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릭 쇼빈, 몽족 그리고 그랜 토리노
데릭 쇼빈, 몽족 그리고 그랜 토리노
  • 김기대 논설위원
  • 승인 2020.08.14 03: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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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미네소타주에서 백인 사냥꾼 6명을 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범인은  트럭 운전을 하던 차이 수아 방으로 그는  백인들이 자신에게 인종차별성 욕을 하면서 먼저 총으로 위협했기 때문에 살해는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다. 그가 사형언도를 받지 않고 종신형으로 수감중인 데 미루어 보면 이 증언은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진 것 같다.  차이 수아 방은 몽족(묘족, Hmong)이었다.

2007년 1월 위스콘신 주에서 사냥을 나갔던 30세 청년 차방이 살해된 채 발견됐는데 그가 몽족이었기에 2004년 사건에 대한 보복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었다.

몽족에 대해 처음 들어본 당시는 강렬하게 인상이 남았었지만 이후 몽족은  라오스 지역의 난민 뉴스에서나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몇해전 MBC 예능 ‘우리 결혼했어요’에 개그맨 조세호와 부부로 나왔던 아이돌 출신의 차오루가 묘족이었다는 것, 한국고대사에 몰입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판타지 소설 ‘치우천왕기’(이우혁지음)의 묘족 이야기가  곧 우리의 고대사라는 주장들도 나에게는  같은 비중의 연예계 뉴스에 다름 아니었다.

미네아폴리스에서 벌어진 경찰에 의한 민간인 살해 사건 주범인 데릭 쇼빈의 아내 켈리 쇼빈은  사건 직후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백인 경찰 3명이 조지 플로이드를 살해하고 있을 때 멀뚱멀뚱 망을 보던 경찰 투 타오(Tou Thao), 두 사람 모두 몽족이라는 사실이 몽족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번 살인 사건과 Black Lives Matter 시위는  오랜 인종 차별로부터 야기된 미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충돌한 현상이지 특정 인종 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네소타에서 빵집을 운영하는 게송 휴는 NPR과의 인터뷰에서 지역에 만연한 몽족에 대한 차별을 말하고, 말리지도 가담하지도 않는 투 타오의 비겁해 보이는 행동에서 그가 겪었을 직장내 차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이번 사건은 보다 복합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다. 다만 뉴스 뒤에 가려진 미국 북부 지역의 몽족의 삶을  영화 ‘그랜 토리노’(Gran Torino,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2008)를 통해 접근해 봤다.  

중국 남부와 베트남, 라오스, 태국 등지에 분포한 몽족은 베트남 전쟁 때 미국에 이용당한 민족으로 잘 알려져 있다. 베트남전쟁 때 라오스를 경유하는 호찌민 트레일이 북베트남이 남베트남 게릴라(일명 베트공)를 지원하는 루트로 사용되자 이를 막기위해 미국 CIA는 4만여명의 몽족인을  북베트남 후방 교란작전에 동원했다. 군사전문가 유용원에 따르면 CIA 지원으로 라오스 북부 롱청의 해발 940m 계곡에 건설된 활주로는 길이가 1260m나 되는 시설물로 1962년 당시 미국이 해외에 건설한 최대 규모 시설 중의 하나라고 한다. 베트남전에서 사망한 몽족은 약 6만 8000명에 이른다.

1차 대전 때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약속하면서 그들을 이용했던 영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전쟁 뒤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던 역사, IS 와의 전쟁에서 쿠르드 족을 이용하고 버린 미국의 배신과 맥을 같이 하는 사건이다.

1975년부터 시작한 미국의 몽족 난민 이민은  2004년에 끝나는데 인구가 적은 미네소타, 위스콘신, 미시간 주 등 중북부에 주로 정착했다.  미국내 몽족은 십오만명 정도이며 그 중 6만명이 살고 있는 미네소타에서는 최대  아시안계 소수 민족이다.

