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길을 택한 원순씨를 생각하면서 드는 소회(素懷)
죽음의 길을 택한 원순씨를 생각하면서 드는 소회(素懷)
  • Young S. Kwon
  • 승인 2020.07.12 07:0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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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석 목사 칼럼

뛰어난 전문성과 창의성은 물론 훌륭한 인격자로 뭇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아 오던 박원순 시장이 허망하게 생을 마감하고 만 것은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적어도 최소한의 경위는 조만간 공개되겠습니다만] 오비이락으로 넘기기엔 석연찮은 필연성이 개재된 것으로 보여 더욱더 안타깝다 하겠습니다. 박 시장 역시도 결국 개인적으로 통합되지 않은 자아정체성의 사각지대에서 길을 잃고 너무 멀리 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오랜 세월 공인으로 살아왔기에 그분을 아끼던 시민들의 충격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만, 무엇보다 당사자가 나름의 가치와 신념을 좇아 살아왔던 그간의 행보에 걸맞지 않은 일탈 행위를 자기 안에서 통합해 내지 못하면서 스스로 더 이상 자신의 정체성을 진정성 있게 지탱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쯤에서 멈추어 서기로 결단하였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세계적인 도시 서울시의 시정을 최종 책임진 공인으로서 나아가서 차기 대통령 후보로 부각되기까지 한 공인으로서 원순씨와 사적인 공간 안에서 혼자 마주하고 늘 독대해야 하는 사인으로서 원순 씨 사이에 괴리가, 어떤 연유로든, 점점 커지면서 자신 안에서 통합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괴리를 일으키는 대표적인 요인으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힘"의 문제일 것입니다. 돈(금력)이든, 지위와 명성(권력)이든, 가부장제하에서 성적 우위(섹스)든 이것들은 다 자아의 외부에 있는 힘 또는 영향력으로서 그 자체는 어떤 동기와 목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도 있고 반대로 해악을 초래할 수도 있는 요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외부적인 요소들은 이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이해차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이 힘의 크기를 실제보다 훨씬 더 평가절상하려는 경향성이 생겨나는 데에 있다 하겠습니다. 즉 이런 힘/영향력의 실질적인 가치보다 명목상의 가치는 몇 곱절 더 크게 인식되게 마련이므로 까딱하면 자신의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 사이의 불균형이 발생하게 되어 가진 자들은 실제의 자신보다 자신을 더 과대평가하게 되고, 가지지 못한 자들은 실제의 자기보다 스스로 더 과소평가하게 되어 소위 사람과 사람 사이에 격차와 그로 인한 차별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 결과 인격 대 인격의 관계가 불가능하게 되고 대신 갑 대 을의 관계로 내림으로써 그야말로 힘 가진 자들이 가지지 못한 자들을 지배하고 함부로 착취하는 논리 곧 힘의 논리가 평범한 사회 통념으로 구조적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러나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사회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닙니다. 동물의 왕국보다 더 살벌하고 잔인한 사회가 되어 소위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대변되는 가치의 전도(顚倒) 나아가서 윤리 도덕의 전도가 일어나면서 탈인간화 내지 몰인간화가 급속도로 진행한다고 봅니다. 

돈 있는 자가 돈 없는 자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돈이 곧 가치이자 윤리의 척도가 될 것이며, 권력 가진 자가 권력의 지배를 받는 자를 함부로 경시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권력이 곧 가치이자 윤리의 척도가 될 것이며, 가부장제하에서 남자는 여자를 완력으로 지배하고 섹스의 대상으로 삼아도 큰 피해나 처벌을 받지 않고 여자는 언제나 희생을 강요당해야 하는 사회에서는 남자가 언제나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고 여자는 열등한 지위를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돈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갖은 권모술수를 다 동원하고, 뭇 여성들을 함부로 섹스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남성상을 좇아가고자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실제의 자기와 이런 전도된 가치 척도로 평가받는 자기 사이의 괴리를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현실은 쉬이 덮어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 역시 사실입니다. 혹자는 이를 선한 '양심'(conscientious)이라고도 하고 문화(civilized)라고도 하고 '자기-타자화 내지 자기객관화'라고 명명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이런 괴리를 관리하지 못하여 한 인격 안에서 통합할 수 없을 지경에 다다르면 우리의 자아정체성은 내적 균열이 진행되어 마침내 폭발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런 폭발을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소위 후안무치로 얼굴을 두껍게 하여 생까는 쪽으로 굳히기 또는 뻗치기로 치달아서 막무가내로 일관하는 것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양심을 버리고 문화를 버리고 자기 객관화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버리고 자신이 가진 외부의 것을 자신의 실제 정체성인 양 내면화해 버리는 길 말고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자아의 폭발은 막을 수 있겠지만 이미 자신을 버렸으니, 어쩌면 차라리 폭발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못한 대안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우리 인격의 외부에 있는 것들, 우리의 소유나 지위나 성별을 가지고 재단하는 사회에서는 모두가 다 피해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진 이들은 갑이 되어 갑질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가지지 못한 이들은 을이 되어 을질을 당하는 것을 당연한 정상(normal)으로 여기는 사회에서는 누구나 다 과대망상증 아니면 자기비하증을 앓고 있을 뿐, 정상적인 간인격적(personal) 우정 관계를 누리지 못하는 연약하고 미성숙한 자들이오. 불구자들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디스트 아니면 마조히스트 인간들로만 구성된 사회는 불필요한 아픔과 희생과 트라우마들로 그득할 수밖에 없는 병든 세상이라 하겠습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섹스가 대체 뭐길래 우리 인간의 고상함과 거룩함을 다 팔아서라도 서로 차지하려고 이전투구처럼 한단 말입니까? 누가 이런 비정상적을 정상으로 정해 놓았단 말입니까? 

