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교회주의는 경쟁의 산물이며 폭력의 결과입니다."
"개교회주의는 경쟁의 산물이며 폭력의 결과입니다."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0.11.10 0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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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브루더호프의 아이들>이라는 책을 읽고 브루더호프의 아이들이 부러웠습니다. 그 아이들은 야구를 할 때 점수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 도대체 점수가 없는 야구가 무슨 재미가 있겠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연 점수를 기록하지 않고 하는 야구는 재미가 없을까요. 글쎄요. 좀 재미가 없을 것 같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경쟁하지 않고 이기려 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연습하는 그곳 아이들이 많이 부러웠습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사회로부터 압박과 강요를 받게 됩니다. 거기에 거스르기보다는 순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압박과 강요라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압박과 강요를 가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순응이란 치명적인 일입니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순응하지 않는 삶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질서라고 말하는 것, 세상이 지혜라고 말하는 것이 사실은 압박과 강요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으로부터 신앙의 삶,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의 제자의 삶, 하나님 나라의 삶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보고 하나님 나라를 떠올리는 사람이 없어진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보다 더 경쟁적인 곳이 되었고 각자도생이라는 세상의 방식이 진리보다 더 확실하게 자리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인들 가운데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이 있어도 그것을 알아차리거나 느낄 수 없는 곳이 되었고, 금액이 정해진 주고받고 식의 거래만이 이루어지는 느슨한 상조회 같은 곳이 되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유치부와 주일학교입니다. 적어도 교회의 유치부와 주일학교는 경쟁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고 모두가 평등한 하나님 나라를 연습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유치부와 주일학교는 규모가 작아 더 세밀한 것까지 경쟁하고 이기는 법을 배우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 세상에 순응하는 신앙인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결국 교회는 세상에 순응하는 법을 일찌감치 배우는 곳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그런 곳이 되었기 때문에 돈 많은 사람들이 인정을 받고 행세를 하고,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세상의 질서가 확고하게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회를 부끄러워하는 이들을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교회가 다른 교회들보다 더 좋은 교회라는 사고가 모든 교회를 지배하는 사고가 되었습니다. 개교회주의라는 하나님 나라의 치명적인 누룩은 괜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개교회주의는 경쟁의 산물이며 폭력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가 세상의 방식을 따르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압박과 강요에 순응하여 그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입니다.

거창에는 1964년에 설립된 샛별초등학교가 있습니다. 이 학교에는 교과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 상(賞)을 주는 제도가 없으며, 학급반장도 윤번제로 합니다. 학력만으로 학생들을 평가하고, 불필요한 경쟁을 부추겨 학생들을 주눅 들게 하는 기존 교육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나름의 처방입니다.

샛별초등학교 기사를 보면서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삶을 배우고 연습하는 곳이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경쟁이 없는 하나님 나라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교회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교회주의에서 탈출한 교회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 나라는 경쟁이 없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가장 치열하게 경쟁하고 혐오와 배제라는 폭력의 방식을 생활화한 가장 세상적이고 반 하나님 나라적인 곳이 되었습니다.

샛별초등학교는 '모두가 함께 가는 학교'를 만드는 데 힘을 기울입니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학습 부진아에 대한 방과 후 개별지도 활동입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담임선생님이 방과 후에 학습이 뒤떨어지는 아이들을 개별지도합니다. 학습 부진의 문제를 사교육이 아니라 공교육에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결되는 것은 학습 부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학교의 중심이 우수한 아이가 아니라 뒤떨어지는 아이에게 맞추어지게 됩니다. 세상의 방식과 오늘날 교육의 현실과 정 반대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정말 훌륭한 일입니다. 너무나 고마운 일입니다. 바로 이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될 것입니다.

이 샛별초등학교의 초기 방향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홍종만 선생님의 가르침은 언제 들어도 감동적입니다. 그는 학생들이 그림을 그리면 모든 아동들의 그림을 교실 뒷벽에 붙였습니다. 잘 그린 그림, 못 그린 그림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잘된 것만 골라 놓으면 학생들이 그 그림을 모방하느라 자기표현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아이들의 글을 모아 한 권의 모음집을 엮곤 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서로의 글을 읽고 친구들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학예회나 운동회 역시 같은 정신으로 진행 되었습니다. 모든 학생들은 졸업 때까지 최소한 열여섯 번을 무대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게 된다고 합니다.

한 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만일 이런 일이 교회에서 일어난다면 우리의 교회들이 어떻게 변하겠습니까.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잘 그린 그림을 모방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 그린 그림을 모방해도 그 그림을 원래 그린 사람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못 그린 그림은 어떤 그림을 그려도 좋다는 허가가 됩니다. 결국 이 일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와 창의성의 문제로 연결됩니다. 각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첩경이 됩니다. 모든 사람의 창조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실험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꽃처럼 피어나는 아름다운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요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묘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찬양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은혜란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받은 선물처럼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선물이 무엇인지를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선물은 심지어 주는 사람으로서의 주체가 개인이건 혹은 집합적인 주체들이건 간에 이들에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선물로 나타나거나 또는 의미화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현상, 그것이 의미와 본질에서 선물로, 있는 그대로, 그 자체로 나타나는 그 순간으로부터, 그것은 부채의 의례적 순환 내에서 선물을 무효화하게 되는 상징적이거나, 희생적인 또는 경제적인 구조에 개입될 것이다. 주겠다는 단순한 의도는, 선물의 목적지향적인 의미가 수반되는 이상, 스스로에 대한 상환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하다. 선물에 대한 단적인 의식은 즉시 그 스스로에게 선함 또는 관대함이라는, 즉 주는 존재라는 만족스러운 이미지를 되돌리며, 스스로가 그렇다는 것을 아는 일종의 자기인식, 자기 인정, 그리고 자아도취적인 감사에 있어 순환적이며 반영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인식한다.(<주어진 시간>, 23)

내용이 어렵습니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천천히 잘 생각해보십시오. 데리다가 말하는 선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때에 비로소 은혜의 의미 역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값없이 선물로 주어진 은혜의 의미를 이해하고 깨닫게 될 때 경쟁이 없는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나라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한 손이 하는 일을 다른 손이 모르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당신처럼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주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선물로 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정말 보고 싶습니다.

샛별초등학교를 보십시오. 경쟁이 없는 세상은 가능합니다. 브루더호프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합니다. 아니 교회에서도 가능합니다. 그것을 샛별초등학교가 보여줍니다. 기사를 보고 샛별초등학교 출신 사람들을 보고 싶고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분들의 인생을 한 번 보고 싶습니다. 그분들이 어떻게 우리 사회에서 살았는지 그 궤적을 한 번 살펴보고 싶습니다. 다를 것입니다. 확연히 다를 것입니다. 그분들 가운데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는 분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혹 오늘 제 글을 보신 샛별초등학교 졸업생분들이나 그분들의 이야기를 아시는 분이 계시다면 제게 꼭 연락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분들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정말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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