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서사 붕괴했다면 복음의 핵심으로 돌아가야"
"거대서사 붕괴했다면 복음의 핵심으로 돌아가야"
  • 이상현 목사
  • 승인 2020.04.27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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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상현 목사, 장준식 목사 글 '거대서사가 붕괴한 시대, 기독교신학을 재구성하라'를 읽고
이상현 벤쿠버밀알선교단 단장 (사진 페이스북)
이상현 벤쿠버밀알선교단 단장 (사진 페이스북)

[기고=이상현 벤쿠버밀알선교단장] 장준식 목사가 쓴 “거대서사가 붕괴한 시대, 기독교신학을 재구성하라”(2020.3.11) 는 글을 흥미를 갖고 읽었다.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기독교는 거대서사(grand narrative)의 종교다. 그런데 지금은 거대서사가 더 이상 통하는 시대가 아니다. 서구에서 기독교가 몰락하고 있는 이유도 시대가 바뀐데 있다. 새 시대는 postmodernism 시대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기독교의 거대서사 아래 자신과 일상을 희생하며 교회에 모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가장 행복을 느끼는 시간은 집에서 드라마를 보며 쉬거나 밥을 먹는 시간이다. 개인과 소소한 일상을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는 “기독교가 계속 성경 내러티브를 거대서사 측면에서만 다룬다면, 기독교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보인다”고 진단한다. 

그가 이런 주장을 펴는 근거로 제시하는 건 Clive Hamilton과 그의 책 ‘Defiant Earth’다. 해밀턴을 의지하여, 그가 하고싶은 말은 이것이다. “해밀턴이 주장하고 있는대로, 기독교는 성경 내러티브를 거대서사에서 ‘쿵’하고 지구의 담론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동안 사람들에게 ‘하늘’만 쳐다보며 살도록 했다면, 이제는 사람들에게 땅의 일 (기후변화, 불평등 문제 등)에 관심을 품도록 성경 내러티브를 다시 해석하고 선포하는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대한 이해를 통해, 더 나아가 우리가 들어선 세계가 인류세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하면서, 기독교신학과 메시지를 재구성한다면, 거대서사가 붕괴되어 영적으로 허덕이는 이 시대사람들에게 충분히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생각은 다르다. 기독교가 최초로 거대서사를 말했을 때, (우리가 그 시대를 편의상 헬라-로마시대라고 부른다면), 그 시대에도 사람들의 관심은 소확행이었다. 그 시대 많은 사람들이 노예였고, 로마제국의 중산층 시민이라 하더라도 하루하루 먹고사는 게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로마사회의 노예의 형편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과 다른 형편이었다고 하더라도) 노예의 가장 큰 희망이 무엇이었겠나? 욕 안 먹고, 하루 일 잘 마치고, 편안히 쉬는 것 아니었을까? 이것은 중산층 등 다른 이들도 다르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어느 시대나 시대의 특징은 있고 그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거지만, 그 얼굴과 모양이 다른 것이지 인간과 사회의 본질적인 내용은 달라지는 게 아니다. 

그때 사람들이 제국에 열광했다면, 오늘의 사람들도 제국에 열광한다. 우리에게 크고작은 제국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때 사람들이 새로운 것에 열광했다면, 오늘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오늘날도 신들이 많고, 그때도 신들이 많았다. 기독교의 거대서사는 무관심과 반대를 받기도 하였지만,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 시대에 받아들여졌다. 앞서 소개한 글쓴 이는 “거대서사가 붕괴한 시대의 사람들은 불안과 두려움을 더 크게 느끼며, 삶의 목표를 상실한 것 같은 허탈감을 갖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더 거대서사를 갈망한다. 그리고 이 지점을 파고들어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는 거대서사를 만들어낼 때, 사람들은 열광한다”고 말하고, 그 예로 “신천지의 이만희와 신옥주의 타작마당과 피지 이주”를 들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오늘날도 기독교의 거대서사는 얼마든지 의미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서구사회에서 기독교가 약화된 것은, 물론 여러 이유들을 제시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교회가 기독교의 거대서사를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대에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기독교가 약세로 돌아선 것은 글쓴 이가 주장하는 대로 시대가 포스트모더니즘이고, 인류세 시대로 들어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핵심적인 원인은 교회가 기독교의 거대서사를 놓쳤기 때문이다. 원래의 기독교 거대서사가 말하는(말해준) 생명, 희망, 능력, 설렘, 상상력, 아름다움을 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글쓴 이는 기독교의 거대서사를 사람들에게 ‘하늘’만 쳐다보고 살도록 하는 것으로 말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내러티브가 땅의 일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이야기로 이해하는 듯하다. 실제로 교회가 그런 모습을 모였던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의 원래의 담론인 것이 아니라는 것도 사실이다. 

기독교 거대서사는 다른 말로 하면, 기독교복음이다. 복음은 창조로부터 구속에 이르는 기쁘고 복된 이야기이며, 하늘에서 이룬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복음이 전해졌을 때, 교회가 생겨났다. 다시 말하면, 이 복음이 전해지면, 생겨나는 것이 교회인 것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이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이 전해지면, 다른 교회가 생겨난다. 다른 복음이 말해지면, 다른 생명이 출현하고 그 다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아닌 생명이다. 그건 빛이 아니며, 생명이 아니다. 그건 또다시 어둠이며, 죽음인 것이다. 현대시대와 사회에서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다른 담론을 끌어오는 게 아니다. 기독교의 거대담론을 바꾸어야 하는 것도, 작게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기독교의 거대서사,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말하는 일이다. 외부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외부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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