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장벽이 아니라 다리를: 정체성과 경계지대
[칼럼]장벽이 아니라 다리를: 정체성과 경계지대
  • 권건우 목사
  • 승인 2020.06.28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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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건우 목사 칼럼
U.S. – Mexico Border (David McNew/Getty Images)
U.S. – Mexico Border (David McNew/Getty Images)

자신의 고향을 감미롭게 여기는 이는 미숙한 입문자이다. 모든 곳을 자신의 고향처럼 여기는 이는 이미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온 세계를 낯선 곳으로 여기는 이야말로 완벽하다.

– Hugh of St. Victor, Didascalicon

최근의 일입니다. 여느 때처럼 쓰레기를 버리러 밖에 나갔는데, 차고에서 뭔가를 하고 있던 맞은편 집 백인 남자가 저에게 먼저 인사를 하며 말을 걸었습니다. 함께 팬데믹 상황에 놓여 있어서였을까요. 골목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까운 곳에 살지만,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그와 저는 안부를 묻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 도중에 그가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Where is your home?” 저는 ‘home’의 여러 사전적 의미 중 하나인 ‘거주지’(one’s place of residence)를 떠올리고는, 손가락으로 제가 살고 있는 곳을 가리키며 “바로 저기”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저에게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물었습니다. “I mean, where is your home?” 그제서야, 저는 그의 질문의 의미를 깨닫고 이렇게 답했습니다. “Oh, I’m from South Korea.” 그가 의미했던 것은 ‘출신 지역’(a place of origin)이었던 것입니다. 이웃과의 짧은 대화는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저의 처지를 다시금 상기시켰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정체성들(identities)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정체성은 종종 자신이 살아온 공간이나 장소에 대한 소속감(a sense of belonging)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습니다. 특정한 지역에 터를 잡고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은 그 장소를 친숙하게 느끼게(feel at home) 됩니다. 또한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 및 전통에 대한 집단적 기억과 서사를 형성합니다. 그렇게 애향심, 애국심 같은 것들이 길러지고, 이는 많은 이들의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정체성이 그 자체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강한 문화적/민족적 정체성은 낯선 것, 이질적인 것에 대한 거부나 혐오로 발현되기도 합니다.

국경과 장벽, ‘우리’와 ‘그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애리조나 주의 산 루이(San Luis)에 있는 멕시코 접경 지역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이 세운 장벽을 가리키며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장벽이 코로나바이러스를 막았다. 이것이 모든 것을 막았다”(It stopped COVID, it stopped everything). 최근 팬데믹과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 시위를 거치면서 지지율 하락을 경험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장벽을 다시 방문함으로써 지지층에게 자신의 “업적”을 상기시키고자 함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의 국경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튼튼하다”(Our border has never been more secure)고 말하면서 그는 자신을 “위험하고 더러운 이민자들”로부터 미국인들을 보호하는 수호자(guardian)로 보여주고자 합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일관된 반이민 정책은 최근 팬데믹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적”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이민 비자를 보류하는 결정에서도 드러났습니다.

정치철학자 웬디 브라운(Wendy Brown)은 그의 책 "Walled States, Waning Sovereignty" (2010)에서 오늘날 주권 국가들이 국경에 장벽을 세우는 현상(nation-state walling)에 대해 분석합니다. 그에 따르면, 이 현상은 역설적으로 근대국가의 주권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지구화 시대에 물리적인 장벽으로 경계를 강화하는 행위는 장벽 내부의 시민들을 안전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브라운에 따르면 유럽의 종교전쟁 이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수립된 근대 민족국가 체제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의해 주도되는 세계화로 인해 그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자본에는 국경이 없어진 지가 오래입니다. 또한 9/11으로 대표되는 국제적 테러리즘 역시 근대국가의 주권을 위협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장벽을 쌓아 국경을 튼튼하게(secure) 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일종의 허구이자 신화라고 브라운은 지적합니다. 그는 장벽을 쌓는 것은 불법 이민을 완전히 차단하거나 감소시키지 못하며, 오히려 이민자들이 불법적인 범죄 조직을 통해 위험한 루트로 이민을 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합니다. 미국 국경수비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7,000명 정도가 국경을 넘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하나, 이는 상당히 축소된 숫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장벽이 효과적으로 국경을 봉쇄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와 같은 정치인들이 천문학적인 예산을 사용해서 비싼 장벽을 건설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브라운에 따르면, 오늘날 장벽이 수행하는(perform) 기능은 사실 다른 곳에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장벽은 ‘우리’(us)와 ‘그들’ (them) 사이에 가시적인 경계를 만드는 일종의 스펙터클(spectacle)입니다. 이러한 장벽의 연극적(theatrical) 성격은 경계를 만들고 ‘내부’와 ‘외부’를 분할함으로써 미국인들의 정치적 상상력(political imagination)을 형성하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장벽은 장벽 내부에 사는 시민들의 자기-정체성(성실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형성하면서 동시에 장벽 너머에 있는 낯선 이들에 대한 이미지(시민들의 안전과 일자리를 위협하는 위험하고 야만적인 사람들)를 형성합니다.

