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과연 폭력적인가?'
'하나님은 과연 폭력적인가?'
  • 브라이언 맥클라렌
  • 승인 2011.01.10 15:09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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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성경의 폭력은 신의 본성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나는 최근에 피트(가명)이라 불리는 선교사이자 목사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내용은 이랬다.

▲ 브라이언 맥클라렌 목사의 최신 저서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온다>.
"나는 당신이 쓴 대부분의 글을 다 읽었습니다.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온다(A New Kind of Christianity)>도 읽었지요. 당신이 쓴 대부분의 생각에 저도 동의합니다만, 당신이 하나님의 폭력성과 그로 인한 (자체로 폭력적인) 십자가를 통한 의인화의 필요성을 배제함으로써 복음주의권의 논쟁에 오히려 방해가 됐지요."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교회에 대해서 참 할 말이 많아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할 때 성경적 예를 잘 들지 않더군요. 그러니 교회에서 당신의 이야기를 신중하게 들으려 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구약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 아래 이루어진 피범벅 세상이라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그것에 대한 궁극적 표현이지요. 이 모든 것들이 오롯이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는 존재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오해에서 하나님을 구하고자 우리가 이 폭력이 난무하는 성경의 현실을 완화하려고 노력하는 순간 우리는 십자가의 힘 역시 약화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서사가 약화됐지요."

당신에겐 어느 편이 더 충격적인가? 내가 하나님의 폭력성에 의문을 표하는 쪽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폭력성을 변호하려는 피트 씨 쪽인가? 모두들 한 편의 이야기에 충격을 받았다는데 한 표를 걸겠다.

왜 이 질문이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난 9.11 사태를 예로 꼽고 싶다. 9.11 사태 이후 우리는 매일의 일상에서 종교적 폭력이라는 이슈에 매여 살아오고 있다. 이라크에서 테러리스트가 "알라후 아크바!(신은 위대하다)"를 외치면서 험비를 폭파시키는 장면을 담은 비디오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또 하루는 유명한 텔레반젤리스트(방송을 통해 복음을 전도하는 목회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날려버릴지어다"라고 외치는 걸 듣게 된다. 또 다른 날 우리는 신문에서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집을 파괴했다는 기사를 보게 된다. 이스라엘군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세운다. 4000년 전에 하셨다는 그 약속을. 그 다음날이 되면 또 다른 텔레반젤리스트가 방송에서 이스라엘군의 행동을 옹호하며 이스라엘과 합동으로 이란과 전쟁하라고 부추기는 장면이 나온다.

무수한 것들이 위기에 빠져있다. 폭력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라면 책 한 권 분량의 토론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폭력의 사전적 정의란 무엇인가. 폭력 없는 힘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모든 종류의 강압은 반드시 폭력을 수반하는가. 과연 잔인함을 배제한 '국부적(surgical) 폭력'이라는 것은 존재 가능한가. 폭력이라는 것의 정의 자체에 폭력을 위반하려는 의도가 들어있는가. 공격적 폭력과 방어적 폭력에 도덕적 차이는 존재하는가. 만약 존재한다면 경계선은 어디인가.

하나님과 폭력의 관계에 대한 4가지 관점

폭력이라는 것을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부상, 손괘, 죽음을 일으킬 목적으로 쓰는 힘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의 폭력에 대한 의문에 다음의 4가지 대응 원칙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토론에 나가 부시 대통령이 테러리스트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날려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故 제리 폴웰 목사.
1. 하나님은 폭력적이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채로 만들어졌으니 우리 역시 폭력을 정치적 대화의 매체 중 하나로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폭력을 쓰도록 명받기도 한다.

2. 하나님은 폭력적이다. 하지만 그 성스러운 길에 죄 많은 인간은 참여할 수 없다. 그래서 일부 예외를 제외하곤 인간에게는 폭력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의 선택이나 부름이나 명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명령 아래서 폭력을 쓸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

3. 하나님은 폭력적이지 않다. 인간의 폭력은 언제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빚어진 인간이 창조 질서를 위배하는 행위다. 존재하는 모든 폭력은 재앙이며 후회스러운 일로 절대 정당화 될 수 없다.

