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의사 생활”에서 슬기로운 목사 생활 배우기
“슬기로운 의사 생활”에서 슬기로운 목사 생활 배우기
  • 안지영 목사
  • 승인 2020.08.02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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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세워나가기

나는 의사나 병원을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에 별로 관심이 없다. 수년 전에 히트했던 “하얀거탑”도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아내가 볼 때 그저 지나치면서 듬성듬성 잔디밭 잡초 뽑듯이 TV 스크린에 비치는 장면만 눈팅하는 정도였다. 그들 살아가는 방식이 나와는 큰 차이가 난다는 것만 확인하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낭만 닥터 김사부” 같은 드라마도 내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물론 그 드라마가 전하고 싶은 주제가 싫지는 않았지만, 의사와 그 주변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다른 드라마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에 관한 드라마가 재벌을 둘러싼 드라마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업종만 바뀌었지, 여전히 회사나 병원 안에서 벌어지는 패권 다툼은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재벌의 자리는 내가 넘볼 수 있는 자리는 아니지만, 의사의 자리는 내가 처한 자리에서 그리 멀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에, 더 아니꼽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참, 이렇게 꽈배기처럼 뒤틀어진 심보도 문제라면 문제가 되겠다. 더구나 목사라고 불리는 자가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목사이기 이전에 나도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죄성을 가진 인간인걸. 어쩌면 젊은 시절에 받은 부정적인 인상 때문에 의사에 대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의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는 나의 관심을 별로 끌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에 내 마음을 끈 드라마가 나왔다. 이제 한 시즌을 끝냈는데, 다음 시즌이 기다려지는 드라마였다. “슬기로운 의사 생활” 처음 드라마 제목을 보고는 ‘또 웬 의사 생활이래?’라며 그냥 지나쳤다. ‘의사? 슬기로우면 얼마나 슬기롭다고? 그게 다 그거지. 암기 실력 하나 좋아서 달달 외워, 그거 하나로 잘 먹고 잘사는 자들 아닌가?’ 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긴, 좋은 의사들도 많은데, 난 왜 이렇게 냉소적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나의 차가운 시선을 바꾸어 놓은 드라마가 바로 “슬기로운 의사 생활”이다. 의사들이 병원에서 겪는 일상을 수채화 그리듯이 담담히 그려간 드라마다. 강렬한 색상을 쓰지 않아도 그 드라마는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거기에는 패권을 위한 힘겨룸이 없다. 물론 가끔 그런 힘겨룸의 긴장감이 막 끓어오르려는 죽처럼 볼록볼록 올라와 터질 때도 있지만, 그것도 하나의 일과성으로 스쳐 지나쳐 간다. 그런 면에서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장면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 대신에 ‘진솔함’이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이 드라마는 어떤 특별한 프로젝트를 소재로 한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병원의 정황을 맑은 물감으로 그려내고 있어 편안하다. 드라마를 보면서 이렇게 느긋하게 즐기며 보는 게 얼마 만인가? 

다섯 명의 친구는 각자 다른 성격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의료 전공자며, 다른 성장 배경을 가진 자들이다. 의사 가문 출신도 있고, 사업가 집안 출신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평범한 가정의 출신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차별이 없다. 있다고 해서 힘을 주지 않고, 없다고 해서 주눅 들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시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고 말한다. 오직 왕족에게만 부여했던 신적 권위를 성경은 모든 인간에게 부여했다. 고대 제국의 세계관에서는 도무지 용납되지 않는 관점이다. 그런데 성경은 당시의 모든 인간 – 상위 계급부터 아래 노예 계급까지 – 에게 동등하게 ‘신의 형상’을 부여했다. 이 세상 누구도 가볍게 대할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슬기로운 의사 생활”에서는 이 ‘인간 평등사상’을 일상의 병원 생활에서 녹여내고 있다.  과연 나의 목회의 일상에서 성경의 핵심인 ‘인간 평등사상’을 얼마나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다섯 명 친구들의 공통점을 알려면 드라마 초반에 나오는 그들의 만남의 사연을 봐야한다. 그들은 의사 세계에 흐르는 흐름을 어색해하고 불편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들은 처음 의대에 들어와서 MT 갔을 때, 그 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슬금슬금 빠져나왔다가 서로 알게 된 사이다. 그들은 그렇게 의대 MT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던 좀, 특이한 자들이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이들의 사고방식은 내가 ‘냉소했던 의사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교회도 이 세상의 거대한 물결이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만나는 자리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서로가 그 불편함을 확인하고 무엇이 편한 것인지 발견하고 공유하는 자리다. 그 자리는 각자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함께 공유한 가치를 실현해 보고, 그 과정과 결과를 함께 나누며 격려하는 자리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교수실, 레지던트실, 식당이 바로 그런 자리다. 우리는 이런 나눔을 어떻게 이루어 볼 수 있을까? 내가 풀어야 할 숙제다. 

