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윤리적 행위를 일삼는 목사에 대한 추종은 일종의 '샤마니즘'(Shamanism)일 뿐이다.
비윤리적 행위를 일삼는 목사에 대한 추종은 일종의 '샤마니즘'(Shamanism)일 뿐이다.
  • 박성철 목사
  • 승인 2020.10.14 04: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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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눈]

비윤리적 행위를 일삼는 목사를 단순히 '영적인 능력'이 있다고 해서 추종하는 이들은 목사를 "그리스도의 몸"(고전 12:27)으로서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가 아니라 원시종교집단의 '샤만'(shaman)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인 원시종교와 한국교회의 가르침은 다르다고 자주 주장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여전히 '샤마니즘'(Shamanism) 혹은 '무속신앙'(巫俗信仰)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샤마니즘 연구의 선구자인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년)는 그의 저서 『샤마니즘: 고대적 접신술』(Le Chamanisme et techniques archaïques de l’extase, 1950년)에서 샤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물론 샤만(chaman)은 마술사와 치료사이기도 하다. 샤먼은 모든 의사들처럼 치료하며 원시적이든 현대적이든 모든 마술사처럼 요술쟁이와 같은(fakiriques) 기적들을 수행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샤먼은 죽은 영혼을 인도하는 자(psychopompe)이며 성직자, 신비주의자 그리고 시인일지도 모른다.

- 『샤마니즘』(1950년), 21-

​한국사회에서 샤만은 '무당'과 동일시 되지만 종교학적 측면에 샤만은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일종의 종교 지도자로서 역할을 감당하지만 사회적으로 샤만에게 주로 요구되는 것은 황홀경(extase) 상태에서 신령이나 정령 등 초자연적 존재와 직접 교류하여 예언이나 신탁(혹은 탁선)을 하거나 병을 고치는 등의 초월적 현상을 이끌어 내는 일이다.

이러한 샤만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신앙체계를 샤마니즘이라고 부른다.

​서구적 인식론에 의해 각인 된 종교학에서는 샤마니즘이나 무속신앙을 흔히 하등종교로, 기독교나 이슬람, 불교 등을 고등종교라고 지칭한다.

신관, 내세관, 인간관 등에 있어 하등종교와 고등종교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특히 현대적 의미의 윤리의식은 양자를 구분하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이는 하등종교의 샤만과 고등종교로서 기독교의 목사를 구분 짓는 중요한 차이점이기도 하다.

​물론 하등종교에도 '타부'(taboo, 금기)라는 형태의 도덕적 원형이 존재한다.

하등종교의 타부가 고등종교의 윤리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보편적이며 복잡한 체계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고등종교가 타락이나 몰락의 조짐이 보일 때 윤리의식이 약화되면서 고등종교의 지도자들의 비윤리적 행위가 '초월적 능력'으로 정당화 된다.

이는 일종의 '주술적 힘'에 대한 욕망이 윤리의식을 외면할 때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 경우는 고등종교의 지도자는 샤만으로 전략한다.

이는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디도서 2장 7절은 교회의 지도자에게 "범사에 네 자신 선한 일의 본을" 보여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목회서신에 등장하는 장로나 집사에 대한 가르침에서 교회 지도자의 중요한 덕목은 대부분 '삶의 본을 보이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영적이면서 육체적인 삶을 포괄하는 것처럼 교회 지도자로서 '삶의 본을 보인다'는 것은 신앙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 모두를 포함한다.

​하지만 오늘날 일부 한국교회는 목사의 윤리적 측면을 지나치게 외면한다.

그래서 '영적인 힘'을 가지고 있거나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명목으로 윤리적 문제를 일으키거나 비윤리적 행위를 일삼는 목사를 비판하고 처벌하기보다는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비윤리적 행위를 일삼는 목사에 대한 추종은 목사를 샤만으로 여기며 따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일부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흔히 사용하는 '결박기도'나 '땅밟기' 등의 행위가 사회적 문제를 발생시키는 이유도 '영적인 권능'이나 '영향력'을 내세우면서 비윤리적 행위를 하는 지도자들을 무비판적으로 따르기 때문이다.

​먼저, 결박기도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성서의 가르침을 현대에 적용할 때, 문자적 해석은 다양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특히 예수의 기적 사역은 그 의도와 상황 속에서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병자를 고쳤다고 해서 현대에도 귀신을 쫓아내려고 할 때 김기동의 '귀신론'과 같은 이단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결박기도를 강조하는 목사들이 기도를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는 목적으로 남용할 때 더욱 심화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배려가 아니라 대척점에 있는 타자에 대한 억압이나 제재가 목적일 경우 소위 '영적 전쟁'은 너무나 쉽게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다.

하나님의 "뜻"(마 6:10)과 무관하게 자신의 이익이나 이해관계로 인해 타인이나 다른 종교에 대한 직·간접적인 폭력행위를 '영적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목사는 일종의 샤만일 뿐이다.

​'땅밟기'의 경우는 종교적 폭력성을 정당화하는 자의적 성서해석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일종의 은유나 상징으로서 '땅밟기'가 아니라 '영적 전쟁'이나 '어두운 세려과의 전투'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행위로서 '땅밟기'는 타자나 타문화에 대한 혐오의 표출일 뿐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이들이 자주 인용하는 여호수아의 여리고 성 이야기로 대표되는 구약의 종교 전쟁과 신약의 "믿음의 선한 싸움"(딤 6:12)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백번을 양보해서 양자 사이의 연속성을 인정하더라도 여호수아의 승리는 영토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물질적인 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목적이었지 복음의 전파를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전쟁의 상황과 평화기의 상황을 동일하게 인식하는 것은 일종의 강박관념일 뿐이다.

더구나 신약성서는 어둠의 세력과의 싸움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지 땅밟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21세기 위기에 직면한 한국교회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비윤리적 행위를 일삼으면서 삶의 '제자됨'을 무시하는 목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목사숭배이며 일종의 샤마니즘이라는 사실이다.


[출처] 작성자 옹켈팍OnkelPark 블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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