영화 제목인 그랜 토리노는 포드의 1972년 출시 차종으로 미네소타에서 멀지 않은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 외곽 도시에 사는 폴란드계 이민자 윌터 코월스키와 몽족 소년 타오의 이야기다  포드에서 50년 이상 윌터는 그가 애지 중지하는 고물차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던  타오(이번 사건의 범인 중 몽족계 경찰 이름도 타오다)와 엮이게 된다. 차를 훔치는데 실패한 타오는 윌터가 시키는 일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이 쌓여 간다.

윌터는 한국전 참전 군인이며 미국의 상징 포드 노동자 출신이다.  성조기가 휘날리는 그의 낡은 집 밖에 앉아서 바라보는 이웃들은 대부분 흑인 ,몽족, 남미계다. 이런 환경이 ‘백인’ 윌터에게는 못마땅하지만 정든 집을 떠날 수도 없다. 윌터의 ‘보수적’ 성향은 영화의 스토리 전개를 대충 짐작하게 만든다.  윌터 자신도 주류 백인 사회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동유럽 폴란드계 이민자이지만 그가 미워하는 대상은 주류 백인들이 아니라 흑인, 남미계, 몽족 등이다.

미국의 보수적 가치에 따라 성취를 이룬 그였지만 자동차 산업의 몰락은 그를 주변인으로 내몰고  한국전쟁의 훈장, 자동차 그랜 토리노만이 그의 과거를 영광스럽게 만드는 기재로 작동한다. 병원에 가도 소수 인종 환자 투성이며, 주치의도 중국계 의사로 바뀐 현실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큰 아들은 일본차 세일즈 맨이라는 사실도 그에게는 세기말적 현상이다.

윌터 아내의 장례식이 있던 날 몽족 이웃 집에서는 새로 태어난 아기의 축하파티가 열렸다. 지는 백인과 뜨는 소수 인종을 보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몽족 이웃이 자신의 잔디 밭에 들어오는 것을 총으로 막거나 욕하는 따위밖에 없다. 윌터는 그런 행위로 미국을 ‘지키고’있는 것이다.

월터는 한국전에서 훈장을 받은 ‘용사’였지만 17살짜리 북한군을 죽인 것은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그의 아내는 죽기 전 젊은 신부에게 남편의 고해 성사를 꼭 받으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집을 찾은 신부에게 자기의 마음을 열 리 없다.

이러저러한 사건이 전개되면서 타오와 그의 누이를 보호하기 위해 윌터는 몽족 갱단과 마주하고, 그랜토리노를 타오에게 유산으로 남겨준다.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윌터가 한국전의 트라우마를 신부에게 풀어 놓는다. 이까지만 보면 ‘그랜 토리노’는 미국 사회의 인종간 갈등을 훈훈하게 풀어낸 감동 드라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소수인종들이 미국사회 살아가기 위해서는 ‘포드적 가치’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는 강압이 담긴 영화다.  포드의 설립자 헨리 포드는 그의 돈으로 유대인 핍박의 계기가 된  위서 ‘시온 장로 의정서’를 인쇄 배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완고한 아버지가 싫어 멀어진 윌터의 아들들과 아버지가 없는 타오의 비혈연적 결합은 백인 윌터를 상위에 둠으로써 부성의 가치를 주입한다. 조지 레이코프가 ‘도덕 정치를 말하다’(김영사, 2010)에서 주장하는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엄격한 아버지’를 그대로 투영한 게 ‘그랜토리노’다.  

미국 최상위층 백인 2세들 사이의 계급 갈등을 다룬 ‘여인의 향기’(마틴 브레스트 감독, 1992)에서 프랭크 슬레이드(알 파치노)가 보여준 비혈연적 아버지상이 차라리 솔직하다. ‘여인의 향기’에서 프랭크도 공교롭게 한국전 참전 군인이다. 프랭크가 변화에 눈을 감아버린 ‘우익’이라면 ‘그랜토리노’에서 우익 윌터는 왜곡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다가 눈이 교정될 때쯤 세상과 이별하면서 자신의 유산을 고스란히 남기려고 한다.