이들 다섯 명의 관계를 지켜보면서, 나는 이들을 ‘운명 공동체’라고 부른다. 이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 삶을 그대로 존중해 주면서도, 서로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이들은 자기들의 하나 됨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함께 밴드 연습을 한다. 공연을 위한 연습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 음악 연습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라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다. 음치인 베이스기타 채송화가 보컬로 나서겠다고 했을 때, 그들은 그것을 막지 않는다. 오히려 그 거슬리는 음정을 음악 속으로 녹여낸다. 그들은 이 밴드 연습을 통해서 각자의 ‘차이’를 ‘차별’로 만들지 않고, ‘조화로움’으로 승화시킨다. 그래서 이들은 이 밴드 연습을 환자 치료를 제외하고는 최고의 우선순위로 놓는다. 이들의 밴드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무엇이 될까? 우리가 다양한 배경과 성격을 가졌다 할지라도 우리는 무엇을 연습하면서 우리의 차이를 조화로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까? 이것도 계속 풀어야 할 숙제다.

다섯 명의 친구는 각자 자기의 전공 분야에서 나름의 실력을 갖춘 의사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을 듣고 이 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많다. 이 친구들은 같이 노닥거리고, 회식도 같이하며, 개인의 취미도 누리며 병원에서 일한다. 하지만 그들은 각자의 사정이 있다. 간담췌외과 전공인 친구는 이혼당한 후 자기에게 남겨진 아들을 위해 시간을 쓰고, 산부인과 친구는 바람난 아버지 때문에 속상해하는 어머니를 위하여 시간을 보낸다. 흉부외과 친구는 친구 여동생이 군 장교라서 장거리 연애에 빠져있다. 소아외과를 전공한 친구는 앞으로 신부가 되고 싶어서 바티칸에 신부 신청 원서를 보내고 그날만 기다린다. 자기가 수술한 아이가 세상을 떠날 때, 자기가 의사로서 자격이 있는지 자문하며 깊은 절망감에 힘들어한다. 뇌 신경과 친구는 홍일점인데 모범생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들 다섯 친구 사이에 중심을 잡고 있는 존재다. 이들이 일상에서 자기들만을 위한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들의 주된 초점은 자기들 앞에 있는 ‘아픈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들에게 온 정신을 집중한다. 나는 이들의 프로페셔널리즘에 도전을 받는다. 이들은 육체의 건강을 위해 이렇게 성실한데, 나는 영혼의 건강을 위해 나에게 온 사람들에게 얼마나 성실하고 진지한가? 이 부분은 항상 도전이 된다. 아마도 이 부분은 내가 목회 현장에 있는 동안 항상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을 듯하다. 

이들은 환자를 사무적으로 대하질 않는다. 이들은 불안한 환자들의 심정을 읽고 있다. 환자의 상태를 알기 위하여 CT를 찍고, MRI 검사를 하지만, 환자를 만날 땐, 그들의 내면을 찍는다. 그들의 마음을 읽는다. 그런데, 이들의 이러한 스캔이 전혀 유별나게 보이질 않는다. 환자 마음의 일부가 되어 있다. 이것을 인격이라고 할까 성품이라고 할까? 일상에서 만나는 환자들도 자연스럽게 이 친구들 마음의 따스함을 느낀다. 마음의 교감이 오가는 관계가 된다. 옆에서 이런 장면을 스캔하는 인턴이나 레지던트가 자기들의 전공의 교수에게서 터득해가는 것이 바로 ‘마음 읽기’다. 스승에게 배우는 것이 지식과 정보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상대의 마음을 읽어주려는 의사의 마음’이다. 

