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이드 사건을 보며...선을 행하지 않는 죄"
"플로이드 사건을 보며...선을 행하지 않는 죄"
  • 뉴스M 편집부
  • 승인 2020.06.08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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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플로이드 사태 한인 교계 반응 2] 엘에이 선한 청지기교회 송병주 목사 기고
미국 시민들이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길거리에 벽화와 화환을 두고 애도하고 있다. (사진=작가 Munshots)
시민들이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길거리에 벽화와 화환을 두고 애도하고 있다. (사진=작가 Munshots)

트라우마가 트라우마를 만날 때

[뉴스M=송병주 목사]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가혹행위로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미국 전역에 저항이 불꽃처럼 일어났습니다. 한인 1세대들과 대화를 나누어 봐도 이것은 살인이고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런 잘못을 바로잡는 일과 protest가 시작되는 일은 거리를 두고 마음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1992년의 폭동의 쓴 뿌리가 그 속에 깊게 배여 있기 때문입니다.

베버리힐스를 지키기 위해 포기한 곳, 아니 베버리힐즈를 지키기 위해 백인들에게 이용당한 곳이 된 상처가 있습니다. 흑인들이 백인들에게 풀지 못한 분노를 쏟아 놓은 곳이 된 상처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가슴에 할킨 설움과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던 기억은 머리보다 몸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흑인들의 트라우마와 한국인들의 트라우마가 충돌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거대담론적 인종차별에 대한 동일한 인식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기억하는 트라우마가 마음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지금은 흑인의 트라우마와 한인의 트라우마가 부딪히는 자리를 트라우마와 트라우마가 만나는 자리로 바꾸어 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깊은 상처가 부딪히면 더 큰 고통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그 깊은 상처가 함께 만나면 더 큰 회복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인들의 깊게 박힌 트라우마를 내러티브로 나누기 시작하고, 그 트라우마가 예수의 스티그마(흔적)가 되게 해야 합니다.

새로운 내러티브를 시작할 때

오랫동안 우리의 내러티브에는 미움과 혐오의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이제는 나쁜 흑인보다 더 많은 좋은 흑인을 말하고, 나쁜 흑인보다 아픈 흑인을 말하며, 함께 이야기하고 치유하는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트라우마를 스티그마로 바꾸어가는 1.5세 사역자의 눈물을 봅니다.

“제 마음에 여전히 엄마에게도 말 못 하고 울었던 상처가 있습니다. 학교 가기 정말 힘들었습니다. 불타버린 코리아타운을 보고 억울하고 분노로 울었던 상처가 있습니다. 겨누어진 총구에 서늘했던 몸서리를 잊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인종차별의 큰 그림을 알지만, 속내는 두려움과 미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얼마나 그들도 힘들었을까… 내 상처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게 사람인지라, 머리로 알지만 헤아리기 참 어렵더군요. 그래서 흑인의 죽음보다 약탈의 두려움에 더 분노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에 George Floyd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그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며 참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약탈의 근원적인 해결은 인종차별이 없어지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다른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평화 시위를 촉구해야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가야 한다 싶습니다. 그것이 내 트라우마를 이기는 길이라고 믿어요.”

미국 일리노이주와 미주리주에서 ‘서울 타코’란 이름의 아시안·멕시칸 퓨전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재미교포 데이비드 최 씨는 지난달 31일 저녁 식당이 약탈당한 사실과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내 식당의 모든 것들은 대체 가능하다. 하지만 흑인들의 생명은 대체할 수 없다.” 상처를 넘어가는 치유자의 새로운 내러티브가 트라우마를 스티그마로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강요할 수 없는 것을 알기에

하지만, 이런 내러티브를 말할 때도 여전히 조심스럽습니다. 이 또한 강요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미담이 아직 그 고통을 가진 사람에게 강요된 화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No Justice No Peace!”가 외쳐지는 곳에 한 한인 어른이 “난 No Peace No Justice야!”를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속에 가득한 아픔을 훈수하듯 극복하라고 말하긴 쉽지 않았습니다.

공적 영역에서 폭력이 최후의 수단으로서 사회적 메시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견해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최소 영역의 동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후의 수단으로서 폭력이 사용되려면, "최후의 수단인가?"는 질문에 합의해야 합니다.

