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인종주의, 눈먼 영혼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
[칼럼] 인종주의, 눈먼 영혼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
  • 권건우 목사
  • 승인 2020.06.11 07: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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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M=권건우 목사] 우리는 현재 미국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의 죽음에 항거하는 시위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 및 2 차 대유행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이들이 길거리로 쏟아져나왔다는 사실은 시민들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현재 상황이 얼마나 시급한지를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코넬 웨스트(Cornel West)가 말하듯이, 이 사건은 어쩌면 “미국이라는 사회적 실험의 실패”(America as a failed social experiment)를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중요한 도화선이 된 것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관 데릭 쇼빈(Derrick Shauvin)의 무릎에 눌려 “숨을 쉴 수가 없다”(I can’t breathe)며 살라달라고 애원하다가 천천히 질식해가던 8 분 정도의 동영상이었습니다. 물론 경찰의 잔혹한 폭력에 항의하던 시민들에 의해 촬영된 이 동영상이, 한편으론 일종의 ‘스너프 필름’(snuff film)에 가까운 형태로 선정적인 방식으로 미디어에 의해 전시되고 소비되는 것이 과연 옳은가라는 윤리적인 질문도 제기됩니다. 저 역시 이 영상을 보는 것에 대한 한참의 망설임과 두려움 끝에 결국 보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흑인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는 미국 경찰 가해자의 행태가 이번 사태를 촉발했다 (사진=작가 프랭키 코르도바 제공)
흑인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는 미국 경찰 가해자의 행태가 이번 사태를 촉발했다 (사진=작가 프랭키 코르도바 제공)

이 영상에서 충격적인 것은 사실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백주대낮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무릎에 목이 짓눌려 숨을 빼앗기고 있는 장면 자체가 가진 충격성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살인자가 바로 공무를 집행하는 경찰관이라는 사실 또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거니와, 피해자인 플로이드가 미국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경찰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온 흑인 남성이라는 사실 역시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이 영상을 보며, “인종차별이 여전히 남아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상에서 가장 저의 눈길을 끈 것은, 그리고 마음에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은 것은 오히려 플로이드를 누르고 있는 쇼빈의 무심한 혹은 태연한 눈빛이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증오에 사로잡혀 린칭을 가하는 살인자의 형상이라기보다는, 그저 할 일을 하고 있는 냉담한 공무원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영상을 보고 나서 저는 2014 년 미주리 주 퍼거슨에서 비무장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경찰관에 의해 총격을 받아 살해된 또다른 흑인 남성 마이클 브라운(Michael Brown)을 떠올렸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를 살해한 백인 경찰관 대런 윌슨(Darren Wilson)을, 그리고 그가 스스로를 변호하면서 법정에서 했다고 알려진 유명한 말을 떠올렸습니다. “그것은 악마처럼 보여요”(It looks like a demon). 이 진술은 피해자를 인간이 아닌 ‘그것’ 또는 ‘악마’로 묘사하면서 비인간화시킵니다(dehumanize). 백인인 윌슨에게 흑인 남성은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윌슨의 이 진술에서 최근 플로이드를 숨지게 한, 그러나 그 이전부터 지속되었던 흑인에 대한 경찰 폭력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쇼빈의 눈에서, 그의 인식체계에서 흑인 남성 플로이드는 동일한 존엄성과 권리를 가진 동료 시민이자 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데에 문제의 근원이 있습니다. 
 
인종주의라는 눈먼 영혼 
 
2년전 작고한 미국의 철학자 스탠리 카벨(Stanley Cavell)은 그의 주저 <이성의 주장>(The Claim of Reason, 1979)에서 이런 문장을 남겼습니다.  
 
