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지, 비난과 사랑의 이름으로
신천지, 비난과 사랑의 이름으로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0.02.28 10:4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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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보다 귀한 사랑으로 신천지 교인을 대한다면, 뭔가 달라질까

“주님이 살아 계신가 봐”
어제 아내와 나눈 대화이다. 코로나를 통해 신천지가 드러났다. 참 신기한 일이 아닌가. 그토록 비밀스럽게 행동하던 그들의 행적이 동선 파악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물론 지금은 코로나 확산 저지가 목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행적 자체를 문제 삼고 있지는 않다. 어쨌든 그들은 은밀함이 최대의 무기인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그들의 실체와 인원수가 드러났다.

더구나 그런 신천지와의 커넥션을 가졌던 사람들 또한 드러나고 있으니 이것도 생각지 않았던 수확이다. 적의 적은 우군이라는 정치판의 실체가 이들의 커넥션을 통해 드러난 것 또한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한 귀중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정치의 목적이 집권이며 선거 승리라 할지라도 이번 조국 사태에서도 보았듯이 최소한의 도덕적인 요구마저 묵살된다면 결코 성숙한 사회로의 진입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절대 다수의 서울대생들이 문재인 대통령의 탄핵을 찬성한다.’는 천지일보의 기사를 퍼 나르는 교회 카톡방들이 즐비하다. 할 말이 없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비극이다. 어떻게 이렇게 신천지 때문에 온 나라가 곤욕을 치르고 있는데도 신천지의 기관지인 천지일보의 기사를 교회 카톡방에 나를 수 있는가. 이러니 신천지가 기존의 교회들을 접수하러 추수꾼을 보내도 별로 할 말이 없어진다. 

사실 나는 신천지에 관한 발언 하나 때문에 오랜 친구목사 하나를 잃었다. 대화중에 신천지 때문에 인근 교회들이 난리가 났다는 말을 듣고 그런 신천지 교인들을 사랑으로 감동시켜 신천지를 떠나게 할 수 있는 교회는 없냐는 진담이 섞인 농담을 했는데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었던 그 목사가 나와의 교제를 단절했다. 시간이 지난 후 몇 번 연락을 시도해보았지만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십 수 년 간 이어졌던 그 목사와의 관계는 끊어졌다.

내 잘못이다. 하지만 나는 교회가 정말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지금은 그 생각이 더욱 강화되었다. 나는 정말로 그런 일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니 교회에서는 그런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해보라. 노예가 주인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는가. 특히 그 주인이 황제의 친척들이었다면 그것이 가능했겠는가. 그런데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그들의 사랑이, 그들의 삶이 주인들을 감동시킨 것이 아닌가. 단순한 감동을 넘어 그들을 자매와 형제로 만든 것이 아닌가. 어떻게 황제의 친척인 당대의 권력가들이며 특권층이었던 주인들을 변화시켜 그들이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과 함께 누리던 모든 권리들이 사라지고 사회로부터 추방당하거나 매장될 수도 있는 그런 위험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는가. 그야말로 사랑이 생명보다 강하다는 것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입증해낸 것이 아닌가. 

오늘날의 기독교는 그때의 기독교가 아닌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었던 생명보다 강한 그 사랑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사랑으로 신천지 신도들을 변화시킨다는 내 말이 정말 헛소리인가. 지금 생각해도 나는 가슴이 먹먹하다. 신천지는 그렇게 고사한 기독교라는 죽은 나무에 붙어 자연스럽게 자라난 독버섯이 아닐까.

내가 신천지가 드러난 것을 보고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정설로 진지하게 말하지 않고 농담으로 말한 것은, 생명보다 강한 사랑을 말하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환대는 상대방을 가리지 않는 사랑이다. 신천지라고 해서 그 상대방이 될 수 없다고 단정을 지어서는 안 된다. 내가 할 일은 생명보다 강한 그 사랑을 그들에게 주고, 그런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내 삶으로 입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래 전 우리 교회에 이단에 속했던 한 자매가 있었다. 그 자매는 겉으로는 항상 명랑한 척 했지만 늘 불안한 상태였다. 이단의 특성은 강력한 통제다. 매일 매순간 지령을 내려 무언가를 하도록 만든다. 그것도 경쟁 속에서. 그런데 거기에서 벗어나니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라 불안해진 것이다. 아무리 성서를 읽으라고 하고, 아무리 시간을 내어 그 불안한 마음을 없애 주려해도 그것은 불가능했다. 이미 통제에 익숙해진 그녀는 통제 없이 살 수 있는 능력 자체가 말살되었다. 결국 몇 년 뒤 그녀는 교회를 떠났다. 

나는 신천지에 다닌 신도들도 그 자매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미 자유를 가장 끔찍한 형벌로 인식하는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부모의 사랑도 부인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사랑으로 감동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그런 불가능을 위해 일하는 사람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받아야 하는 세상의 미움은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오늘 신천지를 혐오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라는 어떤 분의 글을 읽었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글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상식에 속하는 생각이다. 그리스도인의 사고는 상식을 넘어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희생에 이르러야 한다. 그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것도 날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농담으로 아내에게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혐오와 배제, 정죄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내 깊은 곳에 계시는 성령께서 가르쳐주시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처럼 어려움에 처한 신천지 신도들을 긍휼로 대해야 한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방법이 그것 외에는 없지 않은가. 미안하다. 오늘 내 글을 읽으시고 화가 나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당연히 나도 신천지가 밉다. 그런데 그 신천지가 내게 사랑을 실증하라고 말한다. 주님이 나를 주목하시는 것 같다.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주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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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현 2020-02-29 11:51:02
목사님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