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빈민가로 이사한 까닭
내가 빈민가로 이사한 까닭
  • 이태후
  • 승인 2007.02.12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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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라델피아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동네 North Central. 주민 대부분이 흑인이고 절반 가까이가 절대 빈곤층에 속해 있다. 내가 사는 동네이다. (이태후)
내가 사는 동네는 필라델피아 시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동네인 North Central이다. 주민의 93.8%가 흑인, 빈 집이 42.9%, 절대 빈곤층 이하 빈민 44%, 25세 성인 중고등학교 졸업자가 32.5%. 이 수치를 위에 있는 사진과 종합하면 우리 동네가 어떤 곳인지 대충은 짐작하리라 생각한다. 한 가지 더. 작년 한 해 동안 필라델피아 시에서 406명이 살인 사건으로 숨졌는데, 작년 8월 이후 내가 아는 사람만 세 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 늦은 밤이면 총 소리와 범인을 좇는 헬기의 서치라이트에 긴장하고, 낮에도 사이렌을 울리며 질주하는 경찰차가 낯설지 않은 동네. 동양 사람이라고는 구멍가게 주인 외에는 보이지 않는 이 동네에 내가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 곳곳에 예배당이 있지만 대부분 텅 비어 있다. 'Come to Jesus'라고 써 있는 낡은 간판이 눈에 띈다. 이곳도 지금은 빈 공간이다. (김종희)
넌 나를 위해 무엇을 했니?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2002년으로 잠시 되돌아가야 한다. 그 해 여름, 나는 섬기던 교회를 사임하고 다음 사역을 위해 기도하며 주님의 인도를 구하고 있었다. 6년 동안 이민 교회를 섬겼는데, 다음 사역지를 쉽게 정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진중하게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려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수하며 지내는 동안 친구 목사로부터 겨울수련회 강사로 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2세 목회를 하는 친구는 'Christians In the Real World'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해달라고 주문을 했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 적은 있는데, 'Real World'라고 한 걸 보니, 개론적인 말씀보다는 구체적으로 도전이 되는 말씀을 원하는 것 같아서 옹골찬 말씀을 전하기로 마음을 먹고 준비에 임했다.

조용히 묵상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에 천착하게 되었다. 거룩한 삶. 세상 속의 성도가 이외에 무엇을 추구할 수 있을까. 거룩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카도쉬'인데, 이 단어의 뜻은 '구별하다'이다. 세상 속에 사는 성도가 어떻게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구별할 수 있을까. 나는 모든 사람들이 더 소유하려 애쓰는 두 가지 재화를 대하는 마음가짐에 도전을 던지기로 결심했다. 그 두 가지 재화는 바로 시간과 돈이다. 현대인들이 가장 원하는 게 바로 이 두 가지가 아닐까. 더 많은 돈. 그리고 그 돈을 벌고 즐길 수 있는 충분한 시간.

성경 말씀은 바로 이 두 가지 면에서 성도들을 권면한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과 십일조를 바치며 청지기의 삶을 사는 것. 바로 여기에서 성도는 세상과 구별이 된다. 그런데,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일주일에 하루 만이 아니라, 내 삶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고백하는 의미가 있다.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내 소유의 일부가 아니라 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상징적 행위인 것이다.

이런 신앙고백적 삶의 구체적인 예로 나는 마태복음 25:31-46 말씀을 중심으로 원고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때 내 마음 속에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태후야, 너는 이 말씀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니?” 조용한 음성이었다. “주님, 저는 숲 키친(Soup Kitchen)에도 여러 번 갔구요, 새벽에 일용 근로자들을 섬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상 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설교 준비를 해야 하는데’ 생각하며 내 안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잊으려 했지만, 미세한 음성은 그치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더 커지지도 않았고, 노기를 띠지도 않았다. 나를 향한 연민이 가득 찬, 간절한 목소리로 주님은 계속 내게 물으셨다.

“주님, 저는 최소한 이 말씀을 전하지 않습니까? 사실, 다른 목사님들은 이런 말씀을 잘 전하지도 않는데, 저는 그래도 이 말씀을 본문으로 수련회를 인도합니다.”