‘적’과 ‘친구’를 나누는 이러한 (칼 슈미트적 의미에서) “정치적인” 행위는 외부의 위협에 맞선 내부 결속력을 제공하는 동시에 장벽 내부에 존재하는 불순하고 위험한 요소들(예컨대, 불법 이민자)을 재빨리 추방하기 쉽게 만듭니다. 모든 히스패닉 이민자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태도는 이미 ‘우리’의 일부가 된 히스패닉계 미국인들을 이등 시민으로 전락시키며, 이는 높은 히스패닉 수감률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즉, 요새화된 장벽은 신자유주의화 된 세계에서 기울고 있는 근대 주권국가에서 살아가는 백인들에게 거짓된 안정감(a false sense of security)을 제공하는 한편, 그들의 종족 민족주의(ethnonationalism)를 부추깁니다.

‘경계지대’와 새로운 정체성

미국에서 태어난 히스패닉계 작가, 문화이론가, 그리고 페미니스트 운동가였던 글로리아 안잘두아(Gloria Anzaldúa, 1942-2004)는 자신의 책 "Borderlands/La Frontera: The New Mestiza"(1987)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네판틀라(Nepantla)라고 부르는데, 이는 두 개의 강이 만나는 공간 또는 두 세계 사이의 공간을 뜻하는 나와틀(Nahuatl) 용어이다. 이 공간은 제한된 공간이자, 당신이 이것 또는 저것으로 존재하기보다는 변화하는 공간이다. 당신은 [이 공간에서] 아직 새로운 정체성을 얻지 못했지만, 또한 아직 오래된 정체성을 완전히 떠나지도 않았다. 당신은 일종의 전환 과정 중에 있다. … 네판틀라 안에 머무르는 것은 매우 어색하고 불편하며 좌절스러운데, 왜냐하면 당신은 변형(transformation)의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이다 (Gloria Anzaldúa, Borderlands/La Frontera: The New Mestiza, 237).

안잘두아는 두 개의 서로 이질적인 세계가 서로 만나는 ‘경계지대’(borderland) 또는 ‘사이 공간’(in-between space)을 가리키는 “네판틀라”라는 용어를 통해 우리에게 다른 방식으로 경계에 대해 사유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모든 개인과 공동체의 몸에는 경계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개인,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는 경계에서는 필연적으로 긴장이 발생하지만, 이 긴장이 반드시 적과 친구를 가르는 적대적인 방식으로 이어질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것들이 만나고 혼재하는 ‘사이’(in-between-ness)의 공간은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정체성이 형성되는 공간이 될 수 있다고 안잘두아는 역설합니다.

