태에 속한 사람들이다. 칼 슈미트의 정치 신학적 입장을 적용해 보자면 이들은 예외 상태를 규정할 주권을 가진 사람들이고 바로 그 주권 때문에 역사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힘을 갖는다.

반면 개신교 목회자는 다르다. 특별한 지위를 부여 받은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 또는 아버지와 동격도 아니다. 그런데 개신교 평신도들은 목사에게 나와 다른 종교성(예외 상태)을 요구하며 동시에 세속의 법과 질서(예외가 없는 상태)를 따르라는 모순적 요구를 한다.

이런 현상이 심한 교회가 주로 자칭 개혁적인 교회들이다. 결국 이러한 교회들은 생각이 비슷한 사람이 보이는 근친적 교회로 전락하거나 목회자들이 지쳐서 떠나게 되고 교회는 영향력은커녕 생존에 급급하게 된다.

그 사이 영향력을 발휘하지 말아야 할 교회들이 성장한다. 이들 교회들은 주로 목회자의 리더십이 부정적인 형태로 강화된 교회다. 그런 점에서 개신교에서 목회자의 지위에 대한 재고가 없으면 신뢰도 회복을 향한 길은 요원해 보인다.

먼저 우리는 윤리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절차가 윤리인가? 도덕이 윤리인가? 바른 세계관이 윤리인가? 이 모든 것이 갖추어지면 거의 성인의 수준이겠지만 절차의 문제에 비켜 있는 타종교 목회자들과 비교하자면 개신교 지도자들은 불리한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좀 봐달라는 뜻이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순이 확대되어 보이는 구조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지난 2007년, 1987년 6월 항쟁 20주년을 맞으면서 사회과학계에서는 ‘1987년 이후 체제’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민주주의 수립이 가장 우선적 과제였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모든 에너지가 집중되었었다. 그 결과 우리는 20세기 식민지 경험을 가진 나라 중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이룬 거의 유일한 나라라는 귀한 자산을 쌓았다.

그런 절차적 민주주의는 절차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켰다. 다소 거친 속담의 인용이기는 하지만 "죽 쑤어서 개 준"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사회과학계는 민주주의에 천착하느라 놓쳐버린 그 무엇을 찾고 있다. 비단 이것은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1968년도 유럽을 뒤흔들었던 68혁명 이후 유럽의 사회와 의식은 끝 모르게 진보했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열풍이 한 바탕 휩쓸고 지나간 후 유럽 사회는 다시 한 번 고민에 빠졌다. 무한한 자유와 관용이 준 결과는 무엇이었나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세대 동안 동양 종교의 영향을 받은 개인적 명상이나 요가 같은 것들이 실천적 지식인들을 잠식하기 시작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에 싫증나서 이슬람의 가족주의나 권위주의에 귀의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계몽과 이성의 적으로 생각되던 기독교에 대한 철학적 재사유가 늘어난 것도 이런 것 때문이다. 바로 그 고민에 슬라보에 지젝이나 알랭 바디유 같은 인물들이 함께 하고 있다. 심지어는 나치에 부역한 적이 있던 칼 슈미트의 정치 신학에 대한 인기도 높아가고 있다. 이들은 주권과 예외 상태의 문제를 사유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개인의 선택이 절대선인가에 대해서 묻는다. 지난 해 서점가를 휩쓸었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도 참으로 씁쓸하게 이 문제를 묻고 대답은 못한 채로 책을 끝맺는다.

이러한 현상은 개신교가 안고 있는 고민과 겹쳐진다. 종교 중 가장 많은 자유가 보장된 개신교내에서 그 자유를 즐길 능력을 가진 대중들의 자유와 평등의 요구가 거세어지는 동안 정작 사회의 진보에 필요한 동력은 허튼 것들과 싸우느라 그 힘을 소진해 버렸다. 또한 우리가 함께 보호하고 지켜주어야 할 예외 상태와 주권은 허울 좋은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잠식되어 버렸다.

