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신앙을 부추기는 구절들
기복신앙을 부추기는 구절들
  • 송인규
  • 승인 2007.06.21 23: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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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송인규 교수의 '쉽지 않은 주제, 풀어야 할 숙제 1' - 복(福) ④

복(福)

송인규 교수의 '쉽지 않은 주제, 풀어야 할 숙제'Ⅰ

1. 왜 기복신앙에 빠져드는가?
2. 성경이 말하는 복은 무엇인가? 
3. 구약의 복 vs 신약의 복
4. 기복신앙을 부추기는 구절들
5. 성경적 근거 없는 ‘삼박자 구원’
6. 기복신앙을 극복하는 길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복 개념의 그리스도 중심적 발전에 무지하고 무관심할 뿐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꿈을 이루거나 성공과 번영을 기약해 주는 것 같은 성구 내용에 대해서는 엄청난 매력을 느낀다. 그런 경우 인용되거나 회자되는 구절들은 성경의 문맥이나 정당한 해석의 과정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여기저기에서 뽑혀 나와 우리의 욕망을 한껏 부추기는 데 사용되고 있다.

이런 구절들은 대개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적극적 사고방식과 연관된 구절들이요, 둘째는 번영의 욕구와 성공 심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절들이다. 엄밀히 말해서 첫 부류의 구절들은 기복신앙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욕망 성취를 지향하도록 자극하는 데 있어서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함께 다루고자 한다.

적극적 사고방식과 연관된 구절들

자, 그러면 먼저 적극적 사고방식과 연관된 구절들부터 하나씩 고찰하도록 하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이 구절은 우리가 욕망의 성취를 희구한다면 적극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할 때 감초처럼 인용되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명의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이 구절은 결코 적극적 사고방식을 정당화할 수 없음이 명백히 드러난다.

본문에 의하면 어떤 아버지가 벙어리 귀신 들린 자기 아들을 예수께 데리고 나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막 9:17), 이는 제자들이 못 고쳤기 때문이었다 (18절). 그 아버지는 예수께 “…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22절)라고 외쳤다. 이 말 속에는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에 대한 평가 절하의 멘탈리티가 깔려 있다.

사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 (막 1:24) 혹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막 5:7)로서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었고, (마 12:28) 심지어 그 권능을 사도들에게 부여하기까지 하셨다. (마 10:1) 그런데도 이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께 무엇을 “할 수 있거든”이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의 귀신 쫓는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불신과 의문의 마음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런 정황에서 마가복음 9장 23절의 언명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마가복음 9장 23절에 언급된 믿음은 “예수께서 자기 아들을 괴롭히고 있는 귀신을 내쫓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이든 큰 꿈을 가지고 기도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그런 식의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이 구절도, 우리가 가진 꿈과 욕망을 이루어 주십사 하며 끈질기게 매달리면 성취된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데 자주 사용된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오직 그의 뜻대로 구할 때만 그렇다 (요일 5:14).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으면 응답이란 기대할 수 없다. 이것은 심지어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러난 예수님 자신의 기도(마 26:39)나 육체의 가시가 제거되지 않은 바울의 간구 경험(고후 12:8~9)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하물며 우리의 모든 욕망과 꿈에 있어서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아마 적극적 사고방식을 정당화하는 데 이보다 더 많이 제시된 구절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주창자들은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신념만 있으면 못 이룰 바가 무엇이겠느냐고 도전한다. 그러나 바울은 빌 4:10~13 사이에서 자신의 사도적 임무 수행과 재정 형편 사이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이 어떠한 재정 형편에 처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은 무엇 하나 하지 못할 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결코 자기가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의 모든 것이 아니다.