이런 뒤집힌 가치와 자아의 안팎이 뒤바뀐 혼동사회에서 내부적 자아와 외부적 자아 사이의 괴리는  불가피하며, 갑의 위치에 있는 이들 곧 많이 가진 이들이 느끼는 체감 괴리의 정도는 가지지 못한 을의 위치에 있는 이들보다 훨씬 더 그 강도가 셀 수밖에 없으니, 그 불균형으로 인해 '걸려 넘어지기' 쉬우며(scandalous) 그만큼 더 취약하다(vulnerable) 하겠습니다. 특히 갑자기 졸부가 되거나 분에 넘치는 명예와 높은 지위를 얻게 된 사람들일수록 그 내면의 괴리가 커서 주체/관리하지 못하여 실수를 저지르기 쉬운 현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매한가지라 하겠으며, 인간의 역사는 이런 도중 하차한 위인과 영웅들로 가득하다 하겠습니다. 

사실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인간의 내면은 외적 소유의 차이만큼 서로 간에 그다지 차이가 크지 않은 법입니다. 많이 가졌다고, 높은 권세를 누린다고, 성적인 우위의 위치에 있다고 해서 그 내면도 덩달아 높아지고 훌륭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청빈 자체가 우리의 내면을 성숙하게 할 것이란 얘기가 아닙니다. 인간 내면의 자아 정체성은 우리를 둘러싼 외적인 요소와 별개의 문제 곧 별도로 내공을 쌓아 나가야 할 문제란 말입니다. 특별히 외적인 요소를 남들보다 더 많이 받았거나 얻었다면, 그만큼 더 자기 객관화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이 둘 사이의 괴리가 남들보다 훨씬 더 커져서 그만큼 더 쉽게 걸려 넘어지거나 그만큼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비단 개인의 노력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갑을 더 갑되게 뻥튀기를 하는 이들은 사실 갑이 아니라 을들입니다. 을은 아무도 없고 갑들만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갑질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남들이 갑으로 여겨주기 때문에, 돈 좀 더 있는 것만으로도 행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들이 갑으로 여겨주기 때문에, 맡은 직책의 지위가 마치 나의 내면적인 자아보다 더욱 소중한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그 영향력을 남을 위해 선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데나 함부로 힘자랑을 하고 휘두르게 되는 법입니다. 남자들을 더 대우하는 사회 속에서는 여자들은 무엇을 하기도 전에 이미 더 못한 대우를 받게 되고 열등한 존재로 함부로 취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돈과 권력과 섹스는 그 성질이 유사하여서 이 셋이 삼위일체로 결합을 하는 경우 가장 최악의 괴리 사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돈 있는 곳에 권력이 있고, 권력이 있는 곳에 돈이 따르며, 섹스의 폭력/착취가 덩달아 일어나는 것이 예사입니다. 소위 유착이란 병리 현상이 쉽게 발생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이런 유착 관계에 맛을 들이게 되면 그야말로 손 안 대고 코 푼다고 불로소득과 향락이 넝쿨째 굴러들어오게 되어 있으니, 이런 비정상적 사회에서는 작금에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적폐 현상들이 거의 일상화되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오죽하면 "술 상무"라는 직책이 생겨났겠습니까?

자아 안팎의 괴리로 인한 갈등을 억누른 채 억지로 봉합하고 있는 후안무치한 위인(僞人)들이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유난히 많이 나오고, 자아 폭발만은 어떻게든 막아보려다가  불가불 고종명(考終命)하지 못한 채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이들이 심심찮게 나오게 된 것은 아마도 우리 사회가 지향해 온 가치가 성장 지상주의였으며, 우리 사회의 구성원 개개인이 인생의 목적을 오로지 출세와 성공에 두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을 소유해서가 아니라 인간이기에 누구나 다 존중받아야 할 갑이며, 인간은 무슨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서가 아니라 그저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로 누구나 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가지지 못해도 대단한 업적이 없어도 존중받고 소중히 여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다 같이 위대하게 될 것이며, 놀라운 업적을 함께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해서 원순 씨의 강요된 죽음은 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나아가서 우리 사회의 시스템 자체에 경종을 울린 또 하나의 선지자적인 몸부림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기억하고 애도해야 할 것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충심으로 빌어 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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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2020-07-18 23:05:13
원순씨에 대한 변명을 그럴듯하게 써 놓았지만. 본질은 인간은 죄인이며 그동안 온갖 고상한척 하다가 결국 들통나니 비겁하게? 스스로의 수치를 못견뎌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노무현도 그렇고, 노회찬도 그렇고. 자살이 멋드러지게 책임을 지는 것인것 마냥 미화하는 작태가 씁쓸할 뿐이네요. 살아서 죄값을 받는 것이 오히려 책임있는 행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지수 2020-07-16 07:50:09
미안하지만 박원순은 동성애를 찬양한놈이요, 국민세금으로 북한을 먹여살린 빨갱이고 공산당이다. 박원숭을 찬양하는 너희들도 좌파고 공산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