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라!
한국교회,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라!
  • J. Brandon Lee
  • 승인 2020.10.11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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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위기속 믿음 공동체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제언 4.

[뉴스M = J. Brandon Lee] 뉴욕 부동산 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사업가로 성장, 유명 오디션 프로의 주인공으로도 활약, 2016년 거의 모든 매체의 예상을 뒤엎고 힐러리 클린턴의 오랜 꿈을 꺽으며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 예상치 못한 승리에 자신도 놀랐다던 그는 어느새 집권 1기를 마감하고 재선을 위해 달리고 있다.


미국 45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지난 4년간 그의 언사와 행동, 이민자로서 직간접적 영향을 받았던 일들을 토대로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생각할 때면, 필자는 고린도서의 말씀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11)


1946년생, 일흔이 넘은 고령의 어른에게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라’ 무턱대고 비난과 조롱 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미국 대통령이란 권한과 책임을 염두에 두고 보면, 그동안의 언사와 행동은 그가 지닌 직임의 무게와는 꽤나 달라 보였고, 최고 권력자의 태도라 보기엔 어린아이와 같았다는 것이다. 당장 지난달 말 대선 후보간 TV 토론회를 복기해보자. 주변 이민자 가정의 십대 자녀들이 보기에도 민망했던 토론쇼, 이제는 대통령의 코로나 확진 사태 관련한 뉴스로 이어지며 순수의 시대라 보기 힘든 트럼프의 나날들은 지속되고 있다.


일주일 전, 전세계 매체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COVID19확진 소식을 알렸던 그는, 입원했던 월터 리드 군병원에서 사흘만에 퇴원하며 그 자신감을 트윗으로 날렸다. “Don’t be afraid of COVID!” 미국은 최고의 의료기구, 의약품, 의료진을 지니고 있고, 덕분에 나는 20년전 보다도 좋은 상태라며 꽤나 흥분된 대통령… 흡사, “I will be back!”의 주인공 터미네이터를 연상케한 그의 메세지는 안타깝게도 코로나에 지친 평범한 미국민들을 위로할 수 없었다.


오히려 허탈하고 분노하게 까지 했다. 사흘간 전담 의료진에, 일억이 넘는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자신과 매달 의료보험비에 허덕이거나, 아예 보험조차 없는 수천만의 국민들을 같은 입장에 놓고보는 대통령. 영웅의 귀환을 알렸던 어린아이 같은 마음의 댓가는 강력한 지지층으로 형성되 온 미국내 노인들의 마음마저 돌아서게 했고, 미 대선 시계는 말그대로 안개속이 되버린 현실…


트럼프는 기독교인, 그의 재선이 한국이나 이민자인 우리에게 좋은 일 아니냐는 말을 종종 듣곤한다. 그럴때면 우선 드는 생각, 과연 트럼프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일까? 교회 앞에서 성경책을 손에들고, 예배당 문을 열어주었다 해서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까?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그의 육촌형 세례요한은 자주 권력자들과 부딪히는 모습을 보인다. 헤롯집안의 부정과 부패를 비판했던 요한은 어린 소녀의 바람을 따라 머리가 잘려 쟁반위에 놓였고,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사흘만에, 그것도 돌위에 돌하나 남김없이 허물고 다시 짓겠다 공언했다.


십자가에 달려야 했던 이유는 이미 거기서 분명해 진다. 예수께서 헐고자 했던 성전은 누가 지었던가? 대헤롯이라 불리던 이가 유대인을 위해 지어준 것이다. 정치적으론 로마의 승인을 얻고, 종교문화적으론 유대인들의 지지를 끌어내려했던 헤롯의 선택은 적중했다. 이후, 성전을 허물겠다는 예수, 성전을 지어준 헤롯 사이에서, 1세기 유대인들의 선택은 살인자 바라바만도 못한 자리에 예수를 두게된다. 분명 당시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지어준 이두매 사람 헤롯이 다윗의 자손 예수보다 좋았던 게다. 이 지점에서 다시 묻게된다.

 

성전을 지어주었다는 이유로 헤롯은 과연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

그의 백성이 되어질 수 있는가? 

위대한 미국을 꿈꾸기에는 가볍기 그지없는 트럼프의 언행과 존재감에도 여전한 찬사를 마지않는 이들의 대다수는 소위 복음주의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공간적 평행이론 이랄까? 근래들어 한국사회를 심히 걱정하여 격한 행동을 마다않는 보수의 사람들 역시 그 배타성과 좁은 마음, 뒤틀린 사고의 근간을 자신들의 믿음에 두고 있다는데 우려하지 않을수 없다. 보수적일 수 있다. 필요하다. 관습과 전통을 강조할 수 있고, 공동체로서 앞으로 나아감에 있어 무척이나 조심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깨닫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해 행동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다면, 이는 분명 다른 이야기가 된다. 무엇보다 신앙이란 어린아이에 머물지 않고 자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3-15)


믿음을 힘주어 말하는 이들은 그 동의어로 ‘자기확신’을 강조한다. 하지만, 믿음은 하나님과 관계한 일이고, 자기확신은 때로 스스로를 속이기까지 하는 그 내면의 상태 혹은 개인적 주장일 수 있다. 변함없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동시에 하루에도 수도없이 흔들리는 나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여정은 그래서 늘 흔들리는 터전의 경험이다. 믿음과 흔들리는 터전, 어울리지 않을 조합같지만, 믿음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다면, 깨물어보는 금덩이 마냥, 시험해 봐야 한다. 흔들려봐야 한다. 그렇게 아프고, 휘둘리고, 흔들려봐야 어린아이를 벗어나 성숙한 어른에 이를수 있다. 갈등속에 집어든 선택에 대한 책임과 성찰이 성숙을 이루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나오는 트럼프 대통령 @ 구글 이미지 캡쳐
병원에서 나오는 트럼프 대통령 @ 구글 이미지 캡쳐


코로나가 아니었더라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대전환기에 서있는 한국 교회공동체를 깊이 생각해본다. 선교초기로부터 100년을 훌쩍 넘어선 역사, 필자를 비롯, 왠만하면 믿는 가정의 전승이 3대, 4대에 이르는 한국교회가 지금 간직해야할 예언의 말씀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라”이다.


과학조차 일종의 생각의 틀, 체계일 뿐, 시대에 따라 옛것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틀을 찾아가라던 토마스 쿤 (과학 혁명의 구조 저자)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우린 이미 “이전것은 지나고 새것이 되었도다”라는 성경의 전통을 따라 매일 매일 주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 좇아나가는 사람들이다.


아프고 고통스러우며 두렵기까지한 위기와 기회의 공존, 진짜배기 변화의 기회 앞에서, 우린 오늘 어떤 계시의 말씀을 붙들고 성찰하며 기도해야 하는가… 코로나에 편승해 세상 끝, 종말의 날이 왔다는 헛된 교훈과 풍조에 휘둘리기 보다, 오히려 서슬퍼런 계시의 음성으로 붙잡아야 할 말씀,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라! 한국교회여 이제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고, 오직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행하며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자. 이것이야 말로 참된 종말적 공동체가 되어가는 뉴노멀의 시작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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