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 진정한 바이러스는 이기심
코로나 시대, 진정한 바이러스는 이기심
  • Young S. Kwon
  • 승인 2020.05.14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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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석 목사 칼럼 "이기적 인간과 이기적 바이러스의 세기적 대결, 최종 승자는 과연?"
권영석 목사
권영석 목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COVID 19)로 말미암아 보건 위생적 위기와 더불어 경제적 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맞물려 있으면서도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있어서,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묘수를 찾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빠른 전파 속도와 높은 치사율과 함께 달포 넘게 모든 생산 활동이 중단되다시피 하면서 온 지구인이 죽음의 공포는 물론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까지 겹쳐서 사상 유례없는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1~2차 세계 대전이나 경제 공황(恐慌)만 해도 이 정도로 팬데믹하지는 않았는데, 바야흐로 지구화 시대에 발맞추어 등장한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지구적 염병으로 번지는 가운데 인류는 우왕좌왕하고 있는 리더십의 한계와 부재를 절감하며 속수무책 상태에서 그야말로 대공황(恐惶)에 빠져들 것이 예상됩니다.

그러나 문제를 단순화해 보자면, 유기화학/생화학적 존재인 인간은 어차피 다른 유기체들과 공생 관계가 불가피할 수밖에 없어서 여러 가지 세균이나 바이러스와 더불어 이런저런 상호작용을 하는 가운데 도움을 받기도 하고, 또 항체를 형성하여 저항과 투쟁을 하기도 하면서 한세상(cycle of organic life)을 살아왔으며 또 앞으로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예전 같으면 그저 풍토병처럼 지나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행이 자유롭고 왕래와 교역이 빈번해진 지구화 시대에는 질병의 유행도 세계화에 발맞추어 '진화'했다 하겠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급속히 확산한 곳이 소위 G-20 국가들인 것만 보아도 이번 바이러스는 결국 사람이 옮기는 것이며 따라서 사람의 왕래를 제한하면 전파를 막을 수 있다는 계산 하에서 격리 전략(shelter-in-place) 또는 봉쇄 전략(lock-down)을 통해 차단과 거리 두기를 뒤늦게나마 시행하느라 온 세상이 다 야단법석입니다.

신천지 사태나 이태원 사태는 다 이런 차단 전략과 거리 두기 전략의 실패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말도 없고 생각도 없지만, 사람이 서로 왕래하고 접촉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차별 없이 옮겨 다니며 기생하기를 좋아하는 바이러스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혹시"를 좋아하고 또 기대도 하지만, 바이러스는 "혹시"보다는 "역시"를 선호하며 100% 예외 없이 그 존재감을 묵묵히 드러내고 있던 셈입니다.

그러다 보니 오프라인 활동을 철저히 통제하는 것이 그나마 유일한 대책인지라 꼼짝없이 갇혀 지내는 것이 처음에는 오랜만의 한가로움을 맛보는 새로운 경험이었겠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갑갑증은 고사하고 경제적인 위기감이 서서히 고조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virtual reality가 유용하고 편리한 임시적인 대체물일 수는 있겠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reality가 먼저 있고 그에 대한 보조 장치 내지 촉매 역할을 하는 수단에 불과한 만큼, 그야말로 소는 누가 키우며 농사는 누가 지을 것입니까? 아마존(amazon.com)의 물동량이 평소보다 25%가 늘어났다지만, 농장에서 아무도 작물을 재배하지 않고 또 아무도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대체 유통이란 게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뭐가 있어야 배달하더라도 할 게 아니겠습니까?

해결의 실마리는 결국 인간이 쥐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경제적 위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그저 화폐 수입이 없는 문제가 아니라 의식주의 모든 문제를 물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이 독자적으로 생존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제 문제를 해결하자니 방역이 막아서고, 방역을 해결하자니 경제가 막아서는 이런 막다른 처지에서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생활 방역'이란 이름으로 적당히 미화할 수는 있겠으나 연일 각 주와 지자체마다 하는 브리핑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은 아마도 뾰족한 대안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해결의 실마리는 결국 인간이 쥐고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알아서 어느 정도 선에서 자족하여 증식을 중단할 리도 만무하겠고, 그렇다고 인간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해 적당히 물러날 리도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바이러스의 이기적 생존 본능을 탓할 수는 없기에 바이러스를 혐오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문제는 바이러스의 이런 비이성적 속성을 알게 된 인간들이 그 속성을 고려하여 이성적으로 움직이면 될 문제입니다.

