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집회와 예배의 '자유'?
코로나 시대의 집회와 예배의 '자유'?
  • Young S. Kwon
  • 승인 2020.09.04 17: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권영석 목사 칼럼
권영석 (전 학원복음화협회 상임 대표)
권영석 전 학원복음화협회 상임 대표

전 모 목사와 사랑제일 교회를 간판으로 앞세운 광복절의 광화문 집회를 신앙적 자유의 발로라고 하기엔 뭔가 순수하지 못한 정치 편향적인 동기 내지 이데올로기적인 종교적 이념이 개입된 듯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코로나가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대형집회를 강행한 까닭이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전 세계적인 감염병 앞에서 방역보다 더 우선되는 이데올로기나 명분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의 주장처럼 문재인 정부가 무슨 빨갱이 정부여서 남한을 통째로 북한에 넘겨줄 것으로 확고히 믿지 않는 이상 그리고 그것도 화급을 다투어 이를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의 실체적 위기 상황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리도 불합리하다 못해 무모한 결사(結社)와 집회를 이런 팬데믹 상황에서 획책할 수 있단 말입니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요? 아니면, 혹 사악한 동기와 소위 음모가 작용하였던 까닭일까요? 그동안 K-방역이 세계적으로 칭송을 받아오던 것을 생각하면 어찌 이리도 어리석은 선택을 하였던가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동시에 후회가 밀려오지만, 만시지탄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준동하던 극우 기독교 집단이 그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을 뿐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이 땅의 기독교가 차곡차곡 내재화해 왔던 반공주의 이념이 예수께서 설파한 천국 복음을 완전히 잠식해 버리는 임계점을 넘어선 지가 이미 오래라 하겠습니다. 식민지 냉전 구도의 잔재인 미-소 간의 좌-우 대립의 프레임을 고스란히 체화한 남과 북은 동족 간에 잔인하게 총칼까지 겨누었던 터라, 남쪽의 기독교는 반공 산 주의 이념으로, 북쪽의 공산 독재 체제는 반기독교주의  이념으로 자연스럽게 동일시되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골수 친일의 이력을 지닌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이 장기집권의 수단으로 걸핏하면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던 것이 색깔론이었던 만큼 언로를 틀어 막힌 국민들, 특히 도그마에 취약한 기독교인들이 이념 편향적 신앙에 세뇌(indoctrination)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오늘 우리가 보는 것처럼 이 땅의 기독교는 “반공교”와 동일시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반공주의 기독교 역시도 식민지 냉전 구도의 희생물이자, 남북 분단의 부산물이었던 만큼 어찌 보면 정상참작이 충분히 인정되는 부분이 없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비록 촛불 혁명 이후 본격적인 민주화 시대로 접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오랜 세월 독재를 합리화하는 데에 일익을 담당했던 극우/보수 집권 세력이었던 정치 집단과 언론 집단의 끈질긴/마지막 저항이 아직은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코로나 감염병의 위기 상황에서조차 이런 이념 편향적인 종교 행위를 그것도 그리스도(基督)의 이름으로  국민 전체의 안전과 생명 보다 앞세운다면, 그에 대한 석명(釋明)이 있어야 하며 국민/국가 앞에 손해를 끼친 데 대해 어떤 식이든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는 그야말로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진작시키기는커녕 도리어 이를 위협하고 저해하는 매국적 집단이란 낙인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신천지 이단으로 인해 이미 한 차례 코로나 방역의 둑이 무너지면서 커다란 희생을 치렀던 국민(외인)들에게는 기독교 역시 매한가지로 공익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끼리끼리의 이익 집단이나 사이비 종교의 아류로 각인되고 말 것입니다.

게다가 더욱 심각하고 본질적인 사안으로는, 이번 사태가 일부 극우 기독교인들의 집회를 넘어서서 소위 주일성수(主日聖守)의 오랜 기독교 전통과 맞물리면서 이제는 사랑제일교회를 넘어 한국 기독교 전체의 정체성 문제로 번지는 가운데 교단과 교회별로 대면 예배 강행을 위해 투쟁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태동한 이래로 줄곧 신앙인의 중요한 신분증(identity marker)처럼 간주하여 왔던 주일예배가 코로나바이러스의 위기 상황에서도 여전히 최우선으로 붙잡고 있어야 할 중요한 신앙의 표지(標識)일 수 있을까요? 이미 드러난 통계 숫자만 보더라도 교회의 일상적인 예배와 소그룹 모임이 명백한 감염 경로로 속속 밝혀지고 있는 상황에서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될 위험 가능성을 무릅쓰면서까지 대면 예배를 고수하는 것이 과연 예수께서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  복음 에 합당할 것일까요?