4. 하나님은 폭력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폭력이라도 금지되며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몇몇 친구들은 4번을 택했다. 나는 4번대로 살기를 열망하지만 3번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 내 친구들은 실망을 했다. 피트 씨는 아마 나와는 정반대일 것이다. 1번이 맞는 방식이고 2번까지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고를 것이라고 내가 판단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그가 언급한 "성경 속의 빈번한 폭력"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당히 폭력적인" 십자가 때문이다.

나처럼 "신은 폭력적이다"라고 말하는 자체가 신성모독으로 느껴지는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피트 씨를 대응해야할까? 내가 성경을 거부하나? 내가 피터 씨의 말처럼 십자가를 축소하려거나 그 힘을 줄이려고 하는 사람인가? 내가 지금 비기독교인들에게 더 그럴싸해 보이는 신을 만들고 있는 중이가?

답변을 하기 전에 우선 먼저 확인하고 넘어갈 것이 한 가지 있다. 만약 우리 기독교인들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민주 시민의 입장에서 대화를 가질 수 있다면, 바꾸어 말하자면 육체, 언어폭력을 일체 배제하고 토론을 할 수 있다면 서로의 입장 차이를 좁히던 못 좁히던 상관없이 우리는 바른 방향으로 토론을 진행해 갈 수 있을 것이다.

▲ 9.11 현장. (출처 : 위키페디아)
기독교인으로 폭력을 배제하고 토론하는 훈련은 단지 여기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유대교인, 무슬림, 힌두교인, 무신론자, 다른 이웃들이 흥미롭게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우리의 대답에 따라 그들은 우리에 대한 기대치를 달리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오로지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항을 만족하는 조건에서 폭력을 쓸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들 나름대로 우리에 행동을 예측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모든 폭력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위반이요 비극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우리에게서 다른 행동을 기대할 것이다. 우리의 대답에 따라 그들은 우리의 복음을 더 좋은 것으로 혹은 더 나쁜 것으로 판단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육체적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폭력을 쓴다면 그 집의 아이들은 비폭력적 복음을 나쁜 소식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반면,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줄이고 없애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폭력을 옹호하는 복음을 나쁜 소식으로 여길 것이다.

나는 폭력에 대해서는 좌고우면할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나는 자라며 성경이 용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배웠다. 그래서 나는 용서를 받는 것에 초점을 맞춰왔다. 때리는 것은 거짓말이나 도둑질과 마찬가지로 죄였다. 나는 물론 죄를 피하고 싶었다. 문제가 전쟁 등으로 옮겨가면, 난 그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라고 여겼다. 대통령도 있고. 휴거의 그날이 오면 난 그저 하늘로 들려 올라가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그날이 오면 전쟁, 전쟁의 소문 따위는 다 지구상에 남겨두고 올라갈 것이라 믿고 있었다. 내가 처음 "평화주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난 그게 참으로 비현실적이고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는 이런 식의 상상을 계속한 것은 아니다. 지난 10년간 나는 하나님과 폭력을 한 문장 안에 두는 것에 대해 씨름해왔다. 피트 씨의 고민에 대해 지금부터 대화를 해보려 한다.

성경 예시의 과잉

▲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노아의 방주.
피트 씨 말대로 성경에는 많은 폭력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릴 적 읽은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귀여운 동물들의 보트 타기 놀이 정도로 묘사가 된다. 잠시만 숨을 고르고 그 당시를 상상해보자. 차오르는 물을 피해 한 손에는 아기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큰 아들을 이끌고 절벽을 필사적으로 오르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큰 아들을 놓치고 그 아들이 물에 빠진다. 다음 순간에는 안고 있던 아이를 놓치고 그 아이마저 물에 빠져버린다. 그리고는 그녀마저 물에 빠져버린다. 이런 식의 비극이 수백 만 번 일어난다고 생각해보라.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이것은 "자연 재해"도 아니다. 이 참극은 하나님이 한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남자,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끔찍한 방법으로 쓸려나갔다. 노아의 가족만 예외였다. 만약 당신이 이 이야기를 좋아 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면 그 고민을 조금 더 밀고 나가보길 권한다. 하나님 또한 홍수를 내리고 나서 좋아해야 할지 어쩔지 고민하셨다. 하나님도 바로 다른 생각을 하셨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언약하시지 않았나.

