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대선 후보 토론에서 드러난 미국 민주주의 퇴행의 징후들
2020 대선 후보 토론에서 드러난 미국 민주주의 퇴행의 징후들
  • Young S. Kwon
  • 승인 2020.10.26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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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석 목사 칼럼
권영석 목사 (전 학복협 상임대표)
권영석 목사 (전 학복협 상임대표)

코비드-19로 인한 사상 유례없는 팬데믹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59번째 대통령을 뽑는 선거 유세가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었습니다. 열흘 남짓 후면 양단간 결판이 날 것입니다. 문제는 누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느냐 하는 결과뿐만 아니라, 당장의 현안인 코로나바이러스 극복 문제는 물론 인종 간의 갈등과 전 지구적 이슈인 환경 문제 등 굵직굵직한 이슈들이 걸려 있어서 향후 미국과 미국인들의 삶의 향방을 좌우할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선거가 될 것입니다. 나아가서 미국 민주주의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민주주의를 국가 정체성의 핵으로 삼는 미국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중차대한 시점에서 미국인은 엄정하고 막중한 도전에 직면하였다 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향후 이 나라의 백년대계가 걸린 투표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이런 중차대성에도 불구하고, 1차 토론의 ‘이전투구’를 극복하기 위한 보완책으로 한정된 시간이 지나면 마이크를 끄도록 했으나, 2차 토론에서도 미확인 정보에 근거한 인신공격성 발언과 서로 헐뜯기에 분주한 이전투구식의 공방전으로 초지일관하고 만 느낌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민주주의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토론에 기반한 합리적 상식들이 모여서 양식(良識)이 되고 그 양식에 따라 공동선을 모색하고 그 공동선을 도모하기 위한 각종 인프라를 구축해 나가도록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해 나갈 수 있는 것이 사실 가장 큰 장점이자 유익이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건전한 토론이 없는 민주주의는 무늬만의 민주주의일 뿐이며,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도리어 아까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뿐이거나 나아가서 형식과 절차를 갖추는 척하느라 애쓰는 쇼맨십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처음에는 ‘민주’라는 선한 의도로 출발했으나 리더십의 부정부패가 끼어들거나 나태한 관료주의로 고착되면서 민주주의가 그저 표방하기 위한 명분으로 저락한 독재 국가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대선후보 TV 토론회를 지켜본 소감을 숨김없이 말하라고 한다면,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는 토론회에서 제대로 된 토론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은 점을 감안하더라도 향후 미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나 그 기저의 가치 그리고 핵심 정책에 초점을 맞춰서 조목조목 자신의 관점과 의견을 드러내거나 변증하고 반박하기보다는 틈만 나면 어떡하든 상대의 인격과 업적을 헐뜯고 깎아내리거나 반대로 자기 과시에 급급한 채 그야말로 보여주기식의 스크린 쇼 이펙트에 골몰하는 모습이 측은하게 느껴질 정도였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선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CDP(Commission on Presidential Debates)의 의도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애초에 설정한 기대치는 무엇이었던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후보 간의 토론을 붙이고 시청자들이 지켜보도록 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속한 당의 국내외 정책을 소개하는 정견발표회를 인터뷰 형식으로 하자는 것인지, 그리고 또 토론 사회자의 역할은 무엇이며 권한은 어디까지인지 등등이 그다지 명확해 보이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사실 사회자 혼자서 질문과 상관없이 발언권을 함부로 남용하는 두 명의 토론자(후보)를 상대하기란 쉬운 것이 아니며, 그 역할도 애매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주제/문제만 던져 주고 두 사람이 자유 토론을 해나가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회자가 끼어들어서 함께 토론하는 것도 아니고, 또 토론자들이 사회자의 진행을 방해하거나 무시하는 경우 벌칙 등의 통제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여전히 사회자는 뭔가 두 후보를 뜯어말리는 역할을 떠맡게 되고 두 사람은 호시탐탐 서로를 깎아내릴 기회만 노리게 되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2차 토론에서는 마이크를 꺼놓았다고는 하지만, 각 주제/질문마다 2분씩의 자유 발제/발표 시간을 제외하고는 마이크를 다 켜놓은 상태였기에 저번보다는 좀 나아지긴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로 귀결된 것은 일면 불가피하였다 하겠습니다.

이런 상황/구조에서 사회자에게 모든 것을 다 관장하고 통제할 책임을 묻는 것은 정당하지도 않거니와 무의미한 평가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저 ‘주어진’ 시간에 할당된 질문/주제를 다 소화해 내는 것을 잘 된 토론 진행의 주요 준거로 삼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후보자 개인들의 자질이나 태도 문제도 영향이 없지 않겠습니다만, TV 토론의 의도나 형식 자체를 모호하게 설정한 상태로는 어차피 효율성이 떨어지거나 곁길로 나갈 위험 부담을 떨쳐버리기 힘들 것입니다.