말하자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위기 상황은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방역의 이슈를 넘어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있던 셈이라 하겠습니다. 주일 대 예배가 의미심장한 의식임은 틀림없지만, 과연 사람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인지요? 나아가서 우리의 예배 대상인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결정을 인정해 주시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과연 흔쾌히 받으실까요? 나아가서 교회란 단지 예배나 모임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진대, 이런 위기 상황에서 교회의 구체적인 존재 양식은 어떠해야 할지요? 어차피 일방적인 설교 청취 위주의 예배가 과연 주님의 몸 된 교회(New community)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에 그토록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일까요?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신학적 성경적 토대를 확인하고 코로나 상황에 부합하는 통합적이면서도 실천적 대안/대답을 모색하려면 장기간의 논의가 있어야겠습니다만, 이런 위기 상황이 아니라 해도 진정성 있는 신앙의 고백과 교회의 사명 완수를 위해서는 이따금 끊임없이 자기 성찰과 점검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종교 개혁의 참 정신(semper reformanda)인 만큼 개혁 교회(개신교)는 사상 유례없는 전 지구적 팬데믹의 위기를 도전과 반전의 호기로 삼아 외인들에게도 설득력과 공감대가 충분한 메시지로 변역(變譯)해 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개인  신앙 의 “자유” 내지 종교의 “자유”란 원론적인 명분을 반복하는 정도의 구태의연한 대처로는 작금의 비난을 잠재우기는커녕 자칫 기독교와 교회의 존재 이유를 완전히 부정당할 수도 있을 것으로 우려됩니다. 그만큼 작금의 사태는 총체적으로 긴박하고 엄중하다 하겠습니다.

집회 선동하는 전광훈 (유튜브 갈무리)
집회 선동하는 전광훈 (유튜브 갈무리)

더 이상 신비주의적 희망(wishful thinking)이나 심지어 반과학적/반의학적인 주술적 치유(miraculous healing)를 신앙이란 명분으로 내세우는 기복신앙(Health and Wealth gospel)을 고집하다가는 우리가 신앙하는 대상인 하나님과 기독교 신앙 전체를 희화화(戱畵化)하는 우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온 국민이 나서서 방역을 위해 거리 두기에 신경을 쓰고 있는데, 교회가 앞장서서 바이러스의 모판이 될 소지가 다분한 대면 예배를 계속 고집할 경우, 자칫하면 우리 하나님을 팬데믹의 희생자들을 양산해 가면서까지 굳이  대면  예배를 받고 싶어 하는 자기중심적이고 변태적인 이미지로 둔갑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며, 아니면 기껏해야 기독교는 미세 바이러스조차 물리치지 못하는 무력한 종교로 비치게 될 것입니다.

2020년을 기점으로 인간의 역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전과는 판이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코19 감염병을 경험한 이후(after Covid-2019) 세대들에게  개인의  “자유”란 어떤 식으로든 재정의가 불가피할 것입니다. 인간의 삶과 서로 간의 관계에서 자유란 무엇을 의미하며 자유-책임의 긴장 관계를 여하히 조정해 나갈 것인지, 나아가서 종교와 신앙의 자유 곧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과 경외심을 어떤 형태의 예배 의식으로 담아낼 것인지 당장으로선 그 변화의 범위와 규모를 가늠하기가 시기상조라 하겠습니다만 주님께서 가르치신바 사랑(敬天愛人)의 대원칙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남의 자유를 희생하거나 착취하여 내 자유를 합리화하는 그런 식의 자유는 참 자유가 아니며, 자유의 너울을 씌워 놓은 노골적이고 천박한 이기주의에 불과합니다. 대면 예배를 강행하려는 것을 자유란 이름으로 포장하려 하지만, 호흡기 감염병이 만연한 시대에서 그런 자유는 이기주의로 비칠 뿐이며 종내에 가서는 도리어 우리  모두 의 자유를 훨씬 더 구속하는 결과를 야기할 것입니다.

