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맛을 알면..."
"돈 맛을 알면..."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0.09.18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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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이 장군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대령은 장군 바로 밑 계급입니다. 물론 대령까지 진급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장군과의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군인들이 그토록 장군이 되려고 하는 것은 장군이 되는 순간 달라지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변해서 달라졌지만 제가 군에 있던 시절에는 장군들의 차에 별판을 달았습니다. 번호판이 없어도 별판을 달면 운행에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별판은 특권의 상징이었습니다. 교통질서를 위반해도 아무런 제재가 없음은 물론 다른 차들이 별판을 단 차를 가로막지 못하도록 교통통제를 해주기도 했습니다.

제가 공군본부에 근무하던 시절 깐깐하기로 유명한 ‘봄비’라는 별명의 소장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탄 차에 경례를 안 하면 큰 일이 났습니다. 그런데 별판을 붙인 그 장군의 차가 지나가는데 중령 하나가 경례를 안했습니다. 차가 멈추어 섰고 그 중령은 징계를 받았다는(영창에 갔다는) 말이 나돌았습니다. 제가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서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당시 공군본부에서는 별판이 뜨면 온 부대가 긴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권은 전역 후까지 그대로 이어집니다. 군의 종류(육해공)와 계급에 따라 사회에서 다시 새로운 직업이 주어집니다. 공기업이나 사기업의 고문과 같은 자리에 앉아 그 기업의 문제를 해결하는 브로커와 같은 역할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전역 후에도 특권을 누렸습니다. 장군들이 많아져 그런 자리들이 모자라게 되면 당시의 주유소와 같이 허가를 받기 어려운 직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가 있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전관예우였고 군인들의 세상이었던 당시는 군인들이 못가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 배려도 모자라 장군이 되면 장군기금이라는 것을 냈습니다. 제가 군에 있던 시절 저는 그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준장의 경우 매달 3만 원을 냈습니다. 한정적으로 일 년을 기한으로 준장으로 진급을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런 장군이 매달 3만 원을 일 년간 내면 연금과는 별도로 평생 한 달에 팔십만 원을 품위유지비로 받았습니다. 계급에 따라 그 액수는 더 많아집니다. 결국 국가가 그 돈을 주는 것입니다.

제가 군을 제대한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이런 일이 불의하다는 지적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장군기금이지만 아마도 우리 사회 곳곳에 이런 가진 자들을 우대하는 제도들이 아직도 많을 것입니다. 국회의원들에게도 이 비슷한 돈이 지급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진 자들의 품위유지비는 이처럼 사회의 저항 없이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합니다. 받는 사람들은 그런 돈을 당연하게 여기고 적다 생각하여 하찮게 여기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통계를 내보면 그 총액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 야당 비대위원장인 김종인이라는 사람이 “국민은 한 번 정부의 돈에 맛을 들이면 거기서 떨어져 나가려고 하질 않는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인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장군이나 국회의원과 같이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에게 정부의 돈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위기로 살기가 어려워진 국민들에게 돈을 주는 것을 그렇게 말하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 아마도 김종인 자신도 국회의원이었으므로 국가로부터 매달 품위유지비를 받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살기 힘든 국민에게 지원금을 주는 것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부의 돈에 맛을 들인 것은 국민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사실을 그는 보아야 할 것입니다. 비단 그뿐이 아닙니다. 예비역 장군단체인 성우회가 일본 극우회의 지원을 받아 한일 군사교류사업을 진행한다는 기사도 보았습니다. 돈맛이 들어도 왠 못되게 들었습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장군이었다는 사실을 내세워 자신들을 틀림없는 애국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애국자가 아니라 돈에 함몰된 매국노들입니다.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부의 돈맛이 든 사람들은 일반 국민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성공한 바로 이런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비단 정부의 돈뿐이겠습니까. 한 번 돈맛을 들이면 사람들은 정신이 나가게 되어있습니다. 얼마 전 탈북자들의 대북비난 삐라 살포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을 때도 그들이 그토록 그 일에 집착하는 이유가 결국 돈에 맛을 들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두가 보았습니다. 얼마 전 한 성우가 자신의 아파트 놀이터에 아이들이 와서 노는 것을 보고 “서민 빌라촌에 사는 애들”이라는 표현을 한 것도 그 성우가 돈에 맛을 들였기 때문입니다.

“국민은 한 번 정부의 돈에 맛을 들이면 거기서 떨어져 나가려고 하질 않는다,”는 김종인의 발언은 추호도 틀림이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국민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 말을 하는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걸 알기 때문에 국민들만은 보호해주고 싶은 가히 살신성인에 가까운 발언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국민들 가운데 없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국민을 사랑하고 나아가 인간의 존엄을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돈맛 앞에서 두 가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우리 사회가 가진 자의 품위유지보다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존엄에 보다 신경을 쓰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정부가 품위유지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보다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더 신경을 써달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품위유지가 필요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만큼만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생각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품위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의 싸가지 없는 행동에는 침묵하면서 품위유지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을 게으르고 이기적이고 미련하다고 비난하는 우리 사회의 잔인함과 냉정함이 좀 줄어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이란 돈맛을 아는 사람이 돈을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돈을 미워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도 그것을 잘 압니다. 저도 돈이 생기면 힘이 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돈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돈을 버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돈을 버리는 법을 실천해야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그 강도를 높여가야 합니다. 돈을 무력화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바로 이 돈을 무력화하는 것에서 비로소 시작된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특히 목사들은 이 일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돈을 무력화 하는 일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돈에 환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며칠 전 글에서 저는 교회가 ‘돈 먹는 공룡’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재벌들이 그러는 것은 비록 불의해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업을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수단으로 삼습니다. 돈이 목적인 사람들이니 그런 그들이 내부거래를 하고 자손들이 하나씩 태어날 때마다 회사를 하나씩 더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규모는 작아도 재벌들과 똑같은 일을 합니다. 어린이집을 만들고 유치원을 만들고 학교를 만들고 사회를 위한다면서 각종 법인을 만듭니다. 그런데 그 책임자들을 한 번 확인해보십시오. 모두가 친인척입니다. 구체적인 교회의 예를 들지 않겠습니다. 교회들이 건물만 짓는 것이 아닙니다. 각종 명목으로 땅만 사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터전을 마련하면 그것을 이용하여 각종 이권사업을 벌이면서 재벌들의 길을 똑같이 따라갑니다. 그러니 교회가 돈 먹는 공룡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습은 ‘돈 먹는 공룡’의 피할 수 없는 선택입니다. 코로나는 돈맛을 들인 교회의 진면목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니,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엄청났다,”

며칠 전 길을 건너려는데 한 사람이 “배고파 죽겠습니다. 먹을 걸 좀 사 주세요.”라고 쓴 돈 통을 내 밀며 길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저는 얼른 노숙자 선생님들을 위하여 예비했던 돈을 꺼내 그 통에 넣었습니다. 제 앞에 나타나준 그 사람이 참 고마웠습니다. 그분이 연신 고맙다면서 허겁지겁 제가 넣은 돈을 꺼내 갈무리하는 모습이 슬펐습니다. 이 슬픔을 느끼실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슬픔은 기쁨보다 더 깊은 그리스도인의 감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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