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횡단보다 모순을 택했다
아카데미, 횡단보다 모순을 택했다
  • 김기대 목사
  • 승인 2020.02.12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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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글로브 수상하고도 오스카 작품상은 놓친 영화 ‘1917’에 대한 조사(弔辭)
영화 1917은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아카데미에와 인연은 없었다 (영화 1917 스틸컷 이미지)
영화 1917은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아카데미와 인연은 없었다 (영화 1917 스틸컷 이미지)

[뉴스M = 김기대] 영화 ‘강철비’(감독 양우석)에 나오는 “남조선에는 좌우가 없고 상하만 있다”라는 말은 옳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그게 어디 한국만의 문제겠는가? 신자유주의 폐해로 인한 몸살은 전지구적인 현상이다.

계급모순을 다룬  2019년 두 개의 영화 중 ‘조커’(감독 토드 피닉스)는 92회 아카데미 주요 부문 중 남우주연상만 수상했지만 ‘기생충’(감독 봉준호)에게는 4개의 상이 돌아 갔다. 계급의 문제를 다루지만 두 영화는 결이 다르다. 어렵다고 많은 조롱을 받았지만 기생충에 대한 영화 평론가 이동진의 한줄평은  ‘명징’하게 와 닿는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 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라는 말만큼 기생충을 잘 표현한 평이 있을까 싶다.

‘기생충’은 상승을 욕망하다가 무너져 내린 가족의 이야기다. 그러나 아들(최우식)은 다시금 그 저택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헛된 꿈을 버리지 않는다. 그 시간 아버지(송강호)는 모두에게 잊혀진 채 지하의 어둠 속에 있다. ‘기생충’이 불편한 사람들은 영화가 계급 모순을 직시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상하의 문제는 그대로 놓아 두고 ‘을’들의 전쟁으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가족이 폭우속에서 자신의 반지하집으로 ‘하강’하던 날 그들은 ‘처연’하다. 계급 모순의 실체를 비켜갔다는 말이 설득력을 얻는 까닭이다. 

본인은 마르크스주의자로 불리기를 원했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로 부터는 외면당했던 루이 알튀세르는 모순에는 유산자와 무산자의 대립을 넘어서는 다층적인 면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일찍 공업화에 성공한 영국과 같은 나라에서 계급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러시아에서 먼저 일어난 사실이 알튀세르를 자극했다. 

봉준호 감독은 계급 모순을 유산/무산의 틀 보다는 냄새, 가족, 학벌, 욕망과 같은 다층적인 틀로 접근한다.   

반면 일을 마치고 긴 계단을 오를 때 조커의 어깨는 축 처져 있지만 계단을 내려 올  때 그는 흥겹게 춤을 춘다. 그에게 지하는 어두운 곳이 아니라 지하철의 첫 응징 사건처럼 껍질을 벗는 공간이다. 기생충의 ‘지하’와는 다른 개념이다.   

계급 모순에 문제 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조커’가 더 자극적으로 다가올 지 모른다. 그러나 ‘기생충’은 우화의 틀을 쓴 현실이다. ‘을’들끼리의 싸움, 낙수효과를 강조하는 언론의 선동, 상하를 막론하고 상승을 욕망하는게 현실아닌가?  사실주의적 영화를 선호하는 깐느가 황금 종려상을 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여준다. 프랑스 사람들 보다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이상적이어서 그런가? 베니스 영화제에선 ‘조커’가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그런 점에서 기생충의 쾌거는 두루 회자되는 수상 외적인 요소(CJ의 영화 홍보에 들었을 엄청난 투자, 아카데미에 도발한 봉준호 감독의 ‘로컬’ 발언, 한국의 거대한 영화시장을 겨냥한 헐리우드의 전략 등등)를 일단 없는 것으로 치면 헐리우드의 가장 안전한, 동시에 '역사상 최초'라는 수식을 고려한 선택 덕분이다.  ‘조커’의 선동은 그들에게 다소 불편하다. ‘조커’는 고담시를 통해 국가의 책임을 묻는 반면 ‘기생충’은 개인의 욕망 문제로 치환한다. ‘기생충’에서 사건이 발생했던 집에 독일인이 이사와도 모순적 구조가 변함없듯이 현재의 모순의 기저에는 국가보다 개인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누가 옳은가를 떠나서 사회와 국가의 책임을 묻는 영화는 그 동안 많았기 때문에 ‘기생충’은 그만큼 신선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조커’는 ‘배트맨’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기시감이 약점으로 작용했다. ‘택시 드라이버’(감독 마틴 스콜세지)에 대한 오마주도 지나치게 강조되었다. 호야킨 피닉스가 남우 주연상을 받으면서 남긴 소감으로 아쉬움을 대신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은 서로를 지지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실수로 서로를 지워버리기보다는 성장을 위해 서로를 도와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교육하고 구원을 위해 서로를 안내해야 할 때입니다."

2016년 ‘레버넌트’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지구 온난화 발언 이후 최고의 수상 소감으로 회자되고 있다. 호야킨 피닉스의 수상 소감에 가장 어울리는 영화는 골든글로브에서는 영화 부문 작품상을 수상했지만 아카데미에서는 후보에 그쳐버린 ‘1917’(감독 샘 멘데스)이다.  

횡단의 영화 1917

1917년은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난 해였고 혁명이 있기전 그 해 3월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폐위당했다. 그가 황후와 라스푸틴에게 정치를 맡겨두고 독일과의 전쟁에 직접 참전한 것이 폐위의 결정적 계기였다.  황제가 직접 참여하는 애국심 마케팅으로 자신에게 부정적인 여론을 역전시키려던 니콜라이 2세의 의도는 독일전 참패로 무산되었다.

