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칼빈주의자를 찾습니다
겸손한 칼빈주의자를 찾습니다
  • 뉴스M 편집부
  • 승인 2020.08.10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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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제프 A.메더슨 지음, 김태형 역, 좋은씨앗, 2020년
겸손한 칼빈주의자를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사진= 책표지)
겸손한 칼빈주의자를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사진= 책 표지)

 

[뉴스M=장민혁 크리에이터] 한동안 새로운 방식의 노방전도가 유행한 적이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오해하게 만들었습니다’ 정도의 문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회가 신뢰를 잃고, 개신교의 평판이 추락하면서 터져 나온 자정의 목소리였다. 청년들은 거리에 나가 ‘진정한 기독교’, ‘진정한 복음’은 세간에 알려진 그런 누추한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리고 연대 책임을 지듯 ‘우리’에게 오해의 원인이 있음을 인정하며, 넘어지고 실수하는 ‘우리’가 아닌 ‘예수님’에게 마음을 열어 달라고 호소했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칼빈주의의 오명을 벗고자 시도한 책이 출간되었는데, [겸손한 칼빈주의]이다. 저자 제프 A. 메더스는 칼빈주의 진영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작가이자 텍사스 주에 있는 리디머 교회의 담임 목사이다. 열렬한 칼빈주의자 중 한 명으로서, 저자는 자신 역시 오만한 모습으로 칼빈주의에 심취해 있었음을 고백한다. 지난날의 흑역사를 회고하며, 진정한 칼빈주의는 오히려 겸손하고, 교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며, 몸소 사랑을 실천하는 것임을 저자는 책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 해결을 위해 칼빈주의 5대 교리에 주목한다. 곧 “튤립(TULIP)”으로 알려진 5개의 조항 –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한정 속죄(Limited Atonement), 거부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 을 실천적으로 해석하며 겸손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 교리들은 신학적 논쟁이나 지적 우월감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이면에 담긴 마음 곧 인간의 유한함과 의존성,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보살피심을 읽어내야 한다. 저자는 각 교리를 한 편의 예화 설교처럼 풀어내며, 은혜가 “우리의 뇌만이 아니라 심장으로도 온전히 스며들”기를 촉구한다. (81)

 

이 책은 “우리가 예수님을 오해하게 만들었습니다”라는 구호만큼 반갑다. 집단 내부에서 자신들이 어떻게 비치는지를 민감하게 살펴보고, 자성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언제나 훈훈한 일이다. 하지만 딱 “우리가 예수님을 오해하게 만들었습니다”라는 구호만큼 아쉽다. 이 구호는 겸손한 듯 보이지만, 일종의 선 긋기가 담겨있다. 잘못한 건 일부의 개별 행위이고, 본질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선언이다. 그어진 선 바깥에 대한 비판이라면 얼마든지 수용할 용의가 있지만, 선은 넘지 말라는 얘기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남는 묘한 찝찝함은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칼빈주의의 논리 자체가 낳는 여러 논쟁점을 언급하다가도, 중요한 건 논쟁이 아니라 겸손과 사랑의 실천이라는 식으로 넘어간다. 이 책의 취지가 교리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닌 겸손한 태도를 함양하는 것에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칼빈주의자들이 겸손한 성품을 함양할지라도, 또 좋은 말씨로 친절하게 말할지라도 결국 칼빈주의의 담론은 반드시 누군가를 소외시킬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가령, 교회에 다니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 아무개 씨는 어쩌다 ‘무조건적 선택’에서 제외되었으며, ‘거부할 수 없는 은혜’를 잘도 거부하고 ‘성도의 견인’에서 탈락한 것일까?

 

칼빈주의자의 무례한 태도를 바로잡으려는 움직임을 환영한다. 하지만 이왕 개혁하려 한다면, 개혁주의답게 조금만 더 인심을 써주면 좋겠다. 겸손이 필요한 것은 칼빈주의자들의 행태뿐만 아니라, 칼빈주의가 지닌 내적 논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칼빈주의를 오해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우리도 칼빈주의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예수님을 오해하게 만들었습니다”와 더불어, “우리도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라고 고백하면 더 좋겠다. 우리가 안다고 확신했던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저지른 폭력이 너무 많지는 않았나 돌아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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