설사 최후의 수단으로 받아들여진다 할지라도 ”누구에게 사용할 것인가?"는 더 어렵습니다. 공적 대상이 아닌 무관한 일반인으로서 "왜 내가 그 대상이 되었는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한인 자영업 미국 전역에서 100여 곳이 약탈의 고통을 당한 지금, 트라우마를 스티그마가 되게 하라고 훈수하듯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탁하고 싶습니다. 평화로운 시위를 부탁합니다. 우리는 시위대와 약탈자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고 평화 시위가 정착되고 있음을 봅니다. 억울한 소수자가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공권력은 평화적인 시위를 막는 데 노력하지 말고 약탈을 막는데 수고해주십시오. 지금 공권력은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약탈을 막고, 오히려 수정헌법 1조가 지켜지도록 평화 시위를 보장하고 지켜주십시오. 약탈은 방조하고 평화 시위는 자극하는 방법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위자와 약탈자를 구별해야 합니다. 틈타는 약탈자들로 인해 또 다른 왜곡이 일어나면 안 됩니다. 이제 정말 끝내야 할 일을 다시 미루지 않게 해야 합니다. 가족들과 친구들을 위해 맛있는 고기를 준비해 두면, 사랑하는 가족들만 모이는 게 아니라 파리도 끓는 법입니다. 그렇다고 그 고기를 준비한 것을 탓할 수 없고, 그 고기에 파리약을 뿌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한이 한을 낳고 상처가 또 다른 상처를 낳는 자리에, 누군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억울한 결단’을 해야 한다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억울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다음 세대를 위해서입니다. 부모의 트라우마가 대물림되게 하지 말고 아이들에게 인종차별 없는 세상을 대물림하기 위해서 전환점을 만들어야 합니다.

선을 저지르지 않은 죄

약 4:17을 생각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야고보는 죄에 대한 다른 관점을 제공합니다. “범죄를 저질러서 죄인이 아니라 선을 저지르지 않아서 죄인이다”며 독특하게 도전합니다. “죄를 저질러서 죄인이 아니라, 선을 저지르지 않아서 죄인이 된다” 여기서 복음과 율법주의의 갈림길이 나옵니다.

우리는 the commission of crime 범죄 곧 미워하고 죽이고 왕따시키는 죄만 안 지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sins of omission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 곧 사랑하고 용서하고 보호해주고 지켜 주지 않는 것을 죄로 여기십니다. 전자는 율법주의고, 후자는 복음의 원리입니다.

나는 저 배를 침몰시키지 않았다 생각하는데, 그 모든 부조리를 바로 잡는 일을 돕지 않는 죄를 묻고 계십니다. 강도 만난 이웃이 있는데 그냥 지나간 것이 죄로 여기십니다. 직장 동료가 성희롱하고 있는데 옆에서 내일 아니라고 모른 척한 것이 죄라는 말입니다.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합니다.

악을 저지르지 않아서 괜찮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선을 저지르지 않은 죄”를 도전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인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인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이었다.”(History will have to record that the greatest tragedy of this period of social transition was not the strident clamor of the bad people, but the appalling silence of the good people.)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링컨 기념관 앞에서 I have a dream을 외친지 반세기가 훌쩍 넘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는 감동이 마음에 남아 있지만, “Mama! I can’t breathe” 하며 몰아쉬던 형제의 거친 숨이 제 호흡을 붙듭니다. 그가 마지막 부른 '엄마'로 인해 마음이 찢어집니다. 이제 선을 저지르지 않은 죄를 벗고 침묵의 폭력을 벗어야 합니다. 이럴 때 침묵은 또 다른 폭력입니다.

저도 꿈을 가져봅니다. 코리아타운 거리에서 폭동에 참여한 African American의 후예와 폭동의 피해자인 Korean American의 후예가 함께 손을 맞잡고 어깨동무하며 걷는 모습을 보는 꿈 말입니다. 숨 막힐 것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숨결이 긴 호흡으로 거리를 따라 바람처럼 흘러가길 소망합니다. 더 이상의 한숨은 그치고 함께 한숨을 결 따라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는 날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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