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신천지, 내부고발에 얼마나 버틸까
위기의 신천지, 내부고발에 얼마나 버틸까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0.02.12 13: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남희의 폭로, 과연 이단이라 지적하는 우리는 괜찮은가
세계평화만국대회에서 연설하는 김남희 (신천지홈페이지)
세계평화만국대회에서 연설하는 김남희 (신천지홈페이지)

김남희라는 여자가 나타났다. 신천지 이만희 교주의 내연녀였던 그녀는 누구보다 신천지를 잘 아는 사람이다. 이만희를 등에 엎고 2인자의 자리까지 올라갔던 그녀가 신천지와 이만희의 진실을 폭로하며 신천지가 거대한 사기극임을 세상에 폭로했다.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이단은 아무리 길어도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한다. 교주가 죽거나 신천지의 경우와 같이 결정적인 내부 고발자가 나타나면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도 여전히 이단들이 소멸되지는 않지만 그들이 이단이라는 사실은 이미 만천하에 공개된 상태이고 몇몇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남아 명맥을 유지한다. 소멸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들에게도 개혁이라는 것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는 늘 이런 이단들은 기독교의 큰 적 혹은 치명적인 적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 생명이 짧아 오래지 않아 그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만이 이단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말이 좀 이상하지만 이단인 이단보다 훨씬 더 악하고 해로운 존재들이 정통 속에 늘 존재해왔다. 정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단보다 더 노골적으로 사단에게 충성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늘 있어왔다는 것이 기독교 역사가 증언하는 실재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기독교 지식과 조금만 상충되는 것이 눈에 띠면 이단의 혐의를 뒤집어씌운다.

사실 나는 조직신학을 전공하는 사람과는 가급적 교제를 피한다. 그것이 현명한 길이다. 나와 같이 비능력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얼마 안가 그런 사람들의 이단 혐의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사랑의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결코 이성적이지 않다. 합리적이지도 않다. 맹목적일 때도 많다. 다만 분명한 것은 다른 이들의 아픔과 고통에 민감하다는 사실뿐이다. 교리에 집착하는 사람은 결코 사랑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 경험을 통해 배우게된 내 생각이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랑을 한 번 깊이 묵상해보라. 사랑 없이도 예언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 사랑 없이도 모든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사랑 없이도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이 없으면 그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 자신의 모든 소유를 나누어주더라도 자기 몸을 불사르도록 내어주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꽝이다. 교리는 아마도 모든 지식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지식뿐만이 아니다. 영적인 능력도, 믿음도, 헌신과 자기희생도 사랑이 없으면 이생의 자랑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신앙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 외에 다름이 아니다.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바울의 말에 따라 율법이 폐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율법은 폐해진 것이 아니라 완성되었다. 그 완성이 무엇인가. 사랑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새 계명이 무엇인가. 당신이 말씀하신 율법의 완성이 아닌가. 그런데 그냥 사랑이 아니라 서로 사랑해야 하는 사랑이다. 다시 말해 원 사이드 사랑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양방향의 사랑이다. 짝사랑이나 희생도 사랑이다. 그러나 양방향의 사랑은 그런 어느 한 쪽의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들고 어려운 사랑이다. 그리고 그 양방향의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며 제자들이 지향해야 할 신적 사랑이다.

초기교회에 기독교를 알기 위해 기독교 안으로 위장전입 했던 플리니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로마의 총독이었다. 로마의 골칫거리인 기독교를 뿌리째 말살하기 위해 그는 기독교 안으로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황제에게 자신이 본 것을 보고했다. 그것이 플리니의 보고서라는 문서로 전해지고 있다. 물론 진짜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그에게 부정적인 것이 보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피를 먹는다거나 시체를 먹는다거나 무분별하게 근친상간을 한다는 내용을 보고한다. 성찬식과 지하무덤이 이루어낸 콜라보레이션이다. 또 서로를 자매와 형제로 부르고 대하는 모습을 피상적으로 본 그리스도인 이해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부정적인 사실들을 모두 열거한 후에 마지막으로 우리가 잊지 못할 한 마디 말을 남긴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
이 말이 내게는 다르게 들린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이 예수의 제자임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것은 적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잠입했던 플리니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어떤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는가. 대부분 삼위일체가 기조가 되는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다. 나는 가급적 그리스도인들이 삼위일체를 하나님의 존재방식으로 이해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교리화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크신 분이 아니신가. 그 하나님을 무엇에라도 가두는 한 그 하나님은 더 이상 본래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율법의 완성이 양방향의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이단의 척도라는 말이다.

오늘날 교회를 보고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은 없다. 감히 말하지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분은 오늘부터 매일 사랑장을 읽으며 사랑에 대해 묵상해보시기를 원한다.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끝이 아니다.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 똑같은 사랑으로 자신을 사랑해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 이단의 판정 기준은 교리가 아니라 사랑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사랑,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관건이 되어야 한다. 물론 그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욕망의 존재인 인간에게 애초에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사랑에 도전할 때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이며, 그것이 바로 이단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이다.

나는 이단인가. 정통인 교회 소속이라서 괜찮은가. 내게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사랑이 있는가로 그것을 판단하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