그 사이 자신들의 신앙 체계에서 자유를 귀찮아하는 보수주의 대중들은 그들의 교회를 성장시키는 ‘정치적으로 옳은’ 선택을 한다. 그 성장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막대한 재력으로 사회 구제도 많이 한다. 그러나 신뢰도는 떨어진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함께 떨어진 국격과 묘하게 겹쳐지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오늘 개신교가 신뢰도를 잃은 이유에는 이러한 세속에 노출된 구조적 한계가 있다.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다른 종교도 매 한가지다. 다만 우리는 노출되어 있고 분석가들은 그 구조적 차이를 알지 못하고 설왕설래하면서 오히려 신뢰 하락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기윤실 조사의 요구 사항을 보자. 투명한 재정 운용이 있는데 그것이 과연 개신교만큼 되는 곳이 있는가? 이명박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는 봉은사의 명진 스님이 유명해진 것은 불교 최초로 사찰 재정을 공개하기로 한 것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조계종단의 방침과 다른 것이어서 그는 재임에 실패한다. 주지 스님의 임기와 재정 공개가 종단에 의해 좌우되는데, 그것은 분명히 민주적이지 않은데 조계종단의 자승스님과 법정 스님과 명진 스님은 존경과 영향력을 다 갖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예결산 공동의회가 요식행위에 그쳐 버리기는 하지만 어쨌든 하지 않는 것보다는 절차적으로 민주적이지 않은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교회 분쟁이 많은 것도 개신교지만 뒤집어 보면 제도적으로 분쟁 자체가 봉쇄되어 있는 타종교와 비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타종교에 대한 관용의 문제를 보자. 불교는 무한한 공의 세계로 모든 것이 수렴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차별도 없고 관용도 없다. 천주교의 경우 폴 니터의 용어를 빌리자면 완성 모델로서 모든 다른 종교를 인정하되 궁극적인 구원의 완성은 기독교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다시 말해 다른 종교를 한 등급 아래로 보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타종교를 적대적으로 보는 개신교가 타종교의 권위를 더 인정해주는 것이 아닌가? 나와 상대가 되는 급으로 인정을 하는 것과 나와 상대가 안 되게 보는 것 중 누가 상대를 배려하는 것인가?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임을 인정하지만 분석가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지적하는 것이다. 또한 지금 구제 활동을 하는 기관 중 개신교만큼 활동을 많이 하는데가 어디 있는가?

그런 점에서 기윤실 조사보다는 <시사저널>의 조사에 나타난 대중들의 여론이 더 솔직하다. 그들이 종교 지도자들에게 바라는 것은 세속성이 아니라 영적 지도력이다. 고 김수환 추기경과 자승 스님 누구도 조용기 목사나 김삼환 목사만큼 사회 구제를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종교는 신뢰도가 높고 그들의 영향력은 목사들보다 높다.

개신교가 세속과 초월 사이에 방황하고 있는 동안 신뢰도는 하락하고 신뢰도 하락을 부채질한 인물들의 영향력은 막강해진다. 누구의 탓인가? 이중적 잣대를 요구하는 대중들과 어설픈 분석가들 때문이다. 그 사이에 끼어서 바른 목회를 고민하던 힘없는 이들은 목회에 지쳐가거나 생존에 급급해 한다. 어느 순간 대중들의 이성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넓은 문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그렇다면 왜 개신교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것은 소비자 중심의 시장주의 때문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타종교에 비해 가장 잘 이루어진 개신교의 절차적 민주주의다. 개신교는 천주교나 불교와 달리 제도적으로 평신도들의 권한이 가장 활발한 곳이다(얼마나 신뢰 받기 좋은 구조인가!).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교회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중산층 이상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한 조직이 건강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재정적 뒷받침이 필수적인데 이른바 교회 내 ‘개혁’세력들은 여기에 힘을 보태지 않는다. 결국 목회자는 중산층들이 듣기 좋아하는 설교에 집중한다. 신뢰도 하락의 첫 단추다.

그리고 교회의 중심 세력인 이들의 구미에 맞는 가벼운 봉사나 구제를 통해 그들에게 면죄부를 준다. 대중들이 경쟁사회 속에서 살아남으며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값을 대신하여 구제와 선교는 제물로 바쳐진다.

여기서 이들의 가슴을 찌를 사회 정의나 희생에 대한 메시지는 생략된다. 자연을 훼손하는 4대강을 비판하거나 전쟁을 부르는 세력들에 대해 쓴 소리라도 하게 되면 그 목회자는 졸지에 정치 목사가 된다.

신뢰도 회복은 교회가 선한 일을 하는 NGO와 경쟁하면서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개신교의 구조적 장점(또는 약점) 속에서 초월적 소리를 제대로 듣는 일이다. 이 일을 위해 목회자 평신도 할 것 없이 함께 고민하면서 ‘우리 개신교’를 잘 가꾸어 나가야 한다.

이제 분석에서 본 듯한 장면을 다시 보는 상투성은 싫다. 목회 현장에서 바쁜 목사로 하여금 자꾸 이러한 글을 쓰게 하지 말고 연구실에 있는 학자들의 공부 제대로 한 분석을 보고 싶다.

김기대 목사 / 평화의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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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a 2011-08-27 18:02:40
Thanks for sharnig. What a pleasure to read!

송영재 2011-01-16 09:25:51
김목사님 안녕하세요. 정말 통찰력있는 분석이라고 생각됩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쭈아 2011-01-02 17:31:20
상투적인 학자들의 분석-맞습니다.
대부분 학자들도 물량주의, 숫자놀음에 빠진 거대교회와 연결됩니다.
더불어 교수쯤되면 짭잘할것임.
서민대중의 삶을 산 예수의 마음을 교수들이 알기나 할까?
한국은 교수들을 너무 높게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