만약 문제가 되는 이야기가 이거 하나라면 별 문제가 아니라고 하겠지만, 사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은 성경에 층층이 쌓여있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족속 학살은 전범 재판에 회부될만한 일이었다. 우리는 삼손을 중동의 테러리스트라고 부를 수도 있고, 요즘 같은 세상이었으면 다윗은 부패한 군벌쯤으로 불렸을 것이다. 시편에 등장하는 아이를 바위에 메어치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자.

많은 선한 기독교인들이 이와 같은 성경 본문을 대하는 만족스러운 방법을 찾아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이들은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우리는 이것보다 더 한 벌도 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라고 말한다. 나도 그런 대답에 만족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내가 교회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러한 논리가 가져오는 사회적 결과물들을 보게 되자 내 생각은 바뀌었다.

비기독교인들을 만족시키고자 이런 식으로 사고를 전환한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인으로 목사로 내 자신의 마음에 부담이 있었던 것이다. 정말 하나님의 눈이 참새에게 가 있었을까? 하나님은 모두에게 다 좋은 하나님이셨을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에 동정심을 가지고 있는 그런 분이셨을까? 하나님은 우리가 정말 칼을 두드려 보습을 만들길 원하셨을까? 만약 그걸 원하셨다면 언제 하길 원하셨을까? 아니면 그냥 그 말씀을 비현실적이고 비실용적인 한 편의 시로 받아들여야하나? 우리가 전쟁에 대해서 더 이상 알지 않아도 될 날을 하나님께서 예비하고 계신건가, 아니면 그저 공상인가?

점차로 나는 성경에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화해, 공감 등도 아주 많은 분량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나는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할 처지에 놓였다. 아니면 한 쪽을 다른 한 쪽에 복속시켜야했다. 점차 나의 이런 갈등은 성경이 무엇을 위해 존재했었나, 성경은 어떻게 읽혀져야 하나에 대한 의문으로 번져갔다. 이 말은 결국 내가 성경을 영감과 권위의 법률로 받아들이다 점차 성경을 영감과 권위의 도서관으로 생각하며 읽게 됐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내 생각의 틀을 부수고 새로 만드는 데는 많은 시간과 고통이 수반됐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나는 다른 결론을 먼저 냈었다. 성경을 읽다가 어려운 부분이 나오면 나는 그것을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나 루터나 칼뱅이나 교황 등에게 묻기 전에 예수에게 직접 가져갔다.

만약 예수가 가장 높이 그리고 가장 완벽하게 신을 드러내는 존재라면, 만약 예수가 진실로 말씀(logos)이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이자 하나님 본성의 대표자라면, 만약 그렇다면, 이런 성경 말씀의 어려운 부분을 해석함에 있어서 예수의 인생과 가르침이 결정적 요소가 된다고 봤다. 만약 예수의 말대로 성경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라면, 마틴 루터가 말했듯이 성경이 세상에 예수를 드러내는 말구유라면, "의심이 들거든, 예수와 상의하라"라는 말이 훌륭한 조언이라고 생각한다.

▲ 총을 들고 있는 예수.
그리고 믿기 어려운 사실은 예수가 아무도 죽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누구도 비하할 의도는 없으나,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바울도 모하메드도 그렇다고 말은 못하지 않는가. 예수는 누구도 때린 적이 없다. 그는 누구도 미워한 적도 없다. 그는 그가 말한 대로 행했다. 복수 대신 화해를, 잔인함 대신 친절함을, 침입하기보다는 침입 당하길, 무기를 사용해서 분쟁을 해결하기보다는 사랑을 통해서 분쟁 대상 변화시키기를, 폭력 대신 용기와 온정을 품은 저항을, 무기를 들기보다는 십자가에 손을 내밀기를 한 사람이 바로 예수였다.

예수 희생의 상징, 십자가

이러한 이야기들은 결국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주제로 모아진다. 최근 신학적으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십자가의 징벌적 대속이라는 이론이 결국은 하나님의 폭력적 면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예수를 처벌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만약 이런 관점을 거부한다면 당신은 정통파 기독교인이 되길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의 희생에 근거한 대속이라는 보편적 설교 주제 자체가 성경적이냐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여전히 대속이라는 개념은 유지하려고 하지만 징벌적이라는 부분은 거부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때 하나님은 어디 있었다고 여기는가?