따라서 대면 예배가 마치 하나님을 경외하는 바로미터인 듯이 그 어떤 고난이라도 감수하고자 하는 순교자적인 자세를 취하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뭔가 석연찮아 보일뿐더러 자신도 낯간지러운 일로 여기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순교적인 신앙이란 신앙이냐 불신앙이냐의 기로에서 죽음을 각오하더라도 기꺼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삶, 곧 하나님의 뜻대로 경천애인하려는데 적반하장격으로 수반하는 그 어떤 억울하고 애매한 고난이라도 달게 받는 삶이 바로 순교적인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이 그런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결단이 요구되는 순교적인 상황인지,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누가 그런 결단/핍박을 강요하는 주체인지, 또 그 목적은 무엇인지, 그 결과로 유익을 얻게 되는 수혜자는 누구인지 따져보면 볼수록 자신 있는 답변이 궁색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대면 예배를 고집하다가 도리어 코로나 방역에 큰 구멍이 뚫리고 결과적으로 우리 자신은 물론 타인의 안전과 생명마저도 위험에 처하게 해 놓고서, 우리의 반-방역적 예배로 인해 초래된 피해에 대한 책임과 보상을 하나님에게 돌린다면 어떻게 이것을 예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예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무례(無禮)를 범하는 반-예배적인 행위라 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는 하나님을 곤경(dilemma)에 빠뜨리는 것이 될 터이니, 이 예배로 인해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물론 ‘무고한’ 외인/시민들에게 감염병을 확산하는 결과가 초래한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그런 예배를 편안히 받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런 경거망동을 마치 무슨 순교적인 신앙이나 되는 양 인정해 주시고 칭찬하시리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이 언급한 ‘애매한 고난’은 결코 민폐를 끼치는 ‘무지하고 무모한  고난’일 리가 없으며, 나아가서 만일 알면서도 부러 순교를 가장하는 것이라면 이는 하나님까지도 함부로 무시(僭濫)하거나 이용하려는 악의적인 행동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고난’이나 ‘불의한 고난’을 순교적인 고난으로 포장하려 든다면 이는 하늘을 속이고 땅을 속이려 드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당신을 시험하는 자를 결코 죄 없다고 아니하실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하나님은 우리가 대면 예배를 드리다가 코로나 확산의 통로가 되는 것을 결코 칭찬은 고사하고 용납도 아니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대면 예배를 드리는 동안만큼은 하나님께서 신비로운 방식으로 코로나바이러스를 무력하게 하실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실 바이러스를 만드신 분이시며, 바이러스의 증식 원리를 애초에 고안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마치 중력이 그러하듯이 바이러스 역시 우리가 그 특성을 함부로 무시할 경우, 그분은 아마도 딜레마에 빠지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그냥 중력/바이러스의 힘과 원리에 따라 위험에 처하도록 방치하실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위해 당신의 창조 원리를 무력화시키고 중력/바이러스의 힘을 중지시키려 하시거나 몰각하려 하실까요? 하나님께서 과연 어떻게 하실까요? 아니  이미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마도 하나님의 결정에 중요한 결정 인자(factor)로 작용하는 또 하나의 변수가 있다면, 바로 우리가 그런 행위를 하게 된 동기의 순수성일 것입니다.  아무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중요시하는 만큼 대면 예배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코로나바이러스를 막아주시지도, 바이러스의 원리가 작동하지 못하도록 중지시키지도 않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행동이 그다지 지혜롭지도 못했으며, 우리의 동기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대단히 순전하고 감동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드러난 결과가 이미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합리적인 추론을 못 할 정도로 신비스러워져 있다면, 이는 우리의 신앙이 불합리하고 맹목적인 신앙이라는 반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신앙은 때로 합리-외적이거나(dis-rational) 과학/의학-외적인(dis-scientific) 경우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불합리(irrational)나 비과학 내지 반의학적(nonscientific)이란 말과 동의어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본인만이 아니라 타인(이웃은 물론 가족들까지)의 생명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하나님을 이런 딜레마에 처하게 하는 행동은 어떤 의미로도 의로운 행위나 순교적인 신앙의 발로이기는커녕 지극히 사적(私的)인 밀교 의식의 연장선에서 벌이는 어리석은 광란에 불과하거나, 사적(邪的)인 이해관계에 이끌린 불의하고 악의적인 행동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참으로 이런 신앙을 요구/칭찬하시는 하나님이라면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하든 말든 대면 예배 가운데에 임재하시고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시는 그런 분이시라면, 그분은 결코 세상의 창조주요 만물의 구속주가 될 자격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며, 더구나 우리가 목숨을 걸고 순교할 각오로 믿고 따라야 할 가치가 있는 신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현재와 같은 코로나 상황에서는 우리의 오랜 전통인 주일성수를 고집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의  진정성을 입증하기는커녕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도리어 욕보이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대면 예배를 고집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감염병이 확산하는 것을 결코 기뻐하시지 아니하실 것이며, 오히려 우리가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 대면 예배마저도 잠정 유보하기로 한다면 이를 더욱 기뻐하시고 칭찬하지 않으실까요?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생명과 부활이 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 예배를 드리는 셈인데, 이 예배가 도리어 우리와 이웃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고 죽음을 확대하는 통로가 된다면 이것이 어떻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되겠습니까?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막 3:27)고 하셨던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명분이나 연유로든 간에,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가 드리는 대면 예배를 기뻐 받으시기는커녕 예배 시간에 함께 하시는 것조차 자못 불편해하실 것입니다.

어떤 궤변이나 견강부회를 끌어 붙인다 해도, 코비드-19의 팬데믹 위기상황이 수습될 때까지는 대면 예배로 모이는 것보다는 모이지 않는 것이 차라리 주일을 더욱 거룩히 지키는(聖守) 것으로 보입니다. 믿음과 열심으로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가운데 신중히 결정하여야 할 때입니다. 이 결단 여하에 따라 한국 기독교의 미래는 크게 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신중하여야 할 것입니다. 경천애인의 하나님 나라는 결코 맹목과 무지에 기반한 열심과 치성으로 운영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진실무망(眞實无妄)하면서도 주변 상황을 세심하게 살펴서 사리를 꿰뚫어 분별하는 깨어있는 성도들이 곧 그 나라의 백성이자 주님의 제자요 동역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그리고 코로나 감염병의 극복을 위하여 가장 좋은 길을 선택할 줄 아는 이 땅의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고 또 앙원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