“때로는 여성 또는 어린이 또는 흑인 또는 범죄자가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정의를 향한 요청이다.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인식의 변화(a change of perception), 보는 방식의 수정(a modification of seeing)이 요청될 수 있다” (Stanley Cavell, The Claim of Reason: Wittgenstein, Skepticism, Morality, and Tragedy, 372) 
 
카벨에 따르면, 우리는 많은 경우 타인의 고통에 적절하게 반응하는 데에 실패합니다. 예컨대, 우리는 길을 가다 만나는 수많은 홈리스들의 고통에, 도움을 구하는 그들의 요청에 매번 같은 정도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합니다. 종종 그들의 “헐벗은 얼굴”(레비나스)을 피하고 외면합니다. 그런데 카벨에게 있어서 이런 실패보다 더 본질적인 실패는 타인의 고통을 자기 자신의 고통와 같은 종류(the same kind)으로 인식하지(perceive) 못하는 실패입니다.

이러한 실패를 카벨은 “눈먼 영혼의 상태”(soul blindness)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실패의 대표적인 사례로 그가 제시하는 것이 노예들의 고통에 대한 노예소유주의 태도입니다. 노예소유주는 자신이 소유물(property)로 소유하고 있는 노예들이 겪고 있는 심리적, 물리적 고통을 자신이 인간으로서 겪는 고통과 같은 종류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 아니, 그렇게 하기를 거부합니다. 이 경우, 노예소유주는 노예를 보고 있지만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를 동일한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앞서 말한 두 명의 백인 경찰관인 쇼빈과 윌슨은 어쩌면 별로 공통점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윌슨은 그가 진술한 것처럼 자신이 살해한 브라운을 정말 위협적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가 느낀 ‘주관적인’ 위협이 그의 살인에 정당성을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는 습관화되고 내면화된 인종적 편견이 낳은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반면 쇼빈의 경우, 그는 사실상 어떤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에 응했던 한 사람을 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의 표면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저는 두 명의 백인 경찰관을 (그리고 수많은 백인들을) 공통적으로 묶고 있는 것이 바로 카벨이 말한 “눈먼 영혼의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흑인을 자신들과 동류로, 같은 존엄성과 권리를 가진 인간으로 인식하지(recognize 또는 acknowledge) 못했습니다. 흑인의 인간성을 부인하는 그들의 습관화된, 내재화된 인종주의는 흑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희생자들은 비인간(non-human) 또는 인간 이하(sub-human)의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손쉽게 존엄성과 권리를 박탈할 수 있는 존재, 백주대낮에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죽어갈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인간과는 다른 무엇’이기에, 그들의 고통과 간절한 요청은 무심하게 거절되어도 무방합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동일한 상황이 백인 남성에게 일어날 수 있다고 상상하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철학자 카벨이 말하는 근본적인 실패로서의 “눈먼 영혼의 상태”가 쇼빈의 태연하고 무심한 눈빛, 그의 냉담한 태도를 통해 드러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른 이들과 같은 존재, 즉 동일하게 연약하고 실수하고 꿈꾸고 살아가는 존재로 흑인들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인종주의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저질러 온 가장 큰 폭력, 또는 원초적 폭력이 아닐까 합니다. “눈먼 영혼의 상태”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제도적인 차원에서도 발현됩니다. 흑인들이 경험해 온 수백 년간의 억압의 역사, 즉 노예제와 강제이주, 경제적/육체적/성적 착취, 물리적 폭력 (린칭), 참정권 등 모든 권리들의 박탈, 분리와 차별, 불평등, 대량 수감(mass incarceration), 그리고 경찰 폭력의 배후에는 “비인간화”(dehumanization)라는 근본적인 폭력이 놓여 있습니다. 그들의 인간성을 빼앗고 그들을 짐승으로, 물건으로, 상품으로, 소유물로, 인간이하의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인종주의라는 “미국의 원죄”(America’s original sin)의 출발점입니다.  
 