어떤 영화평에서는 ‘그랜토리노’가 몽족 갱단의 총에 맞아 쓰러진 모습에서 예수를 찾기도 한다. 인종간 화해를 위해 자기 희생을 했으니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예수라면 십자가에 달리지 못한채 하늘을 바라보며 땅바닥에 누워버린 ‘미완’의 예수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반성없는 발언은,  누구나 다 하는  분석이 지적하듯이, 확장성을 포기하고  백인표심만을 겨냥한 태도지만 동시에 시위에 참여한 백인들의 위선을 못견뎌하는 잠재된 분노의 표출일 수도 있다. 다시말해 트럼프의 눈에는 백인 시위대가 진정한 인종 평등 정의에 기반한 사람들이 아니라 윌터 수준 정도에서 인종 문제를 바라보는 ‘얼치기’로 보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트럼프는 호불호를 떠나서 자기 욕망에 충실한 사람인 것에는 이견이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조지 플로이드 살해로 촉발된 이번 시위가 예전의 비슷한 시위에 비교하면 참여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전향적으로 바뀐 것은 사실이다. 일부의 약탈, 1992년 LA 소요와의 비교는 이번 시위에 가지고 들어와서는 안되는 곁가지다. 곁가지를 자꾸 소환하면 조롱 섞인 ‘지붕위의 한국인(Roof Korean)’처럼 보수적 가치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이전의 비슷한 시위가 소당연(所當然)의 성격을 지닌다면 이번의 시위는 소이연(所以然)의 성격이 강하다. 소이연과 소당연은 이(理)의 두 가지 측면으로 소이연은 자연스럽게 체득된 것이라면 소당연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윤리적 측면이다. 주자학을 시작한 주희(朱熹)의 말처럼 “소당연을 통해 소이연에 도달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 이전의 시위가 인종차별 반대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윤리적 책무에서  참여했다면 이번 시위는 ‘자연스럽다’.  반면 소이연은 윤리적 책무가 왜 필요한가를 따지는 근본적 원인(所以然之故)에 집중한다.

SNS세대 답게 시위가 민주 시민으로서의 의무라기 보다는 삶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라는 성격이 짙게 나타난 이번 시위가 그래서 주류 백인들에게 더 큰 공포일 수 있다. 물론 시위의 밑바닥 심리에는 코로나 정책에 대한 불만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인식될 수 있었던 점도 외면할 수 없다.

미국 사회가 인종 평등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가려면 마치지 못한 고해성사를 거쳐야 한다. 인종차별의 문제를 넘어서서 흑인 노예, 원주민 학살, ‘정의의 침공’으로 생겨난 기아와 전염병이  전쟁 이전 보다 더 비참한 상태로 만든 만행, 국가적 이익을 위해 현지인들을 사지로 몰아 넣은 근원에 대한 고해성사가 없으면 완전한 소이연의 단계로 넘어가기는 힘들다.

이번에 영국 브리스톨에서 노예상 에드워드 콜스톤의 동상을 넘어뜨리고 벨지움의 안트워프에서 콩고 식민지에서 무려 천만여명을 학살한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을 제거한 것처럼(벨지움의 수도 브뤼셀에 있는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은 아직 못 없앴다)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유럽이 앞선다. 그에 비해 미국은 아직 로버트 리 동상을 비롯한 남부 연합의 시설물들을 없애지 못하고 있다.

이번 시위의 진일보한 모습에 감동하면서도 불안해 하는 이유다. 약탈같은 지엽적인 사건들을 윤리적 차원에서만 부각되는게 불편하다. 방위군 투입, 통행금지 같은 포드적 가치를 환영하는 이들은 사태의 본질을 꿰뚫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가장 나를 우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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