안잘두아가 옹호하는 ‘경계성’(liminality)으로서의 네판틀라는 차이와 이질성을 허락하고 수용하지만 낯선 것에 의해 영향받기를 거절하는 지배문화 중심의 ‘관용’(tolerance)과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흑인이나 히스패닉, 아시아계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워 ‘다양성’을 표방하면서 현존하는 구조적 차별을 은폐하는 ‘토크니즘’(tokenism)과도 다릅니다. 또한 모든 고정된 틀과 물리적인 장소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적인 ‘유목주의’(nomadism)와도 다릅니다. 안잘두아에게 경계지대는 여러 다른 정체성들이 혼재하는 복잡하고 어지러운(messy) 공간입니다. 불변하고 단일하며 순수한 정체성을 교란하고 위협하는 듯 보이기에 불안정하고 불편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공간 안에서 우리는 낯선 존재와 관계 맺는 새로운 방식을 발견합니다. 안잘두아의 조금 긴 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안전한 공간(safe spaces)은 없다. … ‘집’에 머무르면서 우리 자신이 속한 집단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은 상처에서 기인한 것이며, 우리 자신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다리를 놓는다는 것(to bridge)은 우리의 경계를 느슨하게 함을, 타인에게 자신의 빗장을 걸어 잠그지 않음을 의미한다. 다리놓기는 내부와 외부 모두에 존재하는 낯선 이들에게 문을 여는 일이다. 문턱을 걸어 나가는 것은 안전이라는 환상을 버리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는 우리를 낯선 영토로 데리고 가서 안전한 길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리를 놓는 것은 공동체를 시도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우리는 개인적, 정치적, 그리고 영적인 친밀성에 자신을 개방하는 위험, 상처받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 누군가가 국경을 보는 곳에서 경계상의 존재들(nepantleras)은 연결점을 본다. 누군가가 심연들을 보는 곳에서 그들은 그 심연들을 가로지르는 다리들을 본다. 경계상의 존재들에게 다리 놓기는 의지의 행위이며, 사랑의 행위이며, 긍휼과 화해를 향한 시도이며, 그들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타인들의 고통과 함께하겠다는 약속이다. (Gloria Anzaldúa, “(Un)natural bridges, (Un)safe spaces, in The Gloria Anzaldúa Reader, 245-6)

결국 안잘두아가 말하는 경계지대로서의 ‘네판틀라’는 우리에게 이질적인 것들과 함께 섞여 그 안에서 새로운 관계와 공동체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는 유동적인 과정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길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과 ‘그들’, ‘순수한 시민’과 ‘위험분자’를 가려내고 구분하는 방식의 경계 유지하기(boundary policing)를 멈추라고 요청합니다. 차이와 이질성을 재빨리 추방/배제하거나 동화시키는 대신, 그것과 함께 공존하는 법을 배우자고 제안합니다. 우리를 교차하는 수많은 이질적인 정체성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조금씩 변화하고 성장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나와 타인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게 됩니다.

서두에서 저는 우리가 어떤 장소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언급했지요. 안잘두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네판틀라에 너무도 오랫동안 머물러 있어서 그곳은 일종의 ‘고향’이 되었다” (Most of us dwell in nepantla so much of the time it’s become a sort of ‘home.’ 앞의 글, 243). 안잘두아는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당신이 속한 그곳을 사랑하되, 그곳이 당신에게 편안한 공간(home)이기에 앞서 경계지대(nepantla)임을 기억하라. 그 공간이 주는 안정감과 정체성에 매여 낯선 이들을 배척하지 않도록 경계하라.”

하나님 나라와 세상 사이, 다리가 되는 교회

‘외국인혐오’로 번역되곤 하는 ‘제노포비아’(xenophobia)는 그 어원을 따져 올라가면 ‘낯설고 이질적인 대상에 대한 두려움’을 뜻합니다. 오늘날 많은 미국인을 사로잡고 있는 반이민정서와 본토주의(nativism)는 결국, 그들이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장소가 네판틀라, 낯선 경계지대임을 망각한 결과가 아닐까요. 원주민들을 폭력적으로 축출한 유럽계 이민자들에게 원래 아메리카 대륙은 낯선 땅이었을 테지만, 이제 그들은 이 장소의 영구적인 소유권(ownership)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모토인 “Make America Great Again”은 유럽계 이민자들의 정착형 식민주의(settler colonialism)가 노골화된 하나의 사례일 뿐입니다.

히스패닉 기독교 윤리학자 미겔 데 라 토레(Miguel de la Torre)는 마태복음서의 예수탄생기사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헤수스(예수)는 이민자로 태어났을 뿐 아니라, 곧 난민이 되었다” (The Politics of Jes s: A Hispanic Political Theology, 34). 그리스도인들이 진정 머리 둘 곳 없으셨던 (마 8:20) 그분을 따르는 제자라면, 교회 역시 강고한 성채를 쌓고 “우리"와 “그들” 혹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며 경계를 유지하기에 골몰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낯선 이들과 이질적인 것들, 이민자와 난민들,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들, 머리 둘 곳 없는 이들에 열려있는 자기-비움과 자기-개방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다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갈 3:28)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질서와 범주들을 끊임없이 전복하고 교란하는 새로운 질서에 스스로를 개방해야 합니다. 경계지대에 존재하는 교회, 변화의 여정 위에 있는 교회야말로 하나님 나라와 세상을 잇는 다리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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