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먹는 공룡'
‘돈 먹는 공룡'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0.09.12 04: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며칠 전 글을 쓰다 교회가 ‘돈 먹는 공룡’이 되었다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우연이었습니다. 그냥 ‘물 먹는 하마’가 생각나서 그것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그런데 써놓고 보니 그건 진실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정말 돈 먹는 공룡이 되어버렸습니다.

제 글을 읽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매일 글을 쓴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쉽게 씌어진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저는 이 시를 읽고 시인이 정말 시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글을 쓰면서 저도 똑같은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글이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신앙을 이렇게 쉽게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아마도 시인은 자신의 삶과 다른, 시 속의 세계를 아파한 것 같습니다. 그는 시를 토해내고 싶어 하지만 자신이 생각할 때 시가 자신의 생각과 달리 관념 속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그는 보았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내 삶에 녹아 있는 신앙의 이야기들을, 그것이 쉽지 않아서 토해내고 싶지만 그냥 당위에 머무는 수준을 글로 쏟아놓으니 부끄러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이야말로 내 안의 성령께서 활동하실 수 있는 공간 내지는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자신의 삶이 주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다면 그건 자신의 삶이 허황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며칠 전 티브이 토론에서 전광훈과 광화문 집회가 코로나 확산의 역할을 한 것과 관련하여 토론을 하는 프로를 보았습니다.

우선 그 말도 안 되는 주제로 토론을 하는 것 자체가 우스웠습니다. 도대체 그 일이 어떻게 토론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일이지 옳고 그름을 가리는 토론의 주제로는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 주제였습니다. 그것을 정부가 예배를 금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포장하기도 했지만 결국 교리로 먹고 사는 목사는 역시 말꼬리싸움을 거는 것으로밖에 그 주제를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그 토론은 시종일관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들을 하였지만 사실 기독교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들로 점철되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초에 진리를 상식의 잣대로 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의 토론을 보면서 정말 그들이 부끄러움을 아는 분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광훈이 부끄러우면 전광훈이 속한 종교 전체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물론 그런 이야기들이 안 나온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광훈에게 나라를 사랑하는 진심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전광훈 혼자 그렇게 날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나 전광훈을 자신과는 관련 없는 사람으로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전광훈은 그냥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개신교 기독교 안에서 태어나 자라고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도 개신교 기독교의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 개신교 그리스도인 모두가 부끄러워해야 하고 그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 프로 내내 반복되었던 말처럼 개신교는 통제가 불가능한 집단입니다. 그러나 통제가 불가능한 집단이라는 사실이 잘못된 집단이라거나 없어져야 할 집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통제되어야 한다거나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가톨릭이 붙여준 이름이지만 개신교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개신교는 프로테스탄트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분열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태생의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이 의미 없고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끊임 없이 새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며 성령의 종잡을 수 없는 인도하심에 따를 수 있는 자유의 토대이기도 합니다. 진리가 주는 자유,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자유란 결국 어느 것인가에는 프로테스탄트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이 바로 또 다른 프로테스탄트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가장 나쁜 결정은 전광훈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자신은 전광훈과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전광훈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만일 제가 큰 교회 목사가 되거나 큰 교회를 목표로 삼았다면 저도 전광훈과 같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도 교인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목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저는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저는 민들레 홀씨처럼 성령의 바람에 편승할 수 있는 가벼움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존재의 가벼움은 참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전광훈에게 지배당하여 막무가내가 되어버린 사람들도 저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분들이야말로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아무리 손가락질을 하고 비난을 하고 경멸을 해도 그분들은 듣지 않습니다. 아니 들을 수 없습니다. 결코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을 자극하고 그들에게 동력을 더해주는 촉매제가 될 뿐입니다. 이것이 지배와 통제의 무서운 결과입니다. 사람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것임과 동시에 생명을 말살하는 행위입니다. 지배와 통제가 사라질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은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며 인간이 인간에게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범죄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그들을 섬길 때 그들 역시 생명으로 풍성해져서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들은 사랑이 더욱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그리스도인들의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때입니다.

코로나로 야기된 모든 혼란은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기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절대적인 것으로 여겼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본질과 무관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사소한 것에 목을 매달고 있었던 교회의 실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려는 성령의 인도함이라는 사실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는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혼란은 혼란이 아니라 진리를 일깨우는 죽비가 될 것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혼신의 힘으로 시를 썼습니다. 그의 시의 원천은 그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살던 시대의 사람들의 삶은 절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쉬이 씌여지는 자신의 시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가 삶으로부터 괴리되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자신의 삶은 근본적으로 다른 이들의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시인은 알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를 진짜 시인으로 만들어준 이유였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도 그와 같은 것을 느껴야만 합니다. 신앙의 리트머스는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시인이 살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절망의 구렁텅이로 사람들의 삶을 몰아넣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혼자서만 자신의 신앙을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신앙이 여전히 자랑스러운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의 삶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것을 깨달을 때 우리의 신앙은 참된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교회가 돈 먹는 공룡이 되었습니다. 전광훈도 그런 교회의 열매 중 하나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그 공룡에 충성하려고 자신들도 돈을 먹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깨닫고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그런 분들을 사랑할 수 있고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그 생명으로 더 넘치게 하시는 주님의 일에 협조하는 진리의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혼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다른 이들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도 시인처럼 우리의 신앙이 쉽게 씌어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할 때입니다.

 

Share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