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능력과 하나님 나라
비능력과 하나님 나라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0.07.30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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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다양성 속의 일치를 이루고 있는 가톨릭교회에 매료된 적이 있다. 그는 한 짤막한 논문에서 그것을 이렇게 밝힌다.

“가톨릭교회는 하나의 세계 그 자체다. 무수한 다양성이 그 속에 녹아들고, 이 다채로운 그림은 가톨릭교회에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더해 준다. 어느 나라도 가톨릭교회만큼 다양한 사람들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가톨릭교회는 경탄할 만한 능력을 발휘하여 다양성 속의 일치를 유지하는 법, 대중들의 사랑과 존경을 얻는 법, 강력한 공동체 의식을 일깨우는 법을 알아냈다.

그러나 이 위대함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중대한 물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가톨릭교회의 이러한 세계는 정말로 그리스도의 교회로 지내왔는가? 가톨릭교회는 하느님께 이르는 길의 이정표가 되기는커녕 그 길의 장벽이 되지는 않았는가? ...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다른 이의 믿음을 억압할 생각이 전혀 없다. 하느님은 마지못해 하는 섬김을 원치 않으신다. 하느님은 각자에게 양심을 주셨다. 우리는 우리의 자매교회가 자기를 성찰하고 하느님의 말씀만을 바라보기를 바란다.”(가톨릭 일꾼에 실린 글 본회퍼, “고백에서 저항으로-1”에서 인용)

가톨릭교회에서 매력을 느낀 것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분열만을 거듭하는 개신교교회들, 개교회주의에 함몰된 개신교교회에 절망하여 진지하게 가톨릭으로의 귀의를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가톨릭교회가 이루어내고 있는 다양성 속의 일치를 나도 부럽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본회퍼가 의문을 제기했듯이 나 역시 가톨릭이 가진 구조적인 결함을 보았다. 가장 강력한 권세가 된 교회, 그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의 자유와 함께 오래 전에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본회퍼도 보았던 다양성 속의 일치를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고, 그 권력의 정점에 프란치스코와 같은 분이 자리하니 일말의 희망도 가능해보이기까지 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과거 첼레스티누스 V세의 경우와 확연하게 다르다. 프란치스코 교종 역시 첼레스티누스 V세와 마찬가지 한계상황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교종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리스도를 따를 때 본회퍼가 제기한 질문들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양성 속의 일치’란 사실 교회의 가장 현저한 특징이 되어야 한다. 초기교회에 관한 기사 가운데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기적이나 유무상통이 아니라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다양성 속의 일치’가 아니겠는가. 그동안 나는 막연히 그것을 강력한 성령의 임재의 결과, 혹은 각 지체들의 성령충만에서 그 비결을 찾았다. 그런데 며칠 전 임미정 수녀님의 글을 읽다 우연히 그 비결을 발견했다.

“지금까지는 부르면 초대에 응하는 역할이었는데, 여성 수도자가 주체가 되는 활동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다”

가톨릭에는 주체가 되지 못하는 여성수도자들이 있었다. 물론 임수녀님은 주체가 되지 못하는 상황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이 내용은 이렇게 전개된다.

여전히 교회와 사회에서 수녀는 ‘조용히 기도하고, 앞에 나서지 않는’ 이미지로 인식되고는 한다. 그러나 그는 “가난하고 약한 현장을 보면 정의평화에 대한 인식이 생기고, 이를 위한 기도를 하다 보면 내 몸으로 가서 연대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수녀님은 ‘조용히 기도하고, 앞에 나서지 않는’ 이미지를 답답하게 생각한다. 그 한계를 넘어 주체적으로 가난하고 약한 현장을 보면 정의평화에 대한 인식이 생기고, 이를 위한 기도를 하다 보면 내 몸으로 가서 연대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조용히 기도하고, 앞에 나서지 않는’ 이 분들이 바로 ‘다양성 속의 일치’를 이루어내는 가톨릭교회의 반석이다.

주님은 당신을 향해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라고 바르게 대답한 베드로에게 반석(케이파스=게바, 페트로스)이라는 새 이름을 주시고 그를 반석으로 삼아 죽음의 문들이 이기지 못하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하늘의 열쇠를 주셨다. 베드로는 주님의 교회의 반석이 되었다. 그리고 주님은 베드로를 반석으로 삼아 당신의 교회를 세우셨다. 그 사이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주님이 어떻게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고 어떤 사람이 교회의 반석이 되는가를 배울 수 있다. 그 내용이 요한복음 21장의 내용이다.

주님은 당신을 버리고 배반했던 베드로를 회복시켜주신다. 그리고 당신의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주신다. 당신의 양을 먹이라는 것은 당신의 교회를 건설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명 위임의 장면에서 우리는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주님은 당신의 양을 먹일 베드로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권능의 부여나 확신할 수 있는 약속을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하신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

주님의 양을 먹이라는 위임을 받은 베드로는 이끄는 자가 아니라 끌려 다니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도 베드로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나는 한 번도 이 사실을 언급하는 주석도 글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패가망신을 하고 모든 것이 다 사라진 이후에 예수님의 이 예언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반복해서 내가 이 내용을 말하지만 여기에 공감을 표하는 사람 역시 거의 볼 수 없었다. 나는 이것이 복음의 신비이며 하나님 나라 건설의 알짬이라고 믿는다. 주님의 교회 건설에 필요한 사람은 임수녀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주체가 되는 사람이 아니다. ‘조용히 기도하고, 앞에 나서지 않는’ 답답하게 생각하는 바로 그 상황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반석이 되는 비결이다.

성령은 우리의 약함을 도우신다. 아니 도우실 수 있다. 주체가 될 때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힘을 추구하는 능동적인 존재로 변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성령을 방해하는 존재가 된다. 아니 성령께서 일하실 수 없는 심령이 된다. 바울이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고 기뻐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자신의 약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발현된다. 성령의 역사는 이렇게 이끌리는 사람들에게 이루어진다.

그래서 인간은 아무도 자랑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를 둘러보라. 온통 자랑투성이 아닌가.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나님께서 다 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신다. 그것이 상투어임을 아신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곳이 되었다. 더 정확히는 맘몬의 신전이 되었다.

나도 본회퍼목사처럼 다른 이의 믿음을 억압할 생각이 전혀 없다. 나는 모든 교회들이 자기를 성찰하고 하느님의 말씀만을 바라보기를 바란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라는 것이다.

그렇다. 가톨릭교회가 ‘다양성 속의 일치’를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은 주체가 되지 못하는 여성수도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반석이 되었다. 주체가 되지 못하는 그 모습, 남에게 끌려 다니는 지도자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반석이 된다. 권력을 가진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를 막아서고 있는 한 성령은 도우실 수 없고 성령이 도우실 수 없는 교회는 돈이 모든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맘몬의 신전이다.

자신의 능력과 뜻을 모두 내려놓고 이끌리는 사람들, 이것이 바로 비능력의 길을 가신 주님을 따르는 진정한 제자들의 길이다. 주님은 오늘도 그런 사람들을 반석으로 삼아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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