번영의 욕구를 정당화하는 구절들

이제 둘째 부류(번영의 욕구과 성공 심리를 정당화하는 구절들)로 넘어가도록 하자. 먼저, ‘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구절들부터 살펴볼 것이다.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삼하 7:29)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의 장식패를 채우는 단골 성구로서, 그리스도인 개인보다도 자신이 속한 가족 전체를 염두에 두고 복을 희구할 때 안성맞춤인 것으로 인용되곤 했다. 그러나 상기 절에 나타난 바처럼 다윗의 가문에 약속된 복은 소위 다윗 언약-“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삼하 7:16)-을 언급하는 것으로써,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구속 사역을 통해 현시된다. (눅 1:32~33) 따라서 자신의 가정에 물질적 복이 내리기를 고대하며 삼하 7:29을 간직하는 것은 빗나간 처사요, 무의미한 종교 행위이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를 허락하셨더라.” (대상 4:10) 

상기 내용은 “야베스의 기도”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구절이다. 야베스의 간구를 보면 ‘복’이 언급되어 있고 그 구체적인 사항으로서 “땅의 확장,” “환난에서 벗어남” “근심이 없음” 등으로 되어 있다. 이 구절에는 구약적 의미 구조의 패턴(하나님의 선의[내용]가 물질적 은택[형식]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문제인즉 신약 시대에는 이 두 가지 사이의 연결 고리가 끊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야베스와 달리 구원의 사실과 은택에 초점을 맞추어 복 얻기를 구해야 할 것이다.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히 6:14)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창 22:17)을 인용한 것에 불과하므로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 각 개인에게 물질적 복을 약속하는 내용으로 해석할 수 없다.

기복신앙을 자극하는 또 다른 구절들

이제 ‘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기복신앙을 자극하는 데 기여해 온, 몇 가지 다른 구절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여호와께서는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신 28:13) 

위 성구는 필자가 우스개로 ‘머리-꼬리 콤플렉스’라 명칭을 붙이게 된 근거 구절이다. 많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구절을 자녀들의 입학, 취직, 결혼 등과 연관하여 인용하곤 한다. 그러나 이런 적용은 두 가지 면에서 그릇되었다. 첫째, ‘머리’와 ‘꼬리’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나 민족을 가리킨다. 신 28:1에 보면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라고 되어 있고 11절에도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로 되어 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성실한 관계가 외적 은택을 발현시킨다는 것은 구약 시대의 가르침이다. 누차 말하거니와 복에 있어 ‘내용’과 ‘형식’ 사이의  긴밀한 연접은 구약 시대로 끝났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욥 8:7)

이 구절도 장식패의 단골 내용인데 주로 사업장에 많이 걸려 있다. 보통 가게나 업소가 새로 생겨 출발을 할 때, 처음 시작 단계에서는 보잘 것 없더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크게 번성하기를 바란다는 희망의 메시지로 사용되곤 한다. 이 내용은 원래 욥의 친구인 빌닷이 욥에게 하는 충고(욥 8:1~8) 가운데 들어 있다. 그런데 욥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은 자녀들의 범죄 때문이므로(4절) 그런 영적 문제를 해결하면 머지않아 물질적 은택이 도래할 것(5~6절)이라고 설명한다.

빌닷의 처방은, 복에 있어 내용과 형식의 연접이라는 구약적 공식에 입각해 볼 때, 구구절절이 타당하다. 단지 자녀들의 신앙이 욥에게 문제를 초래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성경은 그의 자녀들이 범죄했다고 명확히 말하고 있지 않고, 혹시 범죄했다 할지라도 욥으로서는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리곤 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혹시 욥과 자녀들에 대한 빌닷의 판정이 정확했다고 해도, 그것은 앞에서 몇 번이나 언급한 복 개념의 그리스도 중심적 변화 때문에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는 해당될 수가 없는 것이다.

송인규 목사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학과 조직신학전공 부교수, 새시대교회 목회
* 이 글은 <복음과상황>에 실린 '쉽지 않은 주제, 풀어야 할 숙제 12가지'라는 글입니다. 우선 그 첫 번째 주제인 '복(福)'에 대한 이야기를 몇 차례 나눠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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