비근한 예로 '코로나'란 명칭을 붙인 까닭이 바이러스의 표면에 있는 가시 형태의 모양이 마치 왕관(크라운)처럼 보이기 때문이라는데, 우리의 육안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웬만한 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는 아주 미세한 바이러스지만 재미있게도 비눗물로 씻어낼 경우 이 '비늘'(코로나)이 떨어져 나가 감염력을 상실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해서 손만 잘 씻어도, 또 서로 거리 두기를 하여 바이러스를 포함하고 있는 비말이 우리 안면의 개구부를 통해 점막에 안착하지 못하도록 차단하기만 해도 감염력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인간의 이성은 바이러스의 이성을 압도적으로 능가하지만, 인간의 이기심이 그 탁월한 이성을 도리어 무력화시키고 마비시킴으로써 자신도 감염되고 남도 감염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 어리석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악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둘 다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점에서 이기적 인간은 이기적 바이러스보다 훨씬 더 어리석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뻔한 이치(바이러스의 속성에 대한 과학적 발견/지식은 이제 우리의 상식이 되었다 하겠습니다)를 무시하면서까지 자신의 이기적 욕구를 채워야 하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문제는 그 결과로 야기하는 엄청난 대가는 본인만이 아니라 옆에 있는 모든 이들이 함께 부담해야 하는 것이 전염병의 특징이 아니겠습니까? 본인의 소탐대실은 어리석음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이겠지만, 지역사회 전체에 끼치는 희생을 생각하면 악하다는 비난을 받는 것이 정당할 것입니다. 구상권(求償權)까지 요구할 수 있도록 한 행정명령은 바로 이런 정당성에 기반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어리석고도 악한 인간이 결국 문제 해결을 가로막고 있는 장본인인 셈입니다.

말하자면, "과학적 사회, 비과학적 인간"(scientific society, nonscientific human)이란 역설이 현대인을 묘사하기에 딱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첨단 과학을 발전시켜서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의 속성은 물론 그 염기서열까지 알아낸 인간이 정작 그 속성을 뻔히 알면서도 스스로 그 지식에 역행하여 행동하고 있으니, 이래서야 과학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상식과 합리 나아가서 도덕과 윤리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자기도 살고 타인도 죽지 않도록 하는 원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자기도 죽고 타인도 죽이는 길로 굳이 가고자 하는 인간, 인간의 이기심이 이렇게까지 열정적이라면, 이는 도를 넘은 것입니다. 어리석고도 악한 인간이 결국 문제 해결을 가로막고 있는 장본인인 셈입니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의 도움을 서로 주고받아야 생존할 수 있는 의존적인 존재이며, 자신의 생명체 역시 물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연 과학 곧 생물화학의 원리와 규칙을 무시하게 되면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과학적/객관적 상식을 발견한 인간 자신의 손으로 그 상식을 뭉개버리고 있으니, 야만도 이런 야만이 없다 해야 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불의 성질이 어떠함을 알면서도 마른 섶을 지고 그리로 달려드는 격이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도 인간을 어리석게 만든 것입니까? 이번 이태원 사태는 신천지 사태와 달리 무슨 종교적 이데올로기와 결탁한 요행심이 작동했던 것도 아니고 인간의 일반적인 이기심이 과학적 진리보다 도리어 요행을 선택하도록 한 사례라는 점에서 더욱더 어리석고 악한 이기적 인간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이성이 없는 바이러스는 본래가 합리 외적인 존재이기에 비과학적으로 움직인다고 해도(과학적 인간들이 '돌연변이'라고 부르는 경우) 비난할 수 없겠지만, 과학적 인간이 비과학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무엇으로 정당화할 수 있겠습니까? 바이러스는 자기 혼자만 예외가 될 것으로 결코 기대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만, 인간은 자기 혼자만은 예외가 될 것을 기대하고 또 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니, 일면 인간이 바이러스보다 더욱더 바보스럽고 악한 것은 아닐까 하는 궤변이 그저 지나치다고만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해서 바이러스 전쟁에서 인간이 승리하기란 슬픈 일이지만 절대 쉽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유일한 단서/예외가 있다면, 인간이 자신은 물론 인접(隣接)한 동류 인간들을 지키고 살리기 위해 그동안 축적한 과학적 지식을 좇아서 그 요구대로 철저히 복종하기로 결단하고 단단히 다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요행심이나 사행심은 과학 이후 시대는 물론 과학 이전 시대에도 제대로 작동된 적이 없지 않습니까? 과학 이전 시대를 살던 선조들이 페스트를 물리쳐달라고 기도하기 위해 열심히 모였던 기도회가 도리어 페스트를 더욱 확산하는 계기로 귀결되었던 산 교훈을 지금과 같은 첨단 과학 시대에 다시 반복할 필요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더더구나 잠시 잠깐의 오락과 여흥을 위해 불을 보듯 뻔한 비과학적/비상식적 행동을 하여 자멸은 물론 공멸의 무서운 결과를 자초할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기적 바이러스가 문제가 아니라 역시 이기적 인간이 문제입니다. 문제는 지식/과학의 부족이 아니라 태도의 부족입니다.

비과학적 시대에도 소수의 과학적 개인이 세상을 구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면, 오늘과 같은 첨단 과학 시대에 과학적 리더십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바이러스 전쟁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물론 첨단 과학 문명을 자랑하는 지금도 비과학적 개인과 리더십은 세상은커녕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기적 바이러스가 문제가 아니라 역시 이기적 인간이 문제입니다. 문제는 지식/과학의 부족이 아니라 태도의 부족입니다. 신체적 건강(physical health)도 경제적 건강(financial health)도 도덕적 건강 없이는 보증할 수 없습니다. 과학적 지식이나 사회과학적 데이터도 비과학적 인간/리더의 손에서는 무용지물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다 인간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했는데, 결국 인간의 욕심과 탐욕이 바이러스 전쟁의 최대 걸림돌인 셈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또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있는 이기적인 사행심과 요행심을 먼저 털어내야겠다는 다짐으로 승전(勝戰)의 기쁜 소식을 기다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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