내가 이 주제와 씨름해 오면서 난 하나의 질문에 초점을 맞추려고 했다. 당신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던 날 하나님이 어디에 있었다고 묵상하는가?

만약 하나님이 예수를 고문하고 죽였던 로마 병정들과 함께 있었다고 본다면, 더 이야기해 볼 것도 없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던 날의 하나님은 폭력적이었다. 십자가는 결국 하나님 폭력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무엇보다도 희생당하는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본다면 어떤가? 예수가 인성을 가지고 사람들의 죄를 껴안고 그 죄를 용서하고 있던 그 순간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십자가의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두 이야기 모두 만만찮은 결과를 가져온다. 내가 보기엔 전자를 받아들인다면 성경 전체의 서사를 뒤집을만한 가정이라고 본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자유를 찾는 노예들과 함께하기보다는 파라오와 함께 머물렀을 것이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간통으로 잡혀온 여자와 함께하기보다는 그 여자에게 돌을 던지려고 모여들었던 군중과 함께 머물렀을 것이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이방인들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던 바울과 함께하기보다는 법전을 손에 들고 율법 준수에 목숨을 건 유대순혈주의자들과 함께 머물렀을 것이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십자가에 매달리기보다는 십자가 위에 올라서 못질을 했을 것이다. 매우 편치 않은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 <소저너스> 1월호 표지.
후자의 경우는 폭력의 존재 근거를 뒤집는다. 게다가 자신들의 안전과 영향력과 행복을 위해 폭력에 의존하는 사람들도 뒤집어버리게 된다. 하나님은 노예상들 대신 노예들과 함께 머문다. 하나님은 고통을 주는 존재가 아닌 고통을 받는 존재 중에 머문다. 하나님은 땅을 빼앗는 제국주의자들이 아닌 피난민들 사이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침을 뱉는 자가 아닌 맞고 있는 자들 중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 또한 굉장히 다른 방향에서 불편할 이야기일 수 있다. 아주 다른 십자가의 모습이다.

나도 피트 씨의 나이에는 피트 씨와 생각이 비슷했다. 지금 나는 피트 씨가 올 수 없는 혹은 오고 싶지 않은 그런 곳으로 옮겨와 있다. 나는 그를 무력으로 항복시킬 생각도 없다. 그러니 피트 씨처럼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며 비폭력적인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다른 이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 하나다. 지금 이 순간 극단적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인들이 폭력적인 하나님의 이름 아래 무엇을 하고 있고 계획하고 있는지 부디 고민해 봐 달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나 왔었는지를 돌아 봐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그리고 부탁하건데 만약 당신이 당신의 관점을 바꿀 수 없다면 그 생각을 추한 실천으로 옮기지만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글·브라이언 맥클라렌 목사 / 번역·김성회 기자

<타임>지가 선정한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자 25'인 중 한 사람인 브라이언 맥클라렌 목사는 이머징 교회 운동의 초기 대표 주자로 꼽힌다. 전직 영문학 교수였던 그는 새로운 목회 시작을 위한 상담과 전세계 목회 네트워크 건설에 매진하고 있으며 <소저너스>의 이사를 비롯, 레드레터크리스찬의 발기인도 맡았다. 주요 저서로는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온다>, <저 건너편의 교회>, <예수님의 숨겨진 매시지> 등이 있다.

Used with permission from Sojourners (www.sojo.net).
브라이언 맥클라렌 목사와 <소저너스>의 동의를 얻어 번역·게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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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A J A 9 9 . ⓒⓞⓜ 2011-02-04 17:56:31
H A J A 9 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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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A J A 9 9 . ⓒⓞⓜ 2011-02-04 17:5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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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okybear 2011-01-20 11:20:57
좋은글 감사합니다. 사랑의 가르침을 전파한 예수로부터 시작한 기독교와 폭력에 관계는 다같이 적어도 한번 고뇌해봐야 할 이슈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셉 2011-01-11 11:17:42
김성회 기자님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하구요, 퍼갑니다.
박지호 기자님, 김성회 기자님 항상 생각하고 있구요.
수고하시는 다른 기자님들께도 우리 주님의 은총이 늘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손나라 2011-01-11 11:12:19
무력을 포기하시고 무력해지신 예수님... 마음에 와닿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