그런데도 어떤 때는 자기들의 문제 앞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힘들어한다. 그때 바로 옆의 친구나, 제자들인 인턴과 레지던트들이 그들의 마음을 읽어 준다. 아, 나는 목사인데, 얼마나 내 교회 공동체 식구들의 마음을 읽어 주고 있나? 나와 함께 하는 사역자들은 과연 얼마나 나를 통해서 이런 마음 읽기 자세를 배웠는가? 우리는 서로의 마음 읽기를 하고 있는가? 이것도 내가 풀어야 할 숙제다. 

“슬기로운 의사 생활”에서 아주 특이한 점이 나타난다. 다른 드라마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특이점이다. 여기 다섯 명의 주인공들이 다른 의사 소재 드라마에서보다 젊어 보인다. 보통 교수의 경우, 나이가 든 중년의 교수인데, 여기 나오는 주인공 의사들은 모두 나이가 젊어 보인다. 하기사, 요새 100세 시대이니 더 젊어 보일 수밖에. 그런데도, 스승과 제자 사이가 여느 드라마에서 나오는 스승과 제자 사이가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스승에게 제자들이 꼼짝하지 못한다. 일방적으로 지시를 받고, 순종적이다. 그리고 열심히 받아적고 숙지한다. 인생의 선배로서 심오한 인생 철학도 전수한다. 상하 수직적 관계다. 제자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때도, 다소곳한 자세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는 그게 보이질 않는다. 물론 교수와 제자들이 수술할 때나, 환자를 볼 때 야단을 치며 야단맞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그런 처음 관계에서 시간이 가면서, 제자가 스승에게 대들기도 하고, 농담도 하고, 어떤 중요한 시점에는 스승이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제시한다. 힘들어하는 스승에게 괜찮다며 위로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의사로서 자신 없어 위축되었는데,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스승에게 스스럼없이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그런데 이 요청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서로 배우고 세워주는 수평관계를 만들어간다. 그렇다고 해서, 질서가 무너진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질서다. 

이 드라마에서 이 ‘수평적 리더십’이 나의 이목을 끌었다. 이 드라마는 이 시대에 어떤 리더십이 필요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제는 권위적인 상하 수직적인 리더십이 물러나야 할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아직은 상하 수직적 시스템이 그 힘을 포기하지 않아서 요원하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그 힘이 약해질 것이다. 이런 낡은 시스템이 아직 교회에 만연하다. 직위로, 나이로, 힘으로, 학력으로, 돈으로 서열이 정해지는 풍토가 교회 안에 깔려있다. 한국의 의사 세계는 다른 나라보다 매우 수직적인 시스템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새로운 리더십을 그리고 있다. 이제 미래의 리더십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알리고 있다. 나는, 이 드라마가 던진 ‘수평적 리더십’을 어떻게 소화해서, 이 교회 공동체를 부드러운 색감의 수채화로 그려낼 수 있을지 숙제를 떠안는다. 

이 드라마는 나를 따뜻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나의 목회 생활을 드려다보게 하고, 풀어야 할 숙제를 떠안긴다. 그러나 그 숙제가 버겁지 않다. 무겁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숙제를 풀어가 보려고 이제 다시 목회의 현장을 드려다본다. 코로나 19로 모든 게 흐트러져 버린 이 시기를 “슬기로운 의사 생활”을 통해서 “슬기로운 목사 생활”을 배우는 시간으로 삼으면 어떨까 한다. 언젠가 이 안개가 걷힐 그때까지 이 드라마가 준 숙제를 잘 풀어내는 준비를 해야겠다. 

안지영 목사 / 달라스 나눔교회,미드웨스턴 실천신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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