트럼프 바이든 2차 티비 토론 (유튜브 갈무리)
트럼프 바이든 2차 티비 토론 (유튜브 갈무리)

아니나 다를까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팩트 체크조차 무시한 일방적인 중상모략은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왔으며, 그것도 통제받거나 걸러지지 않은 채로 시청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될 수밖에 없는 웃지 못할 일들이 첫 번째 토론과 매한가지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는 거짓 정보나 확인되지 않은 팩트에 기초한 채로는 결코 튼튼히 세워질 수가 없습니다. ‘카더라’ 통신에 기초한 민주주의는 그 ‘카더라’가 거짓으로 판명되는 순간 민주주의의 정신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역효과가 나타날 것이며, ‘아니면 말고’ 식의 태도는 책임 있는 민주역량을 결코 키워내지 못할 것입니다. 절차나 형식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내용상 진실과 팩트에 기초한 것이 아니면 토론을 중단시키거나 그 주제는 다시 꺼내 들지 못하도록 확약을 받고 나서 다시 토론에 임하도록 해야 했을 것입니다.

걸러지지 않은 팩트에 근거해서 상대방을 중상모략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는 사악한 태도는 사실 후보로 공식화되기 전 단계에서 이미 걸러졌어야 할 것입니다. 사회자라도 나서서 제동을 걸든 아니면 제삼자를 세워서 바로바로 팩트 체크를 해 주든지, 아니면 아직도 조사 중인 사건의 경우엔 재차 다시 언급하지 못하도록 분위기를 정화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팩트 부재 내지 왜곡된 팩트에 근거한 평가가 난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며 심지어 거짓 팩트에 근거한 평가는 벌점을 부여하거나 처벌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소위 위증죄(僞證罪)란 바로 이를 일컫는 말일 터, 더구나 일국의 대통령으로 봉사하겠다는 사람이 민주주의 기본인 진리와 진실을 함부로 훼손하려 든다면 이것이야말로 처벌받아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태도는 민주국가의 피선거권을 행사하는 대통령은 물론 선거권을 행사하는 민주 시민으로서도 어불성설이라 하겠습니다. 가짜 뉴스와 거짓 정보에 기초하여 투표하기 위해 막대한 선거 비용을 들인다면 이는 얼마나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일이겠습니까? 하물며 아까운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거짓 정보를 흘리고, 그 거짓 정보에 기초하여 사실무근의 중상모략을 자행하는 것을 전국의 국민들이 시청하는 가운데 마치 무슨 대단한 비전을 놓고 예리한 논쟁을 벌여서라도 그 가치와 비전을 다듬는 중대한 국가적 이벤트처럼 비싼 비용을 들여서 포장할 까닭이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무엇보다도, 이번 TV토론은 후보자 개개인의 국가관이나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바른 이해 그리고 국민을 위한 봉사의식이 출마의 선수(先需) 요건이자 대통령 후보의 기본 자격임을 의심하게 하는 토론회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국가와 국민의 안전과 복리를 위해 자신의 사사로운 이해관계나 공명심을 먼저 앞세워서는 안 되는 자리이자 직책일 것입니다. 이는 모든 공무원의 경우에도 매한가지라 하겠습니다만, 공무원의 수반(首班)인 대통령이 될 사람이 자신의 사익을 공익보다 앞세운다면 국가 전체가 어떻게 제대로 운영되겠습니까? 한 나라의 수반인 대통령을 선출하는 과정인 선거란 이런 관점으로 보자면 후보들이 함께 국가와 국민을 위한 공동선을 모색하는 대선(大選)의 과정이라 할 것입니다. 상대방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나와 내가 속한 정당이 추구하는 가치와 정책을 보완하고 심화하여 온전케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목표는 이기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선한 것을 찾아 나가는 데에 있다 하겠습니다. 내가 이기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다면 상대방의 약점(worse)에 주목하게 되지만, 선을 찾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다면 상대방의 강점(better)에 더더욱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서 상대방의 약점 또한 타산지석의 반면교사로 삼아 가장 선한 것(best)을 분별하고 지향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일국의 대통령에 입후보할 사람이라면 “내”가 이기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우리” 국가와 국민이 이기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국민이 가장 최선의 후보를 선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정당의 가치/도덕/철학이든 구체적인 정책이든 나아가서 자신의 캐릭터(character)이든 겸손히 제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지더라도 우리나라와 국민이 이기는 선거가 되고 또 유세의 전 과정이 될 수만 있다면 함께 자신이 당선되는 것보다 더욱 기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후보 토론회는 청중인 국민을 의식하고 국민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더 없이 효과적인 자리인 셈인데, 토론회를 지켜보는 내내 과연 이 후보들이 국민을 의식하면서 토론에 임하는 것인지, 이들이 과연 지금 국민들이 자신들 앞에 면대면으로 서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렇게도 함부로 방자히 망발을 늘어놓을 수 있을 것인가, 점점 회의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국민은 고사하고 피차 서로를 한 인격으로 인식하고 존중한다면 저토록 경멸의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인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2020 대선 후보 토론회는 1, 2차 모두 미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여실히 드러내었다 할 터이니 민주주의의 표상으로 칭송받던 이 나라가 도리어 민주주의의 몰락을 향해 도리어 퇴행의 길로 들어선 것 같아서 마음이 안타깝다 못해 자못 불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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