흑인들을 비인간화하는 이러한 시선은 사실 미국에서 살아가는, 저를 포함한 아시아계 이민자들에게도 낯선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시선은 때로는 ‘폭력적인 흑인남성’이라는 신화를 통해 드러납니다. 때로는 흑인들은 게으르고 무지하고 열등한 존재라는 시선을 통해 드러납니다. 흑인들이 겪었던 고통의 역사에 대한 배움 없이 형성된, 그들에 대한 정형화된 이해는 그들을 다른 이들과 동일한 존재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많은 이들이 거리에 나와 외치고 있는 “조지 플로이드에게 정의를”, “숨을 쉴 수가 없다” 등의 분노어린 구호는 결국 “흑인을 동일하게 존엄한 인간으로, 동일한 권리를 가진 시민으로 인정하라”는 외침입니다. 흑인의 생명과 삶이 동일한 무게를 갖지 않는 사회가 미국 사회입니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말을 빌면, 흑인의 죽음이 동일하게 “애도할 만한 것으로”(grievable) 인정되지 않는 사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몸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기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 대해 혹자는 이렇게 말할 지 모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에 따라 창조되었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피부색에 상관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생각은 인종주의와 인종차별에 대한 큰 도전 아니겠습니까?” 물론, 원론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신의 형상이 소수의 왕족에게만 부여되는 칭호였음을 생각한다면,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창세기 1 장의 선언은 성서가 쓰여지고 편집될 당시의 맥락에서 혁명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 이런 이해는 추상적인 차원에서의 평등에 머물게 가능성도 있습니다. 신학자 캐런 틸(Karen Teel)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논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영혼(soul)이나 지성(mind)과 같은, 하나님 형상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는 우리 사회와 교회를 괴롭혀 온 인종주의 및 이에 관련된 질병들에 도전하는 데에 실패했다. … 모든 형태, 피부색 그리고 크기의 인간의 몸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육체적인 차이에 근거하여 서로를 계속해서 차별할 위험에 빠지게 된다” (Karen Teel, Racism and the Image of God, 163).  
 
틸에 따르면, 우리는 몸을 가진, 아니 몸으로서 존재하는 육화된 존재입니다. 그가 보기에, 흑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피부색에 “상관없이” 또는 서로 다른 피부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이 땅에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는데, 이 예수께서는 탈육화된 보편적 존재가 아니라 매우 특수하고(particular) 독특한(unique) 몸을 입은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이 세상의 다양하고 차이를 가진 몸들을 통해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구현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틸은 주장합니다.  
 
제가 보기에, 앞서 말한 인종주의라는 “눈먼 영혼의 상태”(soul blindness)는 피부색을 보지 않는, 소위 “피부색 무시”(color blindness)로 극복될 수 없습니다. “나는 너의 피부색을 보고 판단하지 않겠다”는 말은 물론 원론적으로 옳은 말이고, 때로는 필요한 말이기도 합니다. 차이가 차별을 낳아서는 안 되겠지요. 그러나, 인간은 불가피하게 서로를 보고, 서로에게 보여지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단지 영혼이 아니라 “영혼이 깃든 몸”(ensouled body) 또는 “몸을 입은 영혼”(embodied soul)으로 존재합니다. 피부색의 차이로 인한 차별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상대방의 피부색을 보지 않겠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를 통해 현존하는 차별에 눈감고 이를 더 부추기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차이를 무시한다고 평등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단지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은 피부색과 상관없이, 또는 피부색을 무시하면서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다양한 몸들을 통해 발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의 몸과 상관없는, 정신적인, 영적인, 또는 추상적인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수많은 다양한 이웃들의 얼굴에서, 그 얼굴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들꽃을 보고 좋아라 웃는 아이의 얼굴을 통해서, 서로를 향해 미소짓는 젊은 연인들의 얼굴을 통해서, 질병과 싸우며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이의 얼굴을 통해서,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지친 얼굴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은 드러납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 뿐 아니라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들의 얼굴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형상은 드러납니다. 나에게 낯선 피부색과 외모를 가지고 있는 이의 얼굴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형상은 드러납니다. 그렇게 다양한 몸을 통해, 다양한 얼굴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인종주의가 횡행하는 오늘날 미국 땅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필요한 영성입니다. 그리고 서로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동일하게 존엄한 인간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모인 사회야말로 마틴 루터 킹이 말한 “사랑받는 공동체”(beloved community)가 아닐까 합니다. 

- 이 글에서는 편의상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이라는 용어 대신 '흑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저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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