“태후야, 너는 내가 배고플 때, 감옥에 갇혔을 때, 추운 거리에 지친 육신을 뉘어 잠들었을 때 날 위해 뭘했니? 너는 배불리 먹고, 따뜻한 방에서 폭신한 이불을 덮었지? 너는 날 위해 뭘했니?”

말문이 막혔다. 도저히 뭐라 대답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 나는 '형제들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에게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말씀을 전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내가 말씀 앞에 순종하지 못하면서 그 말씀을 전할 수는 없었다. 그 때 주님이 나를 다음 사역지로 부르신다는 걸 깨달았다.

▲ 2004년 어느 봄날, 필라델피아 시경에서 마약 사범 급습을 했는데, 137건 중에 하나가 내가 사는 집 앞에서 발생했다. 이 사진을 찍은 지 5분 후에 집에 왔더니, 옆집 이웃들은 사진에 나온 그대로 있었고, 마약 거래자와 형사들은 이미 차에 타고 있었다. (사진 제공 이태후)
멘토를 찾아서, 매누엘 오르티즈 목사님

내 다음 사역지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만나고 섬길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장소도 중요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를 가르치고 훈련시킬 멘토를 찾는 거였다. 빈민 사역의 경험이 있고 내 멘토가 될 수 있는 분을 찾은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교수이며 빈민사역의 권위자인 매누엘 오르티즈 목사님은 필라델피아 동북부에 위치한 남미 이민자들의 동네인 Hunting Park에서 이미 십 수 년간 훌륭한 사역을 감당하고 계셨다. 그렇다면 그 교회에 출석하며 처음부터 배우는 게 당연한 순서였다.

2002년 12월부터 평신도의 자격으로 오티즈 목사님의 교회인 Spirit & Truth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나를 알아본 목사님은 반갑게 맞아주시며 내 근황을 물어보셨다. 뉴욕에서 사역할 때 목사님께 상의를 여러 번 드렸기에, 목사님은 내 사역에도 상당한 관심을 갖고 계셨다. 내가 교회를 사임한 사정을 말씀드리고, 빈민 사역에 소명을 받은 말씀을 드렸더니, 목사님은 자기와 함께 사역하자며 나를 협동목사로 청빙했다.

뉴욕에서 내가 유학생 사역을 한 걸 아시는 오르티즈 목사님은 내게 템플대학에서 IVF 사역을 하며, 동시에 그 지역에서 사역할 것을 권하셨다. 대학가이지만, 큰 길만 건너면 빈 집과 무너진 집이 수없이 늘어선 빈민가. 그렇게 해서 나는 지금 내가 사는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아마 이렇게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너무 극단적인 결정이 아닐까? 단지 한 구절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맥락 속에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심판의 비유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다. 많은 경우 이 말씀을 예수님의 비유 중 하나로 취급하며 그 말씀이 지니는 심각성을 희석한다. 그런데, 이 말씀은 결코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없다. 24장에서 제자들이 주님께 마지막 때에 대해 묻자, 예수님은 그 때의 징조에 대해 설명을 하신다. 그리고 25장에서 마지막 때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세 비유 중 마지막인 심판의 비유는 예수님 공생애의 마지막 강론이다. 마태가 아무런 이유 없이 이 비유를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로 기록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책임한 해석이다. 마태는 독자들이 이 비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를 기대한다.

이 본문이 지니는 더 큰 해석상의 난제는, 16절이나 되는 본문에 '믿음'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신, 네 번이나 반복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하는 구절은 마지막 심판 때의 기준이 선행이라고 역설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오직 믿음으로' 대신에 '오직 선행으로'라고 해야 하나? 그건 본문에 나온 '선행'의 뜻을 잘못 이해한 데서 나온 짧은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옷을 입히고, 감옥에 갇힌 자를 방문하는 것은 믿음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 이태후 목사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노예 신분이었던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분이다. 고아와 과부, 나그네(불법이민자, 외국인노동자)를 보호하고 돌보시는 분이다. 미국의 흑인 노예를 해방하시고, 우리나라를 제국주의와 독재에서 구하신 분이다. 그런 하나님을 믿는다면, 내 신앙은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이들을 마음에 품어야 한다. 그런 고백적 삶이 없다면, 내가 믿는 하나님이 출애굽의 하나님, 이사야의 하나님, 성육신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 내가 빈민가로 이사한 것은 정직한 내 신앙의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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