영화 ‘1917’은 이런 세계사적 변혁기에 독일과 영국이 대치하던 상황에서 일어난 이야기다. 

영국군 지휘부가 차려진 참호에서 복무하던 블레이크와 스코필드는 블레이크의 형이 속해있는 데본즈   2대대가 함정에 빠졌고, 통신이 두절된 상태라 공격 중단 명령을 담은 편지를 전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렇지 않으면 데본즈대대 1600명의 병사가 몰살당할 위험에 처한다. 블레이크가 지도를 잘 보기도 하지만 형의 목숨이 달린 명령이라 지휘부는 그에게 책임을 맡겼고 스코필드는 영문도 모른채 목숨을 건 전령 임무에 함께 한다.   

잘 싸우던 독일군의 갑작스런 후퇴에 사기가 오른 데본즈 2대대는 독일군을 끝까지 쫓아 궤멸시키려는 작전을 세웠다. 하지만 독일군의 후퇴는 영국군을 유인하려는 매우 ‘삼국지’스러운 책략이었다. 이제 두 사람은  14km 떨어진 데본즈 2대대에 다음 날 아침까지 도착해서 명령서를 전달해야 한다.  

공격 명령서가 아니라 공격을 중지시키는 명령서,  전쟁의 무의미함을 보여주는 장치다. 모든 힘을 얻는 절대반지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절대 반지를 버리는 과정을 그려낸  ‘로드 오브 링’과 맥을 같이 한다.    

곳곳에 매복해 있을 독일군을 피해 하루밤 사이에 데본즈 2대대까지 가야하는 두 전령 병사는 여러 위험에 노출된다. 영화는 전쟁영화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치열한 전투장면도 많지 않다. 그나마 간혹 있는 전투 장면에도 독일군은 보이지 않는다.  장엄한 전우애도 없다. 때문에 영화가 지루할 것 같지만, 게다가 거의 모든 과정을 롱테이크로 촬영한 과정이 지루함을 더할 것 같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지한다. 음악의 힘이 컸는데 77회 골든 글로브 상에서 드라마 부문 작품상과 감독상만 수상하고 음악상은 후보에는 올랐지만 수상하지 못했다.  

1600명의 죽음을 막는 것보다 형의 안위가 걱정되는 블레이크와 이 위험한 임무에 굳이 자신을 선택한 블레이크(블레이크도 설명을 듣기 전까지 어떤 임무인지 모르기는 했다)에게 섭섭한 스코필드는 어쨌든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길을 나선다. 전쟁에서 부모를 잃은 갓난 아기를 보살피는 여인, 비행기 추락사고로 부상을 입은 독일병사, 수많은 영국군과 독일군의 시체들과 그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쥐떼들의 장면이 전쟁의 덧없음을 묻는다. 독일군 조종사는 그를 돕는 블레이크를 칼로 죽이고 자신도 스코필드의 총에 맞아 죽는다. 이 장면에 ‘왜’는 없다. 부상당한 독일 조종사는 자신을 돌보는 블레이크를 ‘왜’ 죽였을까? 전쟁이 그렇다. 포화 속에서 아무런 의미없이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이 전쟁이다. 

무엇보다도 ‘1917’의 가장 큰 주제는 ‘횡단’이다. 종(縱 앞)으로 연출된 장면은 독일군이 사용하다가 버리고 간 지하 참호, 겹겹이 쌓인 시체를 밟고 구덩이를 빠져나오는 장면처럼 어둡다. 반면 횡(옆)으로 연출된 부분은 포화에도 불구하고 밝다.  블레이크와 스코필드가 명령을 받으러 가는 첫 장면부터 명령을 받은 후 참호를 떠나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아군과의 만남까지  전쟁영화에서는 보기드문 횡단이다. 무엇보다 압권은 영화 말미에 이미 공격이 시작된, 즉 함정에 빠져들어 진격하는 영국군 대열을 가로 질러 옆으로 뛰는 스코필드의 모습이다. 그는 공격과 후퇴, 승리와 패배만이 있는 전쟁터에서 총없이 옆으로 뛴다. 빨리 지휘관을 찾아 전투를 중단시켜야 하기 때문에 그는 돌격 병사들에게 걸려 넘어지면서 포화 속을 횡단한다.

들뢰즈는 생성 -커뮤니케이션이란 말로 횡단의 철학을 강조한다. 생성 커뮤니케이션은 차이들을 보존하면서 서로 전염되는 것으로서 처음에는 부분(리좀)에서 출발하지만 공통적인 것을 생산한다. 기존의 커뮤니케이션이 강요였다면 이것은 생성이다. 처음에는 지휘관의 명령(강요)으로 출발했지만 두 병사에게는 애국심도 뭐도 없다. 형을 살려야 하는 마음과 얼떨결에 전령으로 뽑힌 두 사람의 인간적인 고뇌밖에 없다. 그들은 하룻 밤 사이에 의미없는 전쟁의 잔해를 목격하면서 공통적인 것(전쟁의 중지)으로 수렴되어 간다.

그런 점에서 ‘기생충’이 알튀세르적이라면 ‘1917’은 들뢰즈적이다. 들뢰즈가 이상이라면 알튀세르는 현실이다. 현실이 이상을 이겼다. ‘1917’은 ‘기생충’이라는 너무 강적을 만났다. ‘조커’에게 배트맨 시리즈의 기시감이 있다면 ‘1917’에는 ‘덩케르크’의 기시감이 있는 것도 수상실패의 요인이 되었을 듯 하다.  

이 글은 ‘기생충’에 대한 헌사(獻辭)인 동시에 ‘1917’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실